알라딘서재

복있는사람들님의 서재

옮긴이의 말

『작은 땅의 야수들은 처음 검토 의뢰를 받았을 때부터 내 마음을한바탕 휩쓸어 갔다. 태어난 땅이 아닌 곳을 고향으로 삼아 살아가는 것,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나를 표현하는 데 익숙해지는 것, 이미지나가 버린 시간대를 우리의 또 다른 현실로 오롯이 되새기는 것,
이 모든 것에는 어떤 깊고 딱딱한 슬픔을 거친 후에야 빚어지는 진주 같은 사랑이 깃들어 있다.
나는 검토자이기에 앞서 독자로서의 애정을 숨기지 못해 부끄러워질 만큼 두툼한 검토서를 편집부에 발송했다. 보통 해외 도서 검토는 원문을 번역하기 전에 책의 판권 계약 여부를 결정하거나 장단점을 파악하기 위해 이루어지는 만큼, 간결한 요약과 논평, 핵심 지문의 맛보기 번역 등이 요구된다. 그러나 이 소설에는 공들인 번역
그 자체를 내부에 간직하고 있는 듯한 아름다운 문장이 너무도 많았고, 양쪽 언어의 밧줄을 번갈아 당기면서 저자가 의도한 심상을 최대한 구현해 내는 작업이 매우 즐겁고 행복했기에 ‘이 책은 꼭 한국어로 번역 출간되어야만 합니다!‘라고 외쳐대는 열정의 검토서가 완성되었다.
물론 굳이 내 외침이 아니어도 한국에 출간되어야 할 당위성은충분했다. 다수의 유명 문예지에 감각적인 단편들을 기고하며 미국독립출판계에서부터 주목받기 시작한 한국계 작가의 첫 장편소설인데다 한국의 근대사를 배경으로 하는 대하소설이었고,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 출간을 앞둔 상황이었으니 한국에서 출간되는것 역시 당연한 이치였다. 다만 내가 읽었던 문장들과 그 글자들로이루어진 공기의 느낌을 오롯이 놓치고 싶지 않다는 것, 그 풍경 속으로 독자를 데리고 가고 싶다는 욕심이 그 어느 때보다도 높이 치솟았다. 검토서를 보내고 나서 지친 저녁, 서울 2호선 지하철역 앞에서 다정한 친구가 사주는 국수를 먹으며 ‘정말 이 책의 번역을 맡게되었으면 좋겠다‘라고 주문을 걸듯 이야기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렇게 된다면 그 친구에게 한 권 선물하겠다고, 소원처럼 했던 약속을 실제로 지킬 수 있게 되어 굉장히 기쁘다.
번역자는 그 책의 가장 꼼꼼한 독자라는 말이 있다. 지금까지 작업했던 작품들을 되새겨 보면 과히 틀린 말은 아니다. 작품을 신중하게 열심히 읽는 건 기본 사항이지만, 거기에 쏟아지는 애정의 밀도가 이렇게 촘촘해질 수도 있다는 걸 이 작품을 통해서 느끼게 되었다. 예상보다 번역 기간이 길어졌음에도 꾸준한 인내심을 발휘해
주신 김주혜 작가님, 김보람 편집팀장님, 정말 고생이 많으셨던 박하빈 편집자님, 홍상희 교열자님, 번역 기회를 주신 다산북스 관계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작가님께서 직접 번역 원고를 읽고, 한국어 필체로 자상한 피드백을 해주셨던 것 또한 번역자로서 유례없고 소중한 경험이었다. 한국어를 써본 경험이 있는 저자가 영어로 쓴 원문은 마치 이중으로 섬세하게 조각된 예술품 같았다. 거기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서 처음부터 그 안에 들어 있던 독창적 심상을 복구하여 캐내고, 또 언어를 옮기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상실되는 파편들까지 덧붙여, 애정을 품은 한 독자로서 그 속에서 바라보고 호흡한 풍경을 가능한 한 한국 독자에게 그대로 보여주고자 했던 노력을 작가님도 이심전심 알아주신 것 같아 뿌듯했다.
떠도는 사람들은 글자 속을 고향 삼아 만난다. 이 작품을 향하여쏟아지는 전 세계 독자들의 열광적 지지는 국적을 초월한 공감을 바탕으로 한다. 드디어 한국 독자들도 이 책을 만나게 된 셈이니, 그에대한 사명감을 가지고 정성을 담아 언어를 갈고 닦았다.
일제강점기의 역사와 배경지식을 추가로 공부하며, 당시 근대 서울의 지리와 생활상을 조사하여 등장인물들의 발자취를 열심히 탐색해 보았다. 다만 현실에 기반을 둔 픽션인 만큼 정확한 역사적 고증보다는 의도적인 모티브 활용과 교차적 환유로 기능하는 요소들이 있음을 알려둔다. 동경, 상해의 지명 등은 가능한 한 현대어가 아난 당대의 한자어 표기 방식을 따랐다. 한편, 한국의 지명은 조선이아닌 한국으로 표기했다. 작품 내에서도 ‘Korea‘로 표기하고 있는 만큼 어느 특정 시대에 고정되어 소비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현대 독자
들이 현재의 한국까지를 한 국가의 역사로 인식하도록 이끄는 원작의 의도를 존중하기 위함이었다.

옥희Jade, 연화Lotus, 월향 Luna, 은실Silver 등 원서에서는 더 단순했던 등장인물들의 한국어 이름을 지어보도록 제안을 받은 것도 역자로서 잊을 수 없이 소중한 기쁨이자 크나큰 영광이었다. 원작에서주어진 한 글자에 덧붙여서 시대상. 직업상으로도 어울리고 각 인물의 매력적인 성격이 드러날 수 있도록 고심하였는데, 한국어 독자들에게도 잘 전달될 수 있다면 좋겠다.

평양에서 제주까지, 웅크린 호랑이 모양의 한반도를 옥희가 종단하는 동안 내 노트북 잠금화면에는 호랑이 두 마리가 함께 있는 사진을 깔아두었다. 잠시 자판을 치는 걸 멈출 때마다 나타나는 엄마와 딸 호랑이가 온갖 색채와 감정이 밝고 힘차게 꿈틀대는 다음 문장을 어서 꺼내 보라고 격려해 주는 것 같았다. (아마도 니콜라이 바이코프의 『위대한 왕』을 읽고 난 어린 시절부터) 항상 좋아하는 동물로 호랑이를 꼽아왔지만, 이 책을 통해 호랑이에 대한 애정도 한층 더 진해졌다. 김주혜 작가님은 ‘작은 땅의 야수들』 인세 일부를시베리아호랑이를 보호하는 재단에 기부하고 계신다고 한다. 이처럼 드물고 귀한 작품의 출간에 참여할 수 있게 되어 행복하다. 작가님과 편집자님, 그리고 이 책을 읽어주신 독자들께 다시 한 번 큰절로 감사드린다.
2022년 9월박소현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