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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에 관하여

오늘날 양심은 곤경에 처한 듯 보인다. 많은 ‘양심 자전거‘가제자리로 돌아오지 않듯이 양심은 믿을 만한 것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세상에서 잘 단련된 사람들은 ‘믿는 것은 좋지만 감시가 더 낫다‘는 견해를 밝힌다. 

양심에 제기될 수 있는 혐의는 두 가지다. 하나는 자의성이고, 다른 하나는 위장된 사회권력의 성격이다. 
양심은 판단하는 개인만이 접근할 수 있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니 양심에 의거한다는 것은 실제로는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을 양심이라고 여길 가능성에 노출된다. 
사실 생각해보라. 양심은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양심이란 것은 결국 개인에게 저장된 규범적 판단들의 어떤 집합이 아닌가? 만일 그 집합의 설정이 개인의 권한에 달려 있다면, 양심의 자의성은 불가피해 보인다.
양심이 자의적이 아니라면 그것은 타인들이 기대하는 규범이 내재화된 것일 가능성이 크다. 이 경우 양심에 호소한다는 것은 정말 그 개인의 판단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내재화된 규범을 ‘불러내는‘ 것이다. 
양심은 권력이 개인에 대한 감시와 통제의 비용을 줄이기 위해 개인의 내부에 장착시킨 규범 칩chip에 불과한 것이 된다.
그런데 이것이 양심에 관한 우리의 막연한 이해를 제대로 개념화한 것일까? 
나는 부분적으로만 그렇다고 생각한다. 

양심에 대한 위와 같은 이해는 ‘자유‘와 ‘규칙‘에 대한 특정한 이해에 기반하고 있다. 자유는 분명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자유의 본령이 자의성에 있다고 여기며, 자의는 자유와 가장 먼 것이라는 고상한 자유의 형이상학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회적 의미에서의 자유는 다르다. 사회적 삶이라는 조건하에서 애초에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유의미한 자유는 사회적 삶의 조건하에서의 자유이다. 그래서 사회적 의미에서의 자유를 이야기할 때는 ‘규칙‘의 문제를 우회할 수 없다. 타인들과의 삶은 (거의) 언제나 규칙들에 따라 조정되기 때문이다.

규칙 밖에서 살 수 없다면, 사회적 의미에서 자유롭다는 것은 내가 따르는 규칙이 ‘나에게 제정의 권한이 주어졌더라도 그렇게 만들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규칙‘일 때다. 양심을 이런 ‘자유의식‘과 연관시키면 양심은 위에서 언급한 자의성이나 내재화된 권력과는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양심에 호소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자신이 만든 규칙에 따른다면어떻게 판단하겠는가‘를 묻는 것이다.
양심을 이렇게 이해하면, 우리가 어떤 사람의 양심에 호소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규칙에 대한 반성적 태도를 가질 수 있는 ‘능력과 권리‘를 인정한다는 뜻이다. 
반성적 판단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양심을 기대하는 것은 수취인을 잘못 정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반대로 양심에 비추어 판단할 자격을 부여받은 사람은 자신의 삶에서 ‘반성적 일관성reflectiveconsistency‘을 유지해야 할 의무가 있다. 자신이 양심적인 존재임을 통용되는 규칙에 언제나 합치하는 식으로 증명할 필요는 없지만, 규칙을 어길 때는 충분한 근거 위에서 그렇게 한다는 것을 자신의 삶을 통해 장기적으로 입증해야 한다. 양심은 자연적 현상도, 초자연적 현상도 아니다. 그것은 반성적 능력을 갖춘 사람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사회적 삶의 한 양식이다.

양심을 이렇게 이해하면 양심과 관련된 우리들의 경험 하나를 조금 더 잘 설명할 수 있다. 양심에 어긋나는 행위를 했을 경우 우리는 두고두고 괴롭다. 꿈에서조차 괴롭다. 왜 그런가? 만약 양심이 내재화된 사회적 권력일 따름이라면, 나는 양심에서 멀어질수록 자유롭다고 느낄 것이다. 그래서 양심의 고통은 나의 사고에 각인된 권력의 깊이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양심은 자신이 자유롭고 존중받을 만한 존재라는 의식과 내밀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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