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의에 관하여
예의는 긍정적 역할기대에 맞는 행위 양식을 말한다. 긍정적 역할기대는 관계와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서로 몸이 스치는것조차 싫어하는 것은 애인으로서의 예의가 아니지만, 친밀하지 않은 사람이 자꾸 가까이 다가서는 것 역시 예의가 아니다.
예의가 아름답게 보일 때가 있다. 그것은 서로의 역할대에 대해서 서로가 자유롭게 동의하고 그에 따라 행동할 때다.
반면 예의가 족쇄일 때도 있다. 그것은 나에게 내가 동의할 수 없는 역할기대를 하고 그에 맞게 행동하기를 요구할 때다.
신분지배의 사회에서 하층계급에게 요구되는 예의가 그랬고 남성지배 사회에서 여성에게 요구되는 예의가 그랬다.
그래서 많은 경우 예의를 파괴하는 것 자체가 혁신의 시작이었다.
어법과 인사 방식, 복장을 의도적으로 달리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자극적인 이유는 그것이 단지 패션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의의 부정적인 면 때문에 예의를 전부 다 버리
려는 것은 잘못이다.
예의 없이는 자유로운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를 지켜가기가 불가능하다. 한두 사람만 예의를 지키지않아도 사람들은 곧 경찰이 필요하다고 말할 것이다.
아침에 산책을 나갔는데 누군가 밤새 산책로에 똥을 싸놓았다. 분개했지만 치우기로 했다. 그것 때문에 나와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 산책길을 기피한다면 똥을 싼 사람에 의•해 최대의 피해를 보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안 치웠으면 그 사람이 두고두고 미웠을 텐데, 치우고 나니 그렇게 밉지 않았다. 다음에 안 그러기를 바랄 뿐. 너무 급해서 그했을 수도 있으니까.
그러면서 과거를 떠올렸다. 내가 귀갓길에 토해놓은 흔적을 보고 혹시 누군가가 거기서 더러운 오물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내 청년기의 방황과 고뇌를 읽었다면,
나는 얼마나 행복하고 또 부끄러웠을까.
예의를 갖추고 타인에 대해 애틋한 마음을 표현하며 기다려주는 것은, 종종 상대의 정말 불쾌한 행위에 대한 가장 훌륭한 대응이 된다.
신념 때문에 고통스럽더라도 신념은 내 마음대로 어찌할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생각이란 선전이요, 전략 이상의 것이 아니다. 나는 신념의 주인이 아니다.
오히려 신념이 나의 주인이다.
그래서 자신의 믿음을 어떤 다•른 편익과도 바꿀 수 없어 차라리 목숨을 버리고자 하는 순교가 아마 신념의 가장 순수한 표현일 것이다.
그런데 수세적 신념과 달리 공세적인 신념은 의심해 볼 만하다.
공세적인 신념은 그 뒤에 신념 외의 다른 이익이 도사리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큰소리로 외쳐댈수록 근거 없음을 은폐하기 위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공세적 신념은 많은 경우 신념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비슷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최대의 희생을 요구하기 위한 전략이다.
그러니 신념은 갖기도 어렵고 위험하기도 하다. 지적인 부담을 담당해야 하고 신념이 요구하는 희생을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
제대로 된 신념은 우리에게 확고한 기반을 심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찰과 고독, 희생을 감내하라고 요구
한다.
그러나 설명과 증명을 위한 지적인 부담과 그것을 지키기 위한 희생을 기꺼이 감수할 용기가 있는 신념을 갖는 것,
그것은 인간의 가장 존중할 만한 모습이다.
그러나 너무 쉽게 신념을 말하는 자를 경계하라!
따지고 보면 관용은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의 말이나 행동에 대해 어떤 제재 수단을 가지고 있을 때만, 그러니까 내가 어떤 의미에서 강자일 때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상대로부터 해를 입을까 봐 상대의 행동을 묵인하는 것은 관용이 아니라 회피나 타협이다.
‘착한 내가 참지‘라는 농담은 현실에 만연한 회피와 타협을 반영하는 것 같다.
그런데 위에서 우리는 강자야말로 약자에 대해서 자신의 말과 행동을 자제하기가 어렵다고 하지 않았던가. 여기에 바로 관용의 어려움이 있다.
혹시 누군가는 "나를 일단 강자의 위치에 올려다오. 그러면 내가 얼마나 관용적인지 보여주지"
라고 냉소적으로 말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는 보통 자신이 입힌 피해보다는 자신이 입었거나 입을 수 있는 피해에 민감하기 때문에, 자신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을 주목하고 신경 쓰고 있을 뿐이다.
자신이 타인에게 행사하고, 행사할 수 있는 억압과 구속은 쉽게 눈에 띠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강자의 힘을 ‘상처 입힐 수 있는 능력‘으로 이해할 경우, 이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다소간의 차이는 있지
심지만 모두 강자다. 세상에서 정말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남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다. 대등한 시민 사이는 물론이고,
어 어린 자식도 부모가 정서적으로 자신에게의존적이라는점을 이용해서 부모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 학생과 선생의관계도 마찬가지다. 선생은 성적을 매길 수 있는 권한이 있기때문에 학생의 눈에는 강자로 보인다. 그러나 스포츠 클럽에•서라면 선생은 젊은 제자가 부럽기만 할 것이다. 아무튼 누구•에게나 자신보다 약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그가 보통의 위치에서 관용적인 태도를 갖지 못한다면, 그가 더 강자의 위치에 올라섰을 때 관용적인 태도를 가지리라는 보장이 없다. 그러니까 관용은 강자만을 위한 윤리가 아니고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윤리인 것이다.
더 이야기를 진행하기 전에 내가 ‘관용의 역설‘이라고 부르고자 하는 사태를 분명히 하고자 한다. 관용은 바로 관용이 필요한 곳에 충분하게 있기 어렵다. 마치 빈부격차가 심한 나라에서의 화폐처럼 말이다.
관용은 상대에게 어떤 제재를 가할 수 있지만 스스로 삼갈 때만 성립하는 것인데, 바로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이야말로 남에게 상처를 주는 말과 행동을 쉽게 하지 않는가.
바로 관용이 필요하고 또 있어야 할 곳에 관용이 자리 잡기 어렵다는 사실, 이 ‘관용의 역설‘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리고 어떻게 대처할까?
강자의 자기절제에 호소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도박이다. 그래서 강자가 행사하는 자의적 폭력에 맞서는 제재 수단을 강구하는
stewing
나는 근현대사회에서 중요한 사회비판의 유형들이, 번영의또래인 빈곤 위험을 유지시키는 굴종, 풍요의 기반인 무책임문제시하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사회 일부(부르조식 제급)의 번영이 얼마나 임금노동자들에 대한 착취와 그등의 고난에 바탕한 것인지를 실감한 사람들은 노동자의 해이 세상을 바꿀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사회주의자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남성들이 위엄과 자존심을 지키고 사는 사회가 얼마나 여성들의 굴종에 바탕한 것인지를 실감하는 사람들은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누리고 남성만큼 선택적이 될 때 세상이 바뀔 것이라고 믿지 않을 수없다. 그들은 여권주의자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오늘날 산업사회의 물질적 풍요가 얼마나 자연에 대한 무책임한 남획(종 다양성 감소, 부존자원 고갈, 오염증가 등)에 의존하는가를 아는 사람들은 생태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세계가 달라져야 한다고 판단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생태주의
•자 또는 최소한 환경주의자가 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사회 일부의 번영 독점, 남성의 특권적 위치, 산업사회의 무책임성을 문제삼는 의식이 현대사회에서도 여전히 가장 중요한 비판의 원천이라고 생각한다.
고난과 굴종의 위치에 선자, 자연의 훼손에 의해 삶의 존립 기반을 빼앗긴 자는 자신의 위치에 의해 비판적 잠재력을 형성한다. 때로 그들•은 답답하리만치 자신들의 이익과 반대되는 방식으로 행동하기도 하지만, 그들이 스스로 상황을 문제삼기 시작할 때 세상의 근본적인 변화가 시작된다.
•비판적 이론가란 스스로의 경험을 바탕으로, 또는 빈곤과 굴종에 선 자들과의 연대의식을 바탕으로, 또는 자연을 책임의 영역으로 여겨야 하는 경험을 바탕으로 이 세계에 대해,
그리고 이 세계를 정상화하거나 최종화하려는 입장들에 대해 거리를 취하는 데서 출발한다.
비판적 사유란 세계에 비판적 거리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미 있는‘ 비판적 거리에 자신을 접속함으로써 성립한다. 이론가의 과제는 저거리를 정당화의 물음에 연결시켜, 그 거리를 해소하는 것이다.
타인의 복지를 향상시키며 자연의 남획을 방지할 수 있다면, 자신의 풍요와 특권적 위치를 (최소한 어느 정도라도) 제한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만이 비판적 사유자가 될 수있다. 비판적 이론가는 컨설턴트가 아니다.
하지만 조건이 있다. 기업 내에서 해고 문제를 다루는 협의체가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도 국가가 해고된 사람들을 재취업 훈련과 복지를 통해서 흡수해야 한다.
물론 그런 재원은기업과 일자리를 가진 사람들로부터 조달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자본주의의 진화 과정에서 형성된 하나의 (그리고 현재로서는 최적의) 해법이다. 무척 중요한 진화적 성취다.
이제 묻는다.
기업은 그런 국가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는가? 오히려 주로 방해를 해오지 않았는가? ‘
해고할 수 있는국가를 만들려고만 했지 ‘해고해도 좋은‘ 국가를 만들려고는 안 하지 않았는가.
만일 그렇다면 기업은 해고의 자유를 말할자격이 없다.
국가더러 농성을 해산시켜달라고 하는 것은 협•잡꾼이 되라는 것이다.
보험을 들지 않은 사람은 사고처리 비용을 스스로 부담해야 하듯이, 복지국가 형성을 막아온 기업도 해고 후유증을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
주주들에게 거액의 배당을 할 수 있는 여력이 있었다니,
노동자들이 해고를 감수할 이유는 더더욱 없다.
고공농성을 슬픈 마음으로 지지한다.
그런 농성을 사라지게 하는 농성이 되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