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노벨문학상은 헝가리 작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에게 돌아갔고, 그의 대표작은 <사탄탱고>인데, 나같은 사람에게 흥미를 끌기에는 충분한 제목이었다. 그래서 순순히 낚일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자발적인 낚임에는 후과가 좀 있다. 온 몸에 거미줄이 들러붙어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되는 것이다. 만약 누군가 이 소설을 읽는다면 비가 올 때는 읽지 마시라는 조언을 하고 싶다. 물론 늪 속으로 가라앉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독서를 즐긴다면 습한 날을 골라서 읽을 수도 있겠다.
주인공은 이리미아시. 헝가리어 이리미아시는 영어로는 예레미야로 읽는데 성경의 그 선지자와 이름이 같다. 칙칙하고 습하며 거미줄과 곰팡이가 가득한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가난하고 희망이 없다. 꼬마부터 교장선생님까지 남편 있는 부인들의 몸을 탐내며 술과 담배에 찌들어 있다. 내일에 대한 기대라곤 없을 것 같은 마을에 날아든 민들레꽃 씨앗같은 소식은 죽은지 알았던 이리미아시가 마을로 돌아오고 있다는 것이다. 이유는 나오지 않지만 사람들은 그를 성경 속 예레미야를 보듯이 대한다. 습하고 가라앉을 것 같은 마을에 선지자 같은 사람이 부활한 듯이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읽기가 쉽지는 않다>
지독한 만연체 문장이다. 그의 소설에는 마침표 대신 쉼표가 찍히는 일이 많다. 한 문단이 하나의 문장이다. 의도적으로 보이는데 어떤 문단은 띄어쓰기를 해야 할 곳을 다 붙여 놓았다. 그러다 보니 책 한 페이지 까만색 글자들의 전체적인 형상이 단정한 직사각형이다. 나는 만연체 문장을 싫어하지는 않지만, 한 호흡에 읽히지 않는 만연체를 선호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라슬로의 문장은 그가 묘사하는 마을 같다. 한 호흡에 읽히는 만연체 문장은 아니지만 왜 그렇게 쓸 수 밖에 없는지가 납득이 되기는 한다. 이 소설은 이 문체로 쓸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관계없는 이야기지만 내가 아는 최악의 만연체 문장은 대한민국 헌법 전문이다. ‘~하고, ~하며‘로 이어진 문장에서 어떤 필연성도 찾기 어렵다. 게다가 한국의 민주주의는 굉장히 단절적이었기 때문에 적절하게 끊어 주는 것이 나았을 것이다. 이 소설을 읽지 않았다면 이런 생각까지 하지는 않았을 텐데, 라슬로의 만연체가 그가 묘사한 희망없는 세기말적 풍경의 마을과 어울리듯이, 헌법 전문의 답답함은 한국 정치와 역사의 그 어떤 면과 닮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을 통해 한 문장으로 구성된 헌법 전문의 필연성을 처음 느꼈다.
<현미경 렌즈를 쓰고 있는 가짜 선지자의 이야기이다>
타인의 삶에 적당한 정도의 신비감을 가져야 신뢰감도 가질 수 있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타인의 삶을 현미경으로 관찰한다면 많은 경우 존중감과 존경심이 거두어 지고 그 찌질함에 치를 떨게 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라슬로는 독자들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에게 감정을 이입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장치를 고민했던 것 같다. 그 장치가 바로 현미경 렌즈 같은 문장이다. 등장인물들을 거시적으로 다루지 않고 순간 순간의 미시적 움직임과 심리를 집요하게 들여다 본다. 그 어떤 인물에게도 감정이 이입되지 않는다. 그냥 한숨이 쉬어지고 답답하다는 생각만이 가득하게 만든다. 다만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궁금하게 만드는 힘만은 충만하다. 이것이 마지막 책장으로 독자를 이끄는 유일한 미덕이다.
이리미아시는 가짜 선지자이다. 소설은 그 이유를 전혀 설명하지 않지만 사람들은 이리미야시의 귀환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그리고 그의 귀환 일성은 더 나은 세계로 나아가자는 것이었다. 말이 되든 그렇지 않든 간에 비전을 들고 돌아온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 비전은 거짓이었다. 현혹하기 위해 동원한 신기루 같은 말일 뿐이었다. 독자의 입장에서, 이 이야기 전개에 저항하고 싶은 마음이 이는 것은 당연하다. 희망을 달라고, 좀 더 정직한 비전도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고 싶어진다. 이리미야시는 성경 속 선지자 예레미야를 헝가리식으로 읽은 것이고, 이리미야시와 동행하는 페트리너의 영어식 표현은 피터이고 피터는 성경에서 베드로로 표기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리미아시와 페트리너를 통해 라슬로는 성경이 약속하는 구원에 대한 불신을 전도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이 술집에 모여 탱고를 추는데, 그 탱고가 ‘사탄탱고‘인 것은 이런 이유이다.
<윤회,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 절망의 영원회귀>
압도적으로 대단하다고 느꼈던 요소는 이 소설의 형식적인 측면이 문장과 문체, 소설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메시지와 완벽하게 맞아 떨어졌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완벽하게 구성해낼 수 있다는 것,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모두 2부로 이루어져 있고, 1부는 1장부터 6장까지인데, 2부는 6장부터 시작해서 1장으로 끝난다. 소설의 형식이 하나의 원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이 원은 닫혀있다. 마을 사람들은 이리미아시를 통해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하지만 이리미아시는 거짓 선지자였다는 말을 이미 했다. 결국 이리미아시 전과 후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니체가 말한 영원회귀의 답답한 세상이 펼쳐지는 것이다. 무변의 세계처럼 지옥같은 곳이 어디에 있을까?
지옥에 대한 묘사의 고전은 단연 단테의 <신곡>일 텐데 신곡이야 서사시 형식이고 워낙 고전이니까 제외하면 소설로서는 단연 탁월한 비유라고 생각한다.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 절망의 영원회귀, 간혹 선지자가 찾아오지만 그 또한 거짓 선지자인 마을.
가스파르 코에닉의 소설 <지옥>은 홍세화 선생님이 지면에 소개한 적이 있어서 읽어본 소설인데, 이 소설의 묘사에 대해서도 놀랐었다. <지옥>이 묘사한 그곳은 공항이었다. 무한대의 신용카드가 주어지는데 문제는 머무를 수 없다는 것이다. 늘 공항을 통해 어딘가로 여행을 가야 한다. 무한의 여행, 정주의 권리가 없는 곳, 따라서 ‘관계‘할 수 없는 곳, 가스파르 코에닉의 지옥은 물질문명의 자본주의였다.
<같은 제목, 소설을 원작으로 한 놀라운 영화도 있다>
<사탄탱고>는 소설이 원작이고, 원작자가 시나리오에 참여한 같은 제목의 영화도 있다. 여러가지로 놀라운 영화인데, 일단은 이 영화의 러닝타임에 경악했다. 7시간 18분이다. 세상에. 흑백영화다. 지독한 롱테이크 기법으로 소설 속 묘사를 화면으로 옮겨 놓았다. 글로 읽었을 때 느꼈던 답답함, 끈적임, 꿉꿉함, 그리고 절망감, 이 모든 것을 화면에서는 더블 샷을 추가한 커피처럼 더 진하게 느낄 수 있다.
추석 연휴 기간 동안 이 영화를 봐버렸다. 나로서도 놀라웠다. 맙소사, 이걸 봤다니. 일단 영화를 플레이 시켜놓고 자리를 잡으면 내가 집중을 하든 그렇지 않든 시간은 흐르고 영화는 진행된다. 기분을 다운 시키고 싶을 때, 혹은 냉정하고 차분해 지고 싶을 때 보면 좋다.
공산국가였던 헝가리의 집단 농장이 해체되고 사회체제가 바뀌기 시작하던 무렵에 쓴 소설이라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 답답하고 절망적인 분위기가 이해된다. 중국으로 반환을 앞둔 시기의 홍콩 영화에서도 느낄 수 있었던 그 처연함이나 희망없음의 정서가 <사탄탱고>에서도 재연된다. 다만 <화양연화>가 아름답고 아련하며 붙잡을 수 없는 안타까움으로 그 시대의 감정을 되살렸다면, <사탄탱고>는 좀 더 무자비하다. 읽기가 어렵다고 말을 했지만, 그렇다고 잘 읽히지 않는 소설은 아니다. 읽히긴 하지만 내가 무얼 읽고 있는지 헤매게 하는 소설이라는 점을 기억한다면 볼 만하다. 다 읽어야 느낄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