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란하다 현란해!!!
2008년에 46살로 세상을 떠난 미국 소설가. 믿고 읽는 번역가 김명남 '님'이 엮고 옮겼다. 이 책에는 애초에 한 군데 모여있던 글이 아니라 그가 발표한 몇 권의 책들에서 선별한 글들이 실려있다고 한다. 이 글들을 엮어 낸 믿고 읽는 번역가 김명남 '님'의 안목도 살펴볼 수 있는 대목이라 할 수 있겠다.
솔직한 형아
에세이 형식의 글들이 400쪽 조금 넘는 책을 채우고 있다.
처음 나오는 글부터 이 사람은 솔직한 사람이고 믿을만 하다는 인상을 준다. 믿을 만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마나 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세상의 많은 하나마나한 이야기들은 '하나마나 패리스토리우스'의 자식들이다. 그는 세상의 모든 하나마나 한 이야기들을 만들었고, 후세 사람들은 그의 말들을 섬기면서 살아간다. 그가 만든 이야기의 특징은 어디서 들어본 적은 있는 것 같아서 거부감은 안 느껴지지만, 그 자체로는 정보값이 없어서 시덥잖은 이야기가 되기가 쉽다는 것이다. 하나마나 한 이야기들은 거부감을 느끼지 않게 하는 것이 목적인 시간과 자리에서 그 능력을 발휘한다. 뭔가를 들었으되, 유익한 것 같기도 하다. 딱 여기까지만 다다르면 대성공이다. 하나마나 한 이야기들은 시간이든 지면이든 비어있는 꼴을 못 본다. 세상의 수 많은 하나마나 한 이야기들이 뭔가를 채우려고 하는 인간들과 하나마나 한 이야기 자체의 속성에 의해 지금도 여기저기 널려있다. 그렇다면 하나마나 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왜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닌가? 하나마나 인들은 대체로 자신의 생각을 내보일 능력이 없거나 내보일 의사가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즉 무능력자 아니면 음흉한 사람이기에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믿을 만하다고 보기 어렵다. 그리고 그들은 무능력을 숨긴다는 점에서 그리고 자기 속 내를 숨긴다는 점에서 솔직하지 않다. 하나마나 인들과 정 반대에 있는 것 처럼 보이는 사람이 바로 데이비드 포스터 윌리스다.
예를 들면 이런 솔직함들.
"카페테리아에서 내 쟁반을 반드시 스스로 나르고 작은 서비스라도 받을라치면 침 튀기게 고맙다고 말한다. 동료 승객들 중에는 큰 소리를 내는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에, 나는 영어가 서툰 직원들에게 각별히 조용조용 말하는 것을 특히 자랑스럽게 여긴다."
"대기자들 중 많은 수가-카리브해답게 옷을 입었는데도-유대인으로 보이지만, 나는 외모만 갖고 유대인성을 판별할 수 있다는 내 생각이 곧 부끄럽게 느껴진다. (각주: 내게는 미국 동해안의 모든 공공장소가 이처럼 나도 모르게 인종주의적 관찰을 하고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내면의 반발에 움찔하는 짜증스러운 순간으로 가득하다.)
나는 우리가 하는 위선적인 행동들이 어떤 메커니즘일까 생각해본적이 있다. 얼마전에 햄버거를 사먹으러 버거왕에 갔는데 거기에는 정신지체를 앓는 사람이 일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라에서 의무적으로 강제하고 있는지, 아니면 글로벌 프랜차이즈의 인도주의적 행보인지 모르겠지만 그런 모습들을 자주 볼 수 있다. 그 사람은 그 가게에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큰소리로 어서 오세요 라고 인사를 하고 있었다. 일을 하기 싫어 죽겠다 하지만 별 수 있나 하는 표정으로 손님을 맞는 종업원들이 우리가 만나는 그 세계의 가이드였는데 말이다. 큰소리의 인사를 들어보면 누구라도 알 수 있게 어딘가 어눌하다. 정신지체를 가진 사람들 특유의 명랑함이 목소리에 배어있다. 그리고 나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아 좀 모자라는 사람이구나.'그리고 나서 '하지만 이렇게 말하면 안되지' 라는 생각으로 연결이 된 후 '장애는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고, 부끄러운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 거부되어져야 하는 이유가 아니야.'라는 생각을 거친 다음 '우리 사회는 누구에게나 기회가 열려있어야 하고 장애를 갖고 있다고 해서 예외는 아니지.'라는 생각을 통과하면서 '그들에게 모자라는 사람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은 정당하지 않으니 나는 정말 반성해야겠구나.'라는 생각으로 도달하게 되었다. 이 일련의 과정들을 해내는 나를 보면서 이것이 성숙한 교양인이 되는 교육을 받은 결과인지 그것 보다는 성숙한 위선인이 되는 교육을 받은 결과인지 아니면 둘 다 인지 헷갈리게 되었다. 정확히 이 지점을 데이비드 포스터 윌리스도 고민하고 있었다.
위선이란 무엇인가, 정치적 올바름이란 무엇인가
위선과 그것이 가지고 오는 또다른 종류의 불편함에 대해서도 그는 입장이 분명하다.
이와 관련해서 영어 어법과 관련한 글들이 나온다. 그는 영어어법과 관련된 논의가 크게 보아 규범주의자와 기술주의자의 대결이라고 판단한다. 규범주의자는 어법에 대한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서 이른바 근본없는 어법들은 올바른 어법이 아니라고 보는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리고 기술주의자는 어법이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으로 민주적 관용이 들어서야 한다고 보는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다.
데이비드 포스터 윌리스는 주어진 현실을 솔직히 인정하고 제대로 된 현실인식을 기반으로 논의를 해보자고 이야기 한다.
"미국의 일부 문화적,정치적 현실 그 자체가 인종 문제 측면에서 둔감하고 엘리트주의적이고 불쾌하고 불공평하기에,그 현실을 완곡어법과 애매한 표현으로 얼버무리는 것은 위선적일 뿐 아니라 장차 그 현실을 바꾸는 과업에도 해롭다."
"전통적으로,규범주의자는 정치적으로 보수주의자이고 기술주의자는 진보주의자인 경향이 있다. 하지만 오늘날 공적 영어규범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오히려 엄격하고 깐깐한 형태의 진보적 규범주의다. 내가 말하는 것은 흔히 '정치적으로 올바른' 영어라고 불리는 언어다. 이 영어의 관습에 따르면, 낙제하는 학생은 '잠재력이 높은'학생이고 가난한 사람은 '경제적으로 불리한'사람이고 휠체어를 타는 사람은 '신체 능력이 다른' 사람이다. "백인 영어와 흑인 영어는 다르고, 넌 백인 영어를 배우지 않으면 좋은 성적을 받지 못할 거야"같은 문장은 퉁명스러운 것이 아니라 '둔감한'발언이다. 요즘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영어를 놀리는 농담을 많이 하지만(못생긴 사람을 가리켜 "미적으로 어려움이 있는 사람"이라고 부르는 등),대학과 기업과 정부 기관은 이 영어의 여러 규정과 금지를 대단히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 이런 기관들의 공적 방언은 새로운 언어 경찰들의 빈틈없는 감시하에 진화하고 있다."
"어법은 늘 정치적이다. 하지만 복잡하게 정치적이다. 가령 정치적 변화에 관해서라면, 어법 관습은 두 방식으로 기능할 수 있다. 어법 관습이 한편으로는 정치적 변화의 반영일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적 변화의 도구일 수도 있다. 중요한 점은 두 기능이 다르다는 것, 우리가 제대로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을 헷갈리면-특히 실제로는 언어의 정치적 상징주의에 지나지 않는 것을 정치적 효능으로 착각하면-미국이 이제 역사적으로 엘리트주의나 불공평과 연관되었던 어휘들을 쓰지 않게 되었으니까 미국에서는 이제 엘리트주의나 불공평이 사라졌다는 괴상한 확신이 들게 된다. 이것이-즉, 사회의 표현방식을 사회가 취하는 태도의 산물로 여기는 게 아니라 거꾸로 표현 방식이 태도를 만들어낸다고 여기는 오류가-바로 정치적으로 올바른 영어의 핵심 오류다. 당연히 이 오류는 표준 어법의 변화를 저지함으로써 사회변화를 늦출 수 있다고 여기는 정치적 보수주의자 스누트들의 망상을 뒤집어놓은 것과 같다."
세상이 공평해지고 차별이 없어지면 차별주의적인 언사나 표현은 없어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세상이 과연 오기나 할까 의문이다.누군가가 하는 차별적인 언사에 우리는 얼굴을 찌뿌리곤 하는데, 그런 인간들을 비판하는 것은 그것대로 가치가 있다. 아무래도 그 비판의 속내에는 그 인간의 교양없음에, 그 인간의 공감력 부족에, 그 인간의 현실인식 부재에 한심해 하는 마음이 있는 것 같다. 현실적인 차원에서 불합리와 차별에 맞서는 방법은 여러가지 겠지만, 너와 나는 다르지 않으니까 차별하지 말고 공평하게 대해달라고 소리치는 것은 어떤 허망함을 만나게 될 때가 있다. 위에 인용한 것처럼 너의 태도가 바뀌었다고 너와 나의 상황이 바뀌는 것은 아니니까. 데이비드 포스터 윌리스는 '정중함과 공정함은 같지 않은데 그렇게 착각하는 오류'가 발생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모든 '정치적 올바름'을 표방한, 정제된 언어들은 가치가 없다는 것인가.
아마도 내 생각엔 그것들이 가치가 없지 않지만, 그 가치를 과대평가할 이유는 없는 것 같다. 그런 언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현실세계의 불평등이 없어지지 않으니까. 그리고 그런 언어들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현실세계의 불평등을 옹호하는 입장이라고 보는 것도 과도한 해석이지 않을까. 물론 위선적이고 애매한 표현은 오히려 현실을 왜곡할 뿐이라는 저자의 시각에는 모든 상황에서 백프로 동의하긴 힘들다. 그 표현으로 뭔가가 이루어졌다는 인식이 잘 못 된 것이다. 위의 내 경우를 예로 들면 '어딘가 좀 모자라는' 사람이라는 나의 표현은 '특정 장애를 겪고 있는' 사람으로 필터링이 되었는데, 전자의 표현은 그에게 필요 이상의 평가를 내리는 편향된 표현이다. 그에게는 가치판단이 제거된 표현이 적절하고 그 표현을 쓴다고 해서 그가 겪는 상황을 인식하는 데에 왜곡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사실은 나의 도덕적인 우월함을 위한 이기적인 동기가 발현되었다고 한 들 결과값이 받아들일 만 했다.
즉 우리가 써야하는 언어는 올바른 현실인식(=우리는 불평등한 세상에 살고 있고, 그 불평등한 세상을 지배하는 자들은 평등한 세상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의 바탕 위에,위선과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강박(=상대방을 위한 표현이 아닌 나를 위한 표현, 즉 나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 표현)을 버린 언어여야 할 것 같다.
*데이비드 포스터 윌리스라는 유머 넘치는 작가의 독후감도 어김없이 핵노잼으로 써버렸다. 앞서 빌 브라이슨의 유머를 꼬치꼬치 따져 본 글을 썼는데, 마침 데이비드 포스터 윌리스의 글 중에 이런 대목이 있다.
"농담의 심리학은 우리가 카프카를 가르칠 때 겪는 문제를 일부 설명해줍니다. 누구나 알다시피, 농담을 설명하는 것만큼 농담에 담긴 마법을 더 잘 빼앗는 방법은 없지요."
아...좌절...
"카페테리아에서 내 쟁반을 반드시 스스로 나르고 작은 서비스라도 받을라치면 침 튀기게 고맙다고 말한다. 동료 승객들 중에는 큰 소리를 내는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에, 나는 영어가 서툰 직원들에게 각별히 조용조용 말하는 것을 특히 자랑스럽게 여긴다."
"대기자들 중 많은 수가-카리브해답게 옷을 입었는데도-유대인으로 보이지만, 나는 외모만 갖고 유대인성을 판별할 수 있다는 내 생각이 곧 부끄럽게 느껴진다. (각주: 내게는 미국 동해안의 모든 공공장소가 이처럼 나도 모르게 인종주의적 관찰을 하고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내면의 반발에 움찔하는 짜증스러운 순간으로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