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수. 한겨레21에서 2000년대 작가들을 소개한 글을 읽고 이제서야 만나게 된 소설가다. 2000년대 내가 주목하는 소설가를 꼽으라면 김훈과 박민규 그리고 김애란. 작품이 나오면 그 이름만으로 무조건 클릭하게 되는 김훈과 박민규. 장편소설 하나 나올 때 되지 않았나 기대하는 김애란. 그 대열에 합류하게 될까 김연수? 하면서 책장을 펼쳤고, 첫 글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을 읽으며 단편의 맛, 좋네. 세번째 글 '뿌넝쉬'를 읽고는 바로 김연수의 다른 소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이 소설집은 - 그녀와 그가 만난 것은 우연일까 필연일까. 너와 내가 헤어진 것은 우연일까 필연일까. 진실은 언어로써 말하여질 수 있는 것일까. 언어는 과연 진실을 진실로 담아낼 수 있는 것일까. 사람이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가능한 것일까. 애초에 불가능한 것일까. - 라는 질문에 대한 사유의 글이다. 그 글을 따라가다보니 나 역시 다시금 질문하게 된다. 이해는 가능한 것일까.
이해하려는 아무런 노력 없이 이해는 불가능하다고 선언해버린 당신이, 이해하기 위한 치열한 싸움을 회피한 채 자신이 쌓아올린 성 안에서 벽을 치며 울고 있는 당신이 못내 서럽습니다. 인생은 억세게도 홀로이지만 인간이란 이유로 우리는 온 우주를 이해해야만 합니다. 서둘러 사랑을 말하기 전에 긴 두레박을 타고 우물의 어두운 터널을, 그 공포를 견뎌낸 이해만이 차고 맑은 물 한 모금 만날 수 있음을, 두레박 속 웅크린 몸을 일으켜 풍덩 뛰어 들어간 이해만이 따뜻해질 수 있음을, 물과 함께 뿌리에게로 뿌리에게로 거침없이 스며드는 이해만이 사랑일 수 있음을 말하기도 전에 당신은 가버리고 어쩌면 이해하지 못했던 건 당신이 아니라 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어디만큼 가야 온 우주를 이해하게 되나. 어디만큼 가야 우리는 사랑이 되나 // 우물 속으로 던진 돌멩이 하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애초에 나의 질문은 '이해는 가능한 것일까'는 아니었다. 내가 나를 모르는데 너를 어떻게 알겠는가. 다만 그럼에도 나는 너를 이해하는가, 온전히까지는 바라지 않는다해도 이해는 사랑의 길이므로 그 길을 가고 있는가 되묻는다.
'해가 바뀌는 동안, 우리는 한개의 강물을 건넜다네. 그게 얼마나 긴 노정이던지. 날이 밝자, 강변에 사체들이 늘비했어. 말하지 않았나? 우리가 백전노장이라는 건 우리가 살아온 역사가 증명해. 하지만 그 광경을 보고 나서야 새삼스럽게 전쟁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더군. 전쟁이란 그런 것이더군. 어제 나는 죽을 수도 있었지. 하지만 오늘은 살아 있지. 전쟁터에서 나는 매일 새로 태어나는 거지. 그런 광경을 바라보노라면 저절로 고개가 수그러져. 하늘을 올려다볼 엄두가 나지 않는 거야. 하늘을 올려다보는 경우는 죽은 전우의 사체를 땅에 묻고 허공을 향해 세 발의 총성을 울려 애도를 표할 때뿐이야. 전쟁터에서 들리는 세 발의 총성이란 한편으로 그런 의미야. 그건 원망도, 분노도 아니야. 그저 인간이라는 것, 그러고 나서도 또 인간이라는 것. 그걸 도저히 말로 설명할 수 없으니까 세 발의 총성으로 대신하는 거야. 그렇게 묻힌 전우의 청춘은 너덜너덜해진 지도상의 좌표로만 남게 되지. 그런 상황에 이르면 인간의 몸은 참으로 표현력이 부족하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돼. 고작 울부짖거나 마른 눈물만 흘릴 뿐이라니. 심장을 꺼내 전우의 시신과 함께 묻어줄 수도 없고 두 눈을 줘 감긴 그 눈을 뜨게 할 수도 없다니. 그러므로 하늘을 향해 쏘는 세 발의 총성, 거기에 모든 것을 의탁할 수밖에 없는 거야. 알겠는가? 세 발의 총성. 그건 그런 의미야.' - '뿌넝쉬(不能設)'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