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그의 문장은 - 이라고 쓰게 된다. 그의 글은, 그의 책은 - 이라고 써지지 않는다. 아마도 그건 그의 문장들 때문일 것이다. 말이라든가 글이라는 게 그 안에 담긴 내용을 듣는 것일 터인데 그의 문장들을 따라가다 보면 내용을 듣는다기보다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 목소리의 질감을, 목소리 가장 안쪽을 만져보고 싶어 손을 뻗는다. 손을 뻗어도 소리는 만져지지 않아 더 애가 탔고 만져지지 않는 것들은 만져지지 않는 채로 내버려두면 될 터인데도 자족을 모르는 인간의 갈증으로 나는 또 그 소리의 결을 더듬는다.
‘벗들아, 나는 여전히 삼인칭을 주어로 삼는 문장을 만들 수가 없다. 나는 세계의 풍경을 상처로부터 격절시킬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삼인칭의 산맥 속으로, 객관화된 세계 속으로 건너가지 못하고 일인칭의 가장자리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아마도 오래오래 그러하리라.’ - 풍경과 상처 중에서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두 부류의 배우들이 보인다. 자기를 버려 완벽하게 다른 인물로 나타나는 배우와 자기 안에 잠재되어 있는 타인을 끌어올려 다른 인물을 만드는 배우. 아마도 배우나 소설가나 후자에 속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인데 그 중에서도 김훈의 인물들은 너무도 김훈스럽다. 특히나 이번 소설 ‘내 젊은 날의 숲’은 소설이라기보다 산문집을 읽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간의 산문집들 군데군데 피어있던 꽃과 나무들이 젊은 날의 숲에 모여들어 그려진다. 아니, 그려진다기보다 ‘쟁쟁쟁’ 울리며 피어난다. 그 꽃들은 저기 뒷산에 오르면 볼 수 있는 꽃들임에도 세상을 다 뒤져도 볼 수 없는 꽃들일 것이다. 인간의 시선이 개입된 탓이다. 그러면 그것은 김훈의 꽃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을 것이다. 나의 시선이 포개진 탓일 것이고 한순간의 멈춤도 없이 빛과 바람과 밥과 마음과 더불어 팔딱대는 생명들인 탓일 것이다. 그 생명들은 어디에서 왔는가.
내 오른쪽 새끼 손가락은 끝이 휘어진 누에손가락이다. 아버지는 양쪽 새끼 손가락이 휘어져 있고, 오빠도 양쪽 손가락이 휘어졌고, 남동생은 양쪽 손가락 모두 휘어지지 않았다. 어느 날 동네 아줌마들이 우리들 손가락을 보시더니 남동생을 두고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고 장난을 치셨다. 으앙 - 그 울음은 분명 남동생의 것이어야 했는데 울음을 터뜨린 사람은 남동생이 아니라 오빠였다. 오빠도 처음엔 동네 아줌마들의 장난에 끼어 주워온 동생이라 놀려댔었는데 울음을 터뜨리며 아니라고, 내 동생이라고 소리치던 - 그 날의 풍경이, 거울 속 나의 얼굴 안에 엄마의 얼굴이 겹쳐져오는 날과 포개져 가끔씩 먹먹하게 짠해진다.
그 닮음의 먹먹함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열망이 내 젊은 날을 관통하던 화살이었고 불이었다. ‘가출을 할까/ 출가를 할까/ 이것은 나의 영원한 테마이다’(김승희, ‘평화일기2’) 허나 가출을 하든 출가를 하든 인간이, 인간 이상의 그 무엇이 되고 싶다는 열망은 애초에 불가능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함부로 쏜 화살’은 하늘 너머로 날지 못했고 불에 데인 상처를 핥으며 나는 그 닮음을, 인간을, 인연을 긍정할 수밖에 없어서 긍정했다. 긍정한 자리는 가끔 밝았고, 가끔 징글징글했으며 그 징글징글한 나를 내가 연민하듯 인간으로 태어난 인간이 가여웠다.
‘얘, 이게, 헤어진 거니? 이게 갈라선 거야? 아닌 것 같아. 아닐 거야. 도장을 찍는다고 갈라서지는 것도 아니고 아파트 따로 얻어서 산다고 갈라서지는 것이 아니란 말야. 이건 끊어지지가 않는 거야’ -p252
‘아이구, 불쌍해라. 불쌍해서 어쩌나. 불쌍하다, 불쌍해...... 너무 불쌍해......’ -p329
할아버지에게서 아버지에게로 아버지에게서 딸에게로 그리고 딸과 만나는 남자에게로 그렇게 끊어지지 않는 인연을, 인간의 한 세상을 가여워하는 작가와 함께 눈물겨웠다 이 책을 읽으며. 그리고 연주와 김중위가 그들이 짊어져야 할 밥과 꿈과 고뇌 속에서도 사랑하기를. 우리도 그러하기를. 가엾음 속에서도 사랑하기를. 아니 서로 가여워하며 사랑하기를.
‘부처가 생명의 기원을 말하지 않은 것은 과학적 허영심이 없어서라기보다는 말하여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산천과 농경지와 포구의 생선시장을 들여다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었다. 창조나 진화는 한가한 사람들의 가설일 터이다.
구름이 산맥을 덮으면 비가 오듯이, 날이 저물면 노을이 지듯이, 생명은 저절로 태어나서 비에 젖고 바람에 쓸려갔는데, 그처럼 덧없는 것들이 어떻게 사랑을 할 수 있고 사랑을 말할 수 있는 것인지, 나는 눈물겨웠다.
돌이켜보니, 나는 단 한 번도 ‘사랑’이나 ‘희망’ 같은 단어들을 써본 적이 없다. 중생의 말로 ‘사랑’이라고 쓸 때, 그 두 글자는 사랑이 아니라 사랑의 부재와 결핍을 드러내는 꼴이 될 것 같아서 겁 많은 나는 저어했던 모양이다.
그러하되, 다시 돌이켜보면, 그토록 덧없는 것들이 이 무인지경의 적막강산에 한 뼘의 근거지를 만들고 은신처를 파기 위해서는 사랑을 거듭 말할 수밖에 없을 터이니, 사랑이야말로 이 덧없는 것들의 중대사업이 아닐 것인가.
산천을 떠돌면서, 그런 생각을 했는데, 산천은 나의 질문을 나에게 되돌려주었다. 그래서 나의 글들은 세상으로부터 되돌아온 내 질문의 기록이다.
여생의 시간들이, 사랑과 희망이 말하여지는 날들이기를 나는 갈구한다.‘
- 2010년 가을에
김훈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