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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두이야기님의 서재
  •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
  • 최진영
  • 12,420원 (10%690)
  • 2010-07-15
  • : 1,966

 '나는 진짜를 찾기 위해 가짜를 하나하나 수집하는 중이다. 세상의 가짜를 다 모아서 태워버리면 결국 진짜만 남을 것이다. 시간은 좀 오래 걸리겠지만, 그게 제일 확실한 방법이다. 나는 첫 번째로 가짜아빠를 태웠고, 그리고 가짜엄마를 태웠고, 그리고 장미언니를 태웠다. 백곰은 말할 것도 없다. 그들은 바싹 마른 종이인형처럼 활활 잘도 타올랐다. 다 타버린 그것들은 모두 공평하게 재가 되었다. 그래, 가짜니까 타버리는 거야. 진짜는 아무리 태워도 타지 않지. 나는 올바른 선택을 한 나를 칭찬했다.
 

  하지만 아무리 스스로를 칭찬해도 괴로움 같은 건 절대 사라지지 않았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오후가 되면, 식당은 너무너무 고요해졌다. 위잉위잉 냉장고의 심장 소리, 바람이 문을 두드리고 도망가며 다라락 웃는 소리, 연탄난로 안에서 불꽃들이 둘러앉아 딱딱 고스톱치는 소리, 수도꼭지가 깜빡 졸다가 침 흘리는 소리만 간간히 들리는 그 세계에서, 우리는 나란히 앉아 낡은 문 너머의 바깥세상을 구경했다. 할머니의 시간은 아주 느리게 흘러갔다. 나는 할머니보다 앞서 갔다. 제자리에 쪼그려 앉아 할머니의 시간이 어서 오기를 기다렸다.'

 

  '사랑한다는 말은 어떻게 표현하지? 오랫동안 그 문제로 고민을 했지만, 사랑한다는 걸 행동으로 어떻게 나타내야 하는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아서, 결국 할머니에게 사랑한다는 표현을 할 수 없었다. 아쉬운 대로 벽에 그 글자를 붙여두기만 했는데, 할머니는 가끔 그 글자를 멍하니 쳐다보면서 중얼거렸다. 맛있다. 밥 먹어. 잘 잤어. 할머니가 '사랑해'란 글자를 보며 상상하는 어떤 단어든, 결국은 다 사랑에 표함되는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사랑은 원래 그런 거니까.'

 

  '할머니의 주름 속 응달까지 넘나드는 봄 햇살' 

 '나는 바이올린이란 악기를 연주하는 상상을 해보려고 했지만, 바이올린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라 상상을 할 수가 없었다. 바이올린은 어떻게 생겼냐고, 남자에게 물어보았다.
 마음대로 생각해봐.
 내 맘대로?
 응.
 ......작고
 응, 작고.
 주머니에 넣을 수 있을 만큼.
 그래. 
 밝은 노랜색에.
 응.
 나비처럼 생겼어.
 응. 
 날개를 움직일 때마다 소리가 나. 크게 움직이면 아주 높은 소리가, 작게 움직이면 아주 낮은 소리가 나고.
 그래. 
 연주가 마음에 들면 색깔이 바뀌어. 여러 가지 색으로. 
 연주해봐. 
 응?
 상상으로. 
 나는 내가 만든 바이올린이란 악기를 연주하는 상상을 했다. 창밖에선 귀뚜라미가 울고, 찬란한 보름달. 힘이 빠지면서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 바뀌었어?
 먼 곳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아련하게 들렸다. 
 ........ 응?
 ........ 색깔.
 ........ 응.
  나는 겨우 대답했다. 몸과 정신과 기억 같은 것이 물에 빠진 수채화처럼 점점 흐려졌다. 
  분홍색 나비 두 마리가 폐가를 맴도는 꿈을 꿨다. 나는 댓돌 위에 누워 햇볕을 쬐며 곤한 낮잠에 빠진 얼룩 고양이였다.  



  '내 앞에 나타난 나는 지나치게 흔한 세계
   그것만이 전부였던 그 시절.
   나는 반짝이는 나를 봤다. 내 불행의 시발점. 모든 행복의 이면.'
 

 '웅크리고 앉아 내 혀로 내 상처를 핥아댄다.'
 

 '진짜엄마를 찾아야 한다는 사실이 오히려 나를 불행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러니까 각자 모른 채 살면 행복할 수도 있는데, 만나서 불행해질 수도 있다. 그래도 나는 진짜엄마를 찾아야 하나?
 찾아야 한다. 
 왜냐면, 그것 외엔 할 일이 없으니까. 
 진짜엄마를 찾겠다는 목적마저 사라진다면 나는 더 살아 있을 이유가 없다. 목적이 없으면, 가짜아빠처럼 쥐의 먹이가 되고 말 것이다.'

 
 '불행한 사람은 주변을 돌아보지 않는다. 오직 자기 가슴속만 보고 산다.'

 
 '저 사람이다. 
 저기 있다.
 나의 진짜엄마는.
 거리를 떠돌며 내가 정했던 진짜엄마의 조건은 모두 껍데기고 포장이며 환상이고 거짓말이다. 나의 진짜엄마는 어떤 얼굴이라도 가질 수 있으며 그래서 결국, 어떤 얼굴이라도 상관없는 그런 사람이다. 맞는 대신 때리는 자이고 때리는 게 번거로우면 죽여 없앨 수도 있다. 그 모든 게 귀찮을 땐 외면한다. 상관없는 척한다. 그 뿐이다. 오직 중요한 건 자신의 생존이다. 불행이나 행복 따위엔 관심도 없다. 이제야 알겠다. 그런 사람을 찾기는 너무 쉽고, 너무 쉽기 때문에 나는 여태 못 찾고 있었다. 너무 흔하니까. 어디에나 있으니까. 
 거울을 보면, 그 속에도 있다.'

 


 '예술가의 사명은 논쟁의 여기가 없도록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이 삶에 애착을 지니게 해주는 것'  - 톨스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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