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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영님의 서재

 

리영희 선생은 70, 80대 지식인의 아이콘으로 유명한 사람이다. 그의 책을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처벌을 받던 시기가 있었다. 한마디로 그는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유명한 금서의 저자다. 그의 생을 반추하는 것은 따라서 한 시대가 금기시했던 생각의 면면을 들춰보는 것과 같다. 리영희를 다룬 많은 책들이 쏟아져나왔지만, 이 책은 그의 육성이 담겨 있다는 의미에서 가치 있는 책이 될 것이다.


하지만 90년대 들어서 달라진 세상, 과거의 투쟁적인 시기가 후일담, 회고담으로 처리되고 있는 오늘날에 와서 그의 생각이 어떤 가치가 있을지는 다시 한번 입체적으로 공과를 평가해야 한다고 본다. 그는 언론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국제문제전문가라 할 수 있다. 특히 미국문제에 있어서는 그의 안목이 절대적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학자로 자처한다. 그래서 시사적 문제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발빠른 언론인으로 여겨지는 것을 무척 꺼린다. 박정희 시대의 지옥도를 <워싱턴포스트>지를 통해 세계에 알린 인물이 바로 리영희였다. 그의 관점은 사실은 매우 넓고 크다. 하지만 시대의 영향 밖에서 자유할 수 있었던 인물이 아닌지라 당시 그의 말에선 지금의 관점으로선 다소 도발적으로 보이는 면도 없지 않다.


그는 친북주의자가 아니었음에도 친북주의자의 상징으로 여겨져 심한 고초를 당했다. 그는 남과 북 모두를 비판했다. 그는 참된 지식인은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사실을 인식하고 현실적인 대안을 강구하는 자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강조한다. 이 책의 인터뷰어 임헌영은 요즘들어 민족문제연구소의 활동으로 더욱 유명해진 사람이다. 이 두 사람 중, 한참 아래 연배인 임헌영의 생각이 오히려 더 좁아보일 정도로 리영희는 넓은 스펙트럼의 사상을 지녔다.


뇌졸중이 찾아와 부자유스런 신체를 지니게 됐지만 그의 정신은 여전히 날카롭다. 인문학을 공부한 한국인들에게 리영희의 존재를 각별하다. 하지만 이 책은 아쉬움을 남긴다. 많은 사람들은 현재적 관점에서 과거를 가져온다. 과거가 과거대로 의미있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논리다. 역사가 그렇듯이 과거는 늘 미래의 거울로서 현재 시점에서 반추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리영희의 근황을 알고 싶어하는 사람은 이 책에 실망할 것이다. 그의 생각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이 책을 자세히 다루지 않는다. 그가 한 시대의 아이콘으로 자리잡았을 때에만 집중한다. 그 시대를 모르는 젊은 세대들에겐 도움이 되겠지만, 리영희 스스로가 고백하듯, 예전의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고 하는데, 그 변화의 양상이 어떤 것인지, 남북문제, 대미관계 등에서 그의 탁견이 잘 정리되어 있지 않다.


강준만의 <현대사의 길잡이, 리영희>가 보여주는 압축적이고 요약된 책으로 그를 이해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이 책의 맛깔스러움이라면 아무래도 그의 솔직한 목소리를 통해 암울했던 시대를 극복한 한 인간의 증언을 접할 수 있다는 것이리라. 충분히 더 할 수 있는 말들을 미처 다루지 않은 것은 아무래도 준비부족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출판사의 초점이 무엇이었는지, 참신한 관점과 적극적인 접근이 없었던 문제가, 어쩐지 묵은 맛이 난다는 찝찝함을 털어낼 수 없게 한다. 70, 80년대 지식인의 아이콘 리영희, 그가 생각하는 오늘은 무엇일까?


조광조 같은 원칙주의자에서 이퇴계 같은 사유인으로의 변모, 타이틀은 그럴싸하게 잡아놓고, 정작 그 내용은 하나도 보여주지 않는다. 그의 나이가 7순이 넘었다. 인생에 관한 생각이 없을리 없다. 나의 체험이 섞인 그의 사회관이 궁금했지만, 너무 지나친 기대였을까. 출판사의 편집진에서 분명히 포인트를 놓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우상을 깨부수기에 가장 열심이었던 실천적 지식인을 과거의 아이콘 속에 가두어버렸다. 우상을 깨려던 자를 우상으로 만들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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