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 소설을 다 읽은 후 숲길이 생각났다. 다람쥐를 따라 들어온 숲속에서 다람쥐가 흘리고 간 도토리를 주우며 더 주울 욕심으로 자꾸 자꾸 안으로 들어가다보니 어느 새 도토리는 간데없고 어둑어둑한 숲속에서 나무 사이로 내리비치는 햇빛 속 투명하고 맑은 호수 한 가운데에 핀, 아름답지만 다가갈수도 만질수도 없는 연꽃을 보고 있는 느낌이다. 손에는 주운 도토리를 가득 들고서는 연꽃을 보며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서 있는 느낌.
이 소설은 진짜 고전에 있던 인물을 통해 이야기를 만들어내었다. 입담이 좋아서 일본의 고전을 잘 몰라도 이야기를 따라가게 만드는 힘이 있다.
나는 이 소설에서 두 부분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부정관(不淨觀)’과 어머니를 만나는 장면.
구니쓰네는 시헤이에게 빼앗긴 어린 부인을 잊기 위하여 젊은 여자의 시체에까지 찾아가 모든 육체는 사실 해골이나 다름없다는 부정관을 행한다. 그런 노력을 기울이지만 결국 구니쓰네는 부정관을 깨닫지 못하고 어린 부인을 영원히 아름다운 기억으로 간직한 채 죽는다. 나는 이 부분이 참 재미있다고 생각한다. 부정관이 하나의 경지라고 한다면, 美와 愛慾 그리고 사랑 같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욕망과 감정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드러내면서 부정관과는 완전히 반대인 또 하나의 경지를 보여준다. (부정관에 대해 자세한 설명이나 기원이 나오지만, 작가는 애초부터 부정관 따위에는 관심이 없던 거다. 헤이주 이야기가 장황하게 설명이 되는 것처럼 작가는 이런 식으로 우리를 자주 함정에 빠트린다. 아마도 독자가 자신이 생각하는 진짜 美 를 쉽게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부린 작가의 배짱은 아니었을까 마음대로 추측도 해본다.) 어린 부인을 돌려받지 못했으나, 그녀를 아름다운 모습으로만 간직한 채 죽은 구니쓰네에게 그것은 사실 진짜 구원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리고 그 구원은 아들 시게모토에게로 이어진다.
그래서 인내심을 갖고 따라가다보면 시게모토가 비구니가 된 어머니의 절 근처가 나올 때부터 문장이 점점 신비하고 몽롱하게 바뀐다. 어머니에 대한 그의 기억이 점차 아름다워질수록 문장도 그렇게 변하는 것이다. 그리고 소설은 끝내 시게모토를 배신하지 않는다. 시게모토가 상상했던 아름다운 그대로의 모습으로 어머니와 만나게 한 후 소설을 끝낸다. 결국 시게모토도 구니쓰네와 마찬가지로 구원받은 것이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감정의 경지와 인간을 초월하고 있는 美의 경지를 교차해놓은 느낌. 나는 조각상 피에타도 떠올렸다.
문체는 지극히 발랄하고 섬세하고 여성적이지만, 이 소설이야말로 남성의 판타지를 완벽하게 충족시키는 진짜 사내의 소설이란 생각이 든다. 마루야마 겐지와는 또 다른 스타일의 남성문학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