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다'라고 말하면 그 대상은 나/우리이다. '간다'라고 하면 그 대상은 너/그/그들이다. 이 책의 번역자인 데보라 스미스(Deborah Smith)는 '소년이 온다'라는 제목을' 인간의 행동들(Human Acts)이라고 번역한 이유에 관해 논한다. 인간의 행위에는 양면이 있다는 것이다. 이 소설은 피해자의 기억들로 구성되어 있다. 피해자가 있다면 가해자도 있기 마련이다. 많지 않지만 「쇠와 피」 장에는 분명 가해자의 이야기가 있다. 「일곱 개의 뺨」에도 있지만 가장 많이 나와 있는 곳은 「쇠와 피」 장이다. 사실 이 책의 정점은 「쇠와 피」 장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가해자가 가하는 폭력의 목적이 여실하게 드러나 있기도 하다.
피해자는 왜 피해자가 되었을까 하는 것이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도망할 수 있었는데도 도망하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므로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도망하지 않도록 만들었을까 하는 것이다. 결국 이 소설은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일까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인간은 가해자일 수 있고 피해자일 수 있다. 상황에 따라 혹은 입장에 따라 인간은 피해자이자 가해자인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이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데보라 스미스는 인간 행위의 양면성을 이야기하는 '인간의 행동들'을 번역서의 제목으로 삼았다. 스미스가 택한 제목은 원제목인 '소년이 온다'와는 정반대다. ‘소년이 온다’가 대단히 시적인 반면 '인간의 행동들'은 논리적이다. 저자와 번역자의 차이는 여기서도 나타난다. 저자가 직관적인 제목을 택했다면 번역자는 보다 더 이성적인 제목을 택했다. 저자는 사람의 가슴으로 들어가고자 했고 번역자는 생각하도록 만들고자 했다. 한편으로 알려주고자 하는 마음이 역력히 드러난다. 그렇다면 소년은 왜 오는 것일까? 인간 행위의 양면성을 알려주기 위하여 오는 것일까?
양면성을 알려준다는 것 자체가 선택을 의미한다. 이러이러한 일이 있다. 광주 518과 같은 일이 있다. 그 일은 국가라는 절대 권력이 휘두른 폭력이 빚어낸 참사다. 그 참사를 알려주기 위하여 오는 것일까. 역사 속에는 무수한 국가 권력의 피해가 있다. 광주가 처음이 아니고 끝도 아니다. 그 끝이 되기를 바라지만 그런 일은 또 일어났고 앞으로도 일어날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사느라고 바빠 일쑤 잊기 때문이다.
잊는다는 것은 의식에서 밀어낸다는 것이다. 밀어내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혹 그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보면 잊을 수 없게 되는가? 기억을 공유하면 잊을 수 없게 되는가. 가장 근본적인 것은 잊히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일을 공론화하고 모두가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잊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주인공들은 세대가 다르고 성별이 다르며 위치가 다르다. 한결 같은 것은 이들이 힘없는 피해자라는 사실 뿐이다.
첫 장인 「어린 새」에서 나오는 동호는 이 소설에 등장하는 여섯 명을 하나로 모으는 구심점 역할을 한다. 동호는 「검은 숨」의 주인공인 정대의 친구고, 정대는 죽임을 당했다. 「일곱 개의 뺨」에 나오는 은숙과 「밤의 눈동자」에 나오는 선주와 더불어 시체를 관리하는 일을 했다. 「쇠와 피」에 나오는 김진수 또한 상무관에 있었고 동호에게 캐비닛에 숨었다가 자수하라고 말한 장본인이다. 이들은 각기 1, 2, 3, 4, 5장의 주인공이다.
제6장인 「꽃 핀 쪽으로」의 주인공은 동호의 어머니다. 한편 에필로그인 「눈 덮인 램프」의 주인공은 이 소설에서 너 혹은 당신이라고 부르면서 말하는 내포 화자로, 동호가 살던 중흥동 집에 살았던 적이 있다. 결국 모두가 동호와 연결되어 있다. 내포 화자는 이들 여섯 명의 마음을 구성하는 사람이고 그들의 기억을 들여다보는 사람이며 그들의 혼을 불러와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다. 즉 내포 화자인 내가 동호가 될 수도 있었다는 전제가 이들을 자신과는 상관없는 타자로 밀어내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열다섯 살, 동호는 상무대에서 시신을 돌보는 일을 자청한다. 다양한 형태로 죽임을 당한 시체들은 천 밑에서 부패해간다. 동호는 그 시취를 맡고 냄새를 몰아내기 위해 촛불을 피우며 친척들에게 시신이 놓인 곳을 알려주다가 결국에는 총에 맞아 죽는다. 동호는 왜 장례식에서 애국가를 부르는지 왜 태극기로 시체를 감싸는지 궁금해한다. 나라는 그 국민들이 믿는 최후의 보루다. 그 나라를 대표하는 군인들이 시민을 죽이는 것도 이상하지만 장례식에서 애국가를 부른다는 것이 의아한 것이다. 이에 대한 답은 후에 나온다.
정대는 죽임을 당한 시체로 나온다. 혼이 된 정대는 아무런 능력이 없다. 말도 할 수 없고 어디론가 떠날 수도 없어 자신의 시체 주변을 맴돌다가 시체가 소각된 후에야 비로소 떠나는데 죽임 당한 이들의 무능력이 절절히 통감 되는 장이다.
은숙의 장은 글의 힘을 절감할 수 있는 장이다. 글의 힘을 잘 알고 있는 정권은 모든 책을 검열하며 방향에 어긋나는 구절은 가차 없이 검은 줄을 긋는다. 5년이 지난 후 출판사에서 근무하며 정권의 눈에 거슬리는 번역자가 번역한 책을 가져간 은숙은 책 한 권이 거의 통째로 검은 줄이 쳐지는 수모를 당한다. 그녀는 일곱 대의 뺨을 맞고 매일 한 대씩 잊겠다고 결심하지만 그렇게 될 리는 없다.
김진수의 장은 진수와 함께 유치장에 갇혔던 교대 복학생이 화자로 그는 자신이 당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동시에 김진수가 더 가혹한 고문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들의 고문 도구로 볼펜이 나온다. 볼펜은 아주 흔한 필기구로 학생들이라면 항상 갖고 있어야 하는 필수품이다. 볼펜으로 고문을 당한다면 볼펜을 사용할 때마다 고문 당한 기억을 떠올릴 것이다. 쇠와 피 장에서 진수는 생식기 고문을 당한다.
「쇠와 피」 장이 무참한 것은 권력이 그들에게서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박탈하기 때문이다. 권력은 본능을 이용한다. 한창인 청년 둘에게 밥을 한 그릇 준다. 국도 한 그릇 반찬은 김치 두어 쪽이다. 하루 이틀이라면 견딜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일이 삼일 정도 계속되면 굶주림이 이성을 압도한다. 서로 상대가 더 많이 먹지 않을까 하고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하게 된다. 거기에다가 좁은 유치장이 꽉 찬 상태로 씻지 못하고 일주일이 흐른다면 인간의 몸에서 나는 냄새는 상상을 초월하게 된다. 굶주림에 눈을 희번덕거리고. 그렇게 권력은 스스로 인간임을 포기하게 만든다. 인간 이하의 상태, 그런 너희들에게는 양심이니 민주주의니 하는 것을 말할 자격이 없다는 선언이 바로 권력이 목적하는 것이다. 강제수용소에 적용했던, 목적했던 그 방식이 고스란히 재현되어 있다.
「밤의 눈동자」 장의 주인공인 선주는 이미 삼십 년 전에 고문당한 기억을 잊지 못한다. 그 일, 여성으로서 치부를 남김없이 유린당했던 그 일은 수치심으로 그녀를 압도했다. 어떻게 생식기에 삼십 센티미터 자가 쑤시고 들어왔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소총의 개머리판으로 자궁 입구를 짓이겼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 고문이 악랄한 것은 여성으로서 가진 존엄을 송두리째 무시하기 때문이다. 수치심은 모든 것을 압도한다. 특히 존재를 부정당했을 때 그 수치심은 어디에 가도 바로 서지 못하게 한다. 여성임을 말하는 가장 강력한 장기, 성스러운 장기는 생명을 낳는 자궁이다. 인간의 성스러움은 모두가 생명과 맞닿아 있다. 생명을 품는 장기인 자궁, 생명을 뿌리는 장기인 남성의 생식기, 그리고 자신의 생명을 버려 타인을 돕는 이타심, 그것이 바로 성스러움이다. 신을 갈구하는 행위가 성스러운 것이 아니다. 신을 논하고 신이 세계를 만든 방식을 논하는 것이 성스러운 것이 아니다.
「꽃 핀 쪽으로」의 주인공은 동호의 어머니는 동호를 잃은 후 애달픈 심정을 말한다. 아들의 죽음을 잊을 수 없었던 어머니는 유가족으로서 시위에 참여하면서 아이에게 덮어 씌워진 수치를 씻어내고자 했다. 동호의 아버지가 죽은 후 시위는 그만두었지만 그 아픔은 여전하다. 이 장은 동호가 어머니에게 꽃 핀 쪽으로 가자고 권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동안 518에 대한 명칭 자체가 변해왔고 이제 518은 폭력이 아닌 ‘민주화’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으며 어느 정도 양지로 올라서게 되었다.
양지로 나왔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일은 기억의 문제이다. 일상의 사소한 일들에 얽매어 있다 보면 아무리 큰일이라도 뒤로 미루게 된다. 먹고사는 일은 온 힘을 요구하는 고달픈 일이기에 특히 고통스러운 일은 제쳐 놓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일단 그 아픔을 공유한다면, 그들이 겪은 고통이 타인 또한 인간임을 알기에 경험한 것이라면 우리는 인간의 경지에 머물게 된다.
그러니까 형, 영혼이란 건 아무것도 아닌 건가.
아니 그건 무슨 유리 같은 건가. 유리는 투명하고 깨지기 쉽지. 그게 유리의 본성이지. 그러니까 유리로 만든 물건은 조심해서 다뤄야 하는 거지. 금이 가거나 부서지면 못쓰게 되니까. 버려야 하니까. 예전에 우린 깨지지 않는 유리를 갖고 있었지. 그게 유린지 뭔지 확인도 안 해본, 단단하고 투명한 진짜였지. 그러니까 우린, 부서지면서 우리가 영혼을 갖고 있었단 걸 보여준 거지. 진짜 유리로 만들어진 인간이었단 걸 증명한 거야(130).
열다섯 소년은 양심을 상징한다. 이 소설의 제목이 '소년이 온다'가 된 것은 열다섯의 동호가 아직 세상에 물들지 않은 순수한 소년이기 때문이다. 친구 정대가 죽는 것을 본 동호가 정대의 시체를 찾는다는 핑계로 상무관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시체를 기록하고 관리하는 일을 맡는 것인데 죽을 줄 알면서도 끝까지 남는 것이다.
왜 그들은 죽을 줄 알면서도 그런 일을 했을까가 이 소설의 핵심이자 이 소설에서 던지는 질문이다. 그들은 인간임을 증명하기 위하여 죽는 것이다. 권력이 휘두르는 절대적인 폭력의 피해자, 죽지 않을 수 있지만 서로를 놓지 못해 죽음의 구덩이로 뛰어드는 그 일은 양심의 표상이다.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하여, 인간임을 증명하기 위하여 하는 행동이 바로 '소년이 온다'로 귀결되는 것이다. 내포 화자가 말하듯 누구도 그런 상황에서 제외될 수는 없다. 그런 상황이라면 길을 가다가도 죽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일을 잊었을 때 혹은 미루어 두었을 때 본질적으로 동일한 일이 일어난다. 2009년의 용산 참사가 그러했고 2014년 세월호 참사가 그러했다. 그런 일들은 국가권력에 희생 당하는 약자들의 이야기다. 저자는 인간이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에게 온 소년을 기억하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