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일 한강의 『바람이 분다, 가라』(2010)를 읽었다. 이전에 두어 번 읽었지만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엄두가 안 났다. 복잡하게 꼬인 줄거리도 줄거리지만 관련 자료도 많지 않았다. 게다가 꽤나 두터웠다. 어떤 사람들은 이 책이 밋밋하다고 재미없다고 말한다. 큰 사건이 없고 문장은 지극히 치밀하고 촘촘하기 때문이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인물의 의식을 따라가는 이러한 글은 현대의 흐름과는 다르지만 인간에 관해 끝까지 내려가려 하기 때문에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일 테다.
이제 비로소 이 소설에 나온 달의 뒷면이라는 표현이 인간에게 정말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달의 뒷면은 소설에 나오는 화가 서인주의 연작 제목이기도 하다. 우리는 달의 뒷면을 볼 수 없다. 달의 앞면을 볼 때는 앞면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간을 빨리 파악하고 싶어 한다. 각종 기질로 나누고 각종 성격유형으로 나누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해 어서 평가를 내리고 그 평가대로 대하고 싶기 때문이다. 쉽게, 빨리 판단을 내리면 그만큼 부담이 덜하다. 알 수 없는 사람은 내 영역에서 떨쳐내는 것이 내게 유리한 것이다. 내 시각으로 상대를 평가한다.
이정희는 가장 친한 친구 서인주가 죽은 지 1주년 되던 때에 『미술 정신』이라는 잡지에 그녀를 기리는 평론이 발행된 것을 알게 된다. 자신이 알던 인주는 자살할 리가 없다. 한편으로 그녀의 작품으로 소개된 그림들이 외삼촌 이동주의 그림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이정희가 중고등학교 시절을 서인주와 보냈고 서인주의 외삼촌인 이동주의 작업실에서 살다시피 했으며 이동주와 사랑에 빠지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외삼촌 이동주는 죽고 이정희는 이동주를 닮은 남자 K를 만나 세 번의 유산을 겪고 세 번의 자살을 시도한다.
이정희가 살 의욕을 잃었을 무렵 서인주는 늘 먹을 것을 가지고 이정희를 찾아왔고 아들 민서를 데리고 와 아이를 돌보라고 무작정 놓고 가기까지 했다. 아이를 사랑하는 이정희가 아이를 방치할 리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서인주는 초밥을 가지고 찾아왔고 이정희에게 함께 설악산에 가자고 했다. 그녀의 끈질김이 싫었던 이정희는 전화기 코드를 빼놓기까지 했다. 서인주는 혼자 미시령으로 떠났고 마지막까지 전화를 걸었지만 이정희는 그 전화를 받지 못했다. 속초 병원에서 온 전화를 받고 속초로 갔을 때 이미 서인주는 죽어가고 있었다.
그랬으므로 이정희는 교수이자 평론가인 강석원을 만난다. 강석원은 서인주를 신화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그 글을 쓴 것이고 그녀에 관한 평전을 준비 중이다. 이정희는 자신의 경험으로 보아 서인주가 자살할리 없다고 굳게 믿고 민서가 이 평전을 읽는다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생계인 번역 일도 내려놓고 서인주에 관한 진실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강석원의 평전과는 정반대인 책을 쓰려는 것이다.
우선 출판사 관계자를 만나 긍정적인 반응을 얻는다. 서인주의 그림을 처음 전시했던 P 갤러리 관장을 찾아간다. 서인주가 일했던 미술 학원을 찾아간다. 조각가 김영신을 찾아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심리상담가인 류인섭을 찾아간다. 매번 자신이 알던 서인주의 모습이 아닌 또 다른 면을 알게 된 이정희는 혼란스러움을 느낀다. 류인섭은 서인주가 왜 미시령에 가려고 했는지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 서인주는 어머니 이동선의 과거를 알고 싶어 했던 것.
이정희는 단서를 얻기 위해 서인주의 작업실을 방문하고 그 작업실이 이미 강석원의 소유임을 알게 되자 열쇠를 몰래 만들어 들어가기까지 한다. 강석원에게 들켜 모든 자료를 빼앗기지만 이정희는 몇 가지 자료를 여전히 훔쳐내고 그 덕분에 류인섭을 찾아낸 것이다. 그리고 미시령과 관련된 과거 사건을 알게 된다. 서인주는 이미 이정희에게 함께 가자고 요청했지만 이정희는 자신의 고통으로 인해 서인주의 요청을 묵살했던 것이다. 서인주는 어머니 이동선이 왜 알코올 중독에 그리고 정신병을 앓게 되었는지 알고 싶어 했다.
서인주의 어머니 이동선은 스물여섯 살 대학생일 때 중앙정보부의 간부 아들인 진수에게 수학을 가르쳤다. 약혼자인 레지던트가 있었고 이복동생 이동주를 혼자 힘으로 돌보고 있었다. 류인섭은 진수에게 영어를 가르치던 과외 선생이었고 진수 아버지에게 당당하게 월급을 요구하는 이동선을 보고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 이후 그들은 진수의 부모가 없는 금요일마다 음악을 함께 들으면서 즐거운 시간을 가지지만 이때 이미 이동선은 알코올 중독자였다. 이들 셋은 크리마스 경 함께 진수 아버지의 차를 몰고 미시령으로 떠난다. 폭설로 차가 갇히지만 다행히 제설차를 만나 서울로 돌아온다. 이동선은 약혼자를 만나고 질투에 사로잡힌 진수가 차를 몰아 약혼자를 죽인다. 이동선은 서인주를 유복자로 낳았던 것이다. 이동선은 약혼자의 죽음 보상금으로 살아가다가 알코올 중독과 정신병으로 죽었다.
인주 어머니의 불행한 과거는 서인주가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다. 서인주의 전남편 정선규가 답을 보내온다. 서인주가 민서를 업고 십층 아파트에서 뛰어내리겠다고 협박했던 적이 있다는 것. 뜻밖의 사실을 연달아 알게 된 이정희는 혼란스러워한다. 강석원이 이정희가 했듯이 새 열쇠를 만들어 이정희의 집으로 들어와 자료를 없앤다. 컴퓨터에 물을 부어 거의 완성된 원고를 못쓰게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이정희는 강석원에게 전화를 건다. 카페에서 만나자고 약속한 다음, 서인주의 작업실로 간다. 강석원이 나타나고 그들은 서인주의 죽음을 놓고 옥신각신 싸운다. 서인주가 이정희를 더 사랑했다는 것을 알게 된 강석원은 벼루를 던져 이정희에게 상처를 입힌 다음 불을 지른다.
무엇에 관한 이야기일까? 죽음을 놓고 그 원인을 파헤쳐 나간다는 측면에서 보면 삶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라고 해도 좋을 듯하다. 사랑했던 사람을 놓고 강석원과 이정희, 두 사람이 다툰다는 측면에서 보면 사랑 이야기라고 보아도 될 것 같다. 미시령이라는 장소에서 40년을 두고 일어나는 이야기라는 면으로 본다면 대물림되는 불행한 가족사라고 보아도 된다. 가난은 끈질기게 등장한다. 소수를 제외한 모든 등장인물이 가난할뿐더러 가부장적 사고에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에 희생당하는 여성이라는 측면에서도 읽을 수 있다. 마지막 장면에는 구급차에 실려가고 있는 정희의 모습이 그려진다. 살아남고자 몸부림치는 모습인 걸까.
달에 앞면과 뒷면이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도 앞면과 뒷면이 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앞면, 그것도 극히 제한적인 면이다. 내가 너를 안다고 할 수 있는가.
누군가 인간임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보지 않고서는 대가가 될 수 없다고 말한 적 있다. 그것은 소재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질문이다. 한강의 소설에는 인간에 대한 깊은 질문이 가득하다. <바람이 분다, 가라>는 친구의 이면을 알게 된 정희의 모습이 그려지고, 무엇이 인주의 죽음을 야기했는지 그 원인을 찾는 동안 오히려 살고자 하는 욕망을 갖게 된다는 결론으로 끝이 난다. 우리가 서로를 알면 아니 소통하게 된다면 거기엔 어떤 모습이 펼쳐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