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리뷰] 스페이스 보이
輝 2018/05/13 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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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페이스 보이
- 박형근
- 11,700원 (10%↓
650) - 2018-04-09
: 486
4.0
외계인이 한 가지 소원을 들어준다고 해서 말했지.
“10월 28일에 폭우나 한번 내리게 해주세요.”
이 책을 읽게 만든 그 문장이 결국 이 책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10월 28일 그녀의 결혼식, 막지는 못하지만 비나 맞아라 하는 찌질함.
2주 간의 우주 체험을 마치고 지구로 귀환한 주인공은 어마어마한 인기를 누리는 우주대스타가 되었다지만 정말 지독히도 찌질한 인간이다.
이야기는 스페이스 보이가 된 주인공 김신이 무중력 훈련을 마치고 우주로 떠나면서 시작된다.
그리고 우주에서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건 지구와 완전히 똑같은 공기와 빛으로 둘러 싸인 양호실이었고, 외계인이랍시고 자신을 마중나온 건 샤넬의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였다.
자신은 외계인이고 이곳은 우주가 맞으며 단지 김신을 위해 꾸며진 현실 공간이라는 설명을 들으며 김신은 우주를 떠돈다.
생각만 해도 불려오는 칼 라거펠트와 간 카페에서 익숙한 얼굴들을 마주하고, 자신이 사용하던 일렉 기타를 연주하며 김신은 마침내 이곳이 자신의 뇌라는 걸 깨닫는다.
지우고 싶었던 기억을 마주하며 모든 것이 그녀이고, 자신은 그녀를 놓을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김신은 기억을 지우지 않고 남기기로 한다.
2주 간의 우주 체험을 끝내면 이 모든 기억을 지우는 대신 하나의 소원을 들어주겠노라 말하는 칼 라거펠트에게 자신은 소원이 없으니 10월 28일에 폭우나 내리게 해달라 말한다.
모든 기억 속을 떠돌며 그녀와의 추억을 떠올리는 2주가 끝나고, 김신은 온전한 기억을 가진 채로 지구로 복귀한다.
끝도 없이 쏟아지는 질문들에 외계인의 기억 조작으로 암기된 답변을 술술 내뱉고, 연예인의 삶을 누리며 김신은 그녀를 찾아간다.
닿지 못할 곳으로 가버릴 그녀와 허무맹랑하게 느껴지는 연극같은 삶이 줄줄 이어지며 시간이 흘러간다.
드디어 그녀의 결혼식, 화창한 하늘에 홀로 우산을 든 김신은 우주 체험보다 더 가상 현실같은 실제 상황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될 대로 되라는 마음으로 방송에서 필터링을 거치지 않은 말들을 이어가며 비호감 이미지가 되어버린 김신은 어느 토요일, 로또 발표 15분 전 라이브 방송으로 로또 번호를 공개하기에 이른다.
뒷 표지의 소개글이 뭔가 두루뭉술하게 느껴지긴 했는데 전혀 이런 이야기일 줄 예상도 못해서 끝까지 당황했다.
우주는 그저 인간으로 살기 위한 요만큼의 첨가물에 불과했다니, 너무나도 다른 방향의 이야기라 굉장히 황당했고 어색했다.
기대하지 않았던 이야기인데다 짧은 추억 묘사 부분을 지나고 나선 거의 연예계 생활에 대한 좋지 않은 얘기들 뿐이라 작가가 연예인에 대해 안 좋은 감정이 있나 싶을 정도다.
마치 일기를 쓰듯 짧은 문장으로 남겨지는 진행 방식 또한 간결하고 눈에 잘 들어오긴 하지만 연예계 생활 같은 긴 흐름의 이야기에선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혹시나 하며 네이버에 책 이름을 검색한 결과 뜻밖에 같은 내용의 단편 소설을 읽을 수 있었다.
장르가 SF로 소개되어 있는 게 찜찜했지만 딱 36장의 전용뷰어로 끝나는 이야기에는 같은 내용이지만 2주가 아닌 5일 간의 우주 생활이 담겨 있고, 그녀는 만나지도 못한 채 신혼부부가 오픈된 웨딩카를 타고 떠날 날, 단 하나의 소원인 폭우를 내리며 끝이 난다.
물론 그 연예계 생활 역시 스타일리스트며 계약 연애같은 쓸데 없는 내용을 다 쳐내고 아주 간략하게 서술되어 있다.
아카시아 향을 뿌리던 향수 이름들과 함께 펼쳐지는 우주에서의 2주 간의 시간까지는 정말 독특하고 좋다고 느꼈는데 그 느낌을 확실히 느낄 수 있는 게 단편이었다.
단편을 읽고 보니 확실히 아쉬운 책이다.
사실 전기 충격 같은 일렉 기타 연주를 통해 깨달음을 얻는다거나 그녀에 대한 기억 부분처럼 부자연스럽게 느껴지던 게 단편에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일부러 내용을 늘린 부분들은 전부 없어도 될 것들이었다.
묘사는 책이 조금 더 나은 듯하고 우주 부분을 조금 더 다듬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들지만 그럼에도 둘 중엔 확실히 단편이 어울린다.
뜬금없이 통찰력을 준 것도 그렇고, 다시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후반부 내용도 너무 쌩뚱맞고 어이가 없었기에 그냥 폭우로 끝냈으면 좋았을 걸 싶다.
괜히 인간다움을 추구하네 어쩌네 하며 중2병 추억 같은 걸 끄집어 자꾸만 찌질해지지 말고.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확실히 우주와 뇌를 연결시킨 그 참신함은 기억에 남는다.
향수의 기억을 묘사하는 부분과 그물을 건져올리는 것들 역시 새로웠다.
그럼에도 출판사에는 미안하지만 단편이 저렇게 공개되어 있는 한 다시 이 책을 읽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단편을 추천하면 했지, 다른 사람들에게 책을 권유하지도 않을 듯하다.
참 아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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