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사랑니
경성기담
사랑니777  2026/09/28 14:53
  • 경성기담
  • 전봉관
  • 40,500원 (10%↓2,250)
  • 2026-09-05
  • : 2,295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일본 얘기부터 하자면, 이 나라에 대해서는 그닥 좋은 감정은 없다.(요즘은 중국이 더 최악이라 일본이 그럭저럭 넘어가는 것 같지만) 겉으로는 질서 있고 친절한 나라인데, 그거야 그 나라 안에서의 상황이지, 식민지 시대 그들은 악랄하고 잔인했다.



열 번째 이야기 <정기현의 이야기> 의 넝마주이 정기현은 굶는 애들 때문에 좀도둑질을 했고, 그게 들킬까 봐 술김에 고물상 주인을 찔렀고, 붙잡힐까 봐 순사를 죽였다. 엿새 동안 세 명이 죽었다. 그렇다고 가난했다고 살인이 용서되는 건 아니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다. 정기현이 재판에서 정월까지만 살려주면 사람다워져서 죽겠다고 빌었다는 장면도 읽으면서 마음이 복잡했다. 살고 싶다고 발버둥 쳐도 이미 죽은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정기현은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절도를 시작했고, 처음부터 사람을 죽이려고 계획했던 인물은 아니었다. 하지만 한 번의 범죄를 감추려고 또 다른 범죄를 저지르고, 그렇게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들어간다. 이게 오히려 무섭다.



사람이 하루아침에 괴물이 되는 건 아닌 것 같다. 이것만 감추면 되겠지 하다가 결국 자신을 옮아매는 괴물이 되는 거다.

열네 번째 < 안동사건 >이야기는 읽다가 화가 났다. 일본인 순사가 죽으니 경찰은 처음부터 '일본 순사를 싫어하는 조선인'을 찾았고, 그러면 사실 안동 사람 전부가 용의자였다. 결국 화투 치던 시골 청년 다섯이 끌려갔다. 증거라고 내놓은 게 돋보기로 봐야 보이는 얼룩이었다. 목격자라는 열두 살 아이는 경찰이 집에 데려가 저녁 먹이고 과자를 사주고 나서야 "봤다"고 했다. 그 부분에서 식민지가 된 조선에서 정의라는 건 찾아보기 힘들구나. 라는 생각을했다.



하지 않은 일을 했다고 하는 걸 자백이라 할 수 있을까? 근데 고문이 흔하던 때라면 얘기가 다르지 않을까. 버텨도 죽을 수 있고 거짓 자백을 해도 죽을 수 있다면, 일단 그 순간의 고문이라도 피하고 싶었을 수 있다. 그러니까 자백만 갖고 사람 인생을 정해버리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이었나.



3심에서 변호사가 사실관계를 하나씩 뜯어본다. 손전등 들고 수첩 들고 만년필까지 들었다는 순사한테 "손이 세 개라도 된단 말인가" 하고 따지는 장면은 웃기면서도 씁쓸했다. 누가 봐도 말이 안 되는 이야기를 1심, 2심 재판부가 그대로 받아 적은 거다. 혈흔 감정에서는 범행 도구라던 목침에 피가 없다고 나온다. 다섯 명은 무죄가 됐다.



근데 무죄가 되었지만, 평범하게 살아야 했던 1년 7개월이 사라졌고, 출옥하고 나니 고향 갈 차비조차 없었다. 보상을 청구했더니 받을 수 있는 최대가 9원이었고, 그마저도 경찰에서 자백했다는 이유로 기각됐다. 고문해서 받아낸 자백이 보상을 막는 이유가 된 거다. 공을 세웠다던 사법주임은 표창에 포상금 100원을 받았다가 나중에 산골로 좌천됐고, 진범은 끝내 못 잡았다.



솔찍히 너무 두꺼운 책이라 읽는데만해도 10일은 걸렸던 것 같다. 현실에서도 억울한 일이 많은데, 식민지 시대였던 조선은 오죽할까. 책의 장점 중에 하나는 사건마다 실제 보도된 날짜와 기사를 같이 붙여놔서, 작가가 지어낸 얘기를 읽는다는 느낌은 안 들었다. 식민지 이야기일수록 이런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작가 생각이 아니라 그때 신문이 그렇게 썼다는 걸 보여주니까.






읽다 보니 이 책의 사건들은 서로 다른 이야기이지만, 권한을 생각하게 한다. 사람 목숨과 인생을 정할 권한을 누가 갖고 있었는지, 그 권한이 잘못 쓰였을 때 누가 책임을 졌는지. 안동 사건은 그 답이 "아무도 없었다"였다.

그때는 이름도 말도 생활도 일본식으로 바꾸라고 강요하던 시대였다. 지금은 일본에서도 한국어를 배우고 드라마와 K-POP을 즐기는 사람이 많다. 지워질 뻔했던 우리 말과 문화가 이제는 밖에서 배우는 대상이 됐다. 역사가 참 묘하다 싶었다. (물론 지금 한국 문화를 좋아하는 일본 사람들과 당시 식민 권력을 같은 걸로 놓을 순 없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일본이 나빴다'로만 끝내고 싶지는 않았다. 나라에 힘이 없다는 게 한 사람의 삶을 어디까지 무너뜨리는지가 더 크게 남았다. 다섯 청년이 억울하다고 아무리 말해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뺏긴 시간은 못 돌려주고, 무너진 인생도 원래대로 안 돌아온다. 그 시대 사람들에게는 내가 누구인지, 어디서 살고 무슨 말을 할지도 마음대로 정하기 어려웠다.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게 당연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는 걸 잊지 않으려고 이런 책을 읽는 거겠지 싶다.



한때 힘이 없어서 다 빼앗겼던 나라가 스스로 나라를 지킬 수 있는 나라가 됐다는 건 자랑스럽다. 다시는 힘이 없어서 누군가의 삶과 문화와 자유를 빼앗기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