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서바이벌 리포트]는 융 심리학을 이론으로 설명하는 책이 아니라, 인간이 얼마나 쉽게 자신을 속이며 살아가는지를, 한 인간의 삶(노먼) 을 통해 집요하게 보여주는 기록이다. 여기서 말하는 <서바이벌>은 성공이나 경쟁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잃지 않고 살아남는 일을 의미한다.
책의 중심에는 <콤플렉스>가 있다. 융이 말하는 콤플렉스는 열등감이나 트라우마가 아니다. 그것은 특정 인물, 특히 어머니나 아버지와 같은 이미지 주변에 축적된 감정과 기억이다. 이 콤플렉스는 무의식 속에 잠들어 있다가, 격렬한 감정이 촉발되는 순간 의식을 밀어내고 행동과 말을 대신 결정한다. 다소 심오해보인다. 그래서 사람은 화가 난 뒤, 사랑에 빠진 뒤, 절망한 뒤에 “왜 내가 그랬을까”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서바이벌 리포트]는 스스로가 결코 마음의 주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단어 연상 실험 장면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겉으로는 심리 실험이지만, 실제로는 무의식이 얼마나 쉽게 의식을 방해하는지를 드러내는 장치다. 반응 시간이 길어지는 단어, 침묵이 생기는 순간은 콤플렉스가 활성화되었다는 신호다. 인간은 생각보다 훨씬 자주,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는 힘에 의해 움직인다.
노먼이라는 인물은 이 책의 주인공이다. 그는 친구의 추천으로 융 분석가를 찾아가 꾸준히 상담을 받게 되는데, 《서바이벌 리포트》안에 노먼의 생활과 심리, 기억이 녹여있다. 그래서 책은, 이론 중심의 융 심리서가 아니라, 노먼이라는 한 인물을 따라가며 융 심리학을 매우 쉽게 풀어낸 책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일상, 결혼 생활, 욕망과 갈등, 반복되는 선택의 장면들이 모두 융 심리학의 개념을 설명하는 구체적인 예시로 설명된다.
철학이라는 융 심리학의 추상적인 개념 대신, 노먼의 삶을 통해 콤플렉스와 페르소나, 그림자가 실제 인간의 삶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된다. 그는 가정적인 남편이자 책임감 있는 아버지라는 페르소나를 지니고 있다. 동시에 그는 자유롭고 거리낌 없는 욕망을 품고 있다. 문제는 이 두 존재가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는 점이다. 노먼은 자신의 욕망을 인정하지 못한 채 억누르고, 그 결과 욕망은 그림자가 되어 왜곡된 방식으로 드러난다. 이때 그의 삶은 선택이 아니라 반복이 된다.
책은 <페르소나>가 얼마나 유용하면서도 위험한 장치인지를 집요하게 설명한다. 페르소나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을 자신의 본질과 동일시하는 순간, 삶은 덫이 된다고 책은 말한다. (가정적인 남자), (좋은 부모), (성실한 직업인)이라는 이름은 한 개인의 고유한 정체성을 설명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 역할에 매달리며, 가면을 벗은 뒤의 자신을 마주할 용기를 잃는다.
노먼이 성격 유형 검사와 MBTI 이야기를 꺼내는 장면은 이 책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것 같다. 융의 이론이 비즈니스와 자기계발의 언어로 단순화되는 과정,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라지는 섬세함이 대화 속에서 드러난다. 책은 성격 유형이 도움이 될 수 있음을 주장하면서도, 인간을 고정된 꼬리표로 환원하는 태도를 경계한다. 성격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며, 인간의 정신은 언제나 역동적으로 변화한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상기시킨다.
이 지점에서 [서바이벌 리포트]는 흔히 떠올리는 철학서와는 다른 인상을 남긴다. 개념은 깊지만 문장은 어렵지 않고, 설명보다 대화와 사례가 중심이 된다. 그래서 이 책은 학문서라기보다 융 심리학을 토대로 한, 쉽게 쓰인 철학 에세이에 가깝다. 철학을 배우기보다는 동행하고, 이해하기보다는 스스로 흔들리게 만드는 거다.
책은 해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지금 어떤 역할을 연기하고 있는가.> 그 역할을 벗기면 그 안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은 중년의 위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제 막 자기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시점에서 더욱 날카롭게 다가온다. [서바이벌 리포트]는 설명서가 아니라 질문을 품은 일기장 같았다. 노먼의 생활을 엿보는 듯한 느낌은 마치 짐 캐리의 <트루먼 쇼>를 떠올리게 한다. 분석가는 책 속 인물이지만, 어느 순간 독자가 그 자리에 앉아 있다는 느낌도 든다. 책은 조용하지만, 읽고 난 뒤에도 쉽게 식지 않는 사유의 온도를 지니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