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의 기적은 환상적이고 신비한 날이 아니라, 그저 무탈하게 흘러가는 일상이 아닐까 싶다."
- pg.71
"다만 여정이란 꼭 먼 곳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익숙한 길, 우연한 길, 새로운 길, 그 어떤 길 위에서든 나를 둘러싼 풍경은 한시도 가만히 있는 법이 없다." - pg.220
난 어렸을 때부터 잘 걷는 아이였다. 오래, 그리고 빨리 뛰는 것엔 젬병이었어도 오래 걷는 것만큼은 누구보다도 자신 있었다. 1분 1초가 아쉬운 고3 시절에도 뒷산, 긴 터널, 문화센터를 경유해 1시간여를 걸어서 구립도서관으로 향했고, 지금 살고 있는 봉천역에선 한강이 보고싶다는 충동적인 기분을 좇아 노들섬까지 1시간 반여를 걸어간 적도 있었다.
이런 일상 속 산책엔 목적이 있을 때도, 없을 때도 있었다. 부족한 운동량을 채워보려는 목적으로 걸었던 날이 있었다면,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발걸음이 향하는 대로 걸었던 날이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산책 끝에는 마음 속에 만져지는 것들이 있었다. 다 괜찮을 거란 낙관적인 위로,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미래가 암담하고 어둡지 않다는 안심, 걱정은 잠시 미뤄두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이 끝내주는 날씨를 즐기라는 충고가 그것들이었다.
앞으로 마주할 날들은 모두가 처음 살아보는 것이기에, 두려움과 설렘은 항상 마음 속에 공존할 수 밖에 없다. 완벽해야하는 세상 속에서 완벽하지 않은 우리가 끊임없이 번민하는 모든 상황 속에, 찰나의 일상이 주는 위로의 힘은 생각보다 크다. 천천히 걸으며 부유하는 생각과 불안한 마음을 살짝 내려놓는 일. 그 짧은 순간에 우리는 앞으로 다시 나아갈 힘을 얻는다. 그 짧은 순간에 더 많이, 자주 집중할 수 있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