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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님의 서재
  • 눈부신 안부
  • 백수린
  • 14,400원 (10%800)
  • 2023-05-24
  • : 17,540

"게으른 사람들은 자기가 알지 못하는 걸 배우려고 하는 대신 자기가 아는 단 한 가지 색깔로 모르는 것까지 똑같이 칠해버리려하거든."- P106
연분홍색 헬멧을 쓴 어린 여자아이는 무서운지 "아빠, 놓으면 안돼"라고 연신 다짐을 받았다. "걱정하지 마. 아빠가 꼭 붙잡고 있어. 아이가 겨우 안심한 표정으로 자전거에 올라타는 모습을 나는 심상하게 쳐다보았다. 아이의 아빠는 자전거의 뒤를 붙잡았고 진분홍색 자전거 위에 올라탄 아이는 심호흡을 한 뒤 조심스럽게 페달을 밟았다. "아빠, 놓으면 안 돼!" 아이는 다시 소리를 지르며조금 더 빨리 페달을 밟았다. "걱정하지 마." 아빠가 소리를 지르며 아이의 뒤에서 달렸다. 저만큼 나아갔던 아이가 다시 이쪽으로 돌아올 때, 아이의 두 볼은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고 두 눈은 두려움과 황홀함으로 빛나고 있었다. "아빠, 아직 놓으면 안 돼. 안 놓은 거지?" 여자아이의 아빠가 붙잡고 있던 손을 몰래 놓자 자전거는 불안하게 비틀거렸고, 결국엔 넘어졌지만 아이는 울지 않았다.
"아빠, 놓으면 어떻게 해." 웃음기 섞인 원망하는 목소리, 바람이 불면 이따금씩 들려오는 나뭇잎 부딪치는 소리. 그 장면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아이가 마침내 아빠의 손을 떠나 커다랗게 원을 그리며 달리게 될 때까지.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무언가가 머릿속에 기습적으로 떠오른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 P116
... 그렇더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으니까. 이 병원에서 같이 일하는 진애 언니는 광주가 고향이야. 광주일고를 나와 전남대에 수석으로 입학한 수재 남동생을 늘 자랑하던 언니는 가족들과 연락이 닿지 않는다며 매일 울고 있어. 내일 아침에 병원에 가면 다른 언니들에게 거리로 나가자고 말해볼생각인데 언니들이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되긴 해. 하지만 그래도 말을 해봐야겠지. 아무도 같이 나가겠다고 하지 않으면 나라도 한미를 들쳐업고 시내로 나갈생각이야. 

침묵은 비겁함 외에 아무것도 아닐 거니까. - P200
이방인들은 대부분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싶어했고, 그들의이야기를 차분히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병이 낫는 경우가 많았다.
"외로움만큼 무서운 병은 없어."- P207
"그 일을 했던 오 년간 깨달은 건 사람은 누구나 갑자기 죽는다는 거였어. 멀리서 보면 갑작스러워 보이지 않는 죽음조차 가까운 이들에겐 언제나 갑작스럽지. 그리고 또 하나는 삶은 누구에게나 한 번 뿐이라는 것."- P226
"이모는 네가 찬란히 살았으면 좋겠어. 삶은 누구에게나 한 번뿐이고 아까운 거니까."
그 순간, 나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그것에 대해선 알지 못했지만 나는 우리가 어둠 속에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P227
자료에만 근거해 누군가를 찾아나가는 것과 직접 사람을 만나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알지 못하는 누군가를 만나고, 그들의 사연을 듣는 일. 기자로서 취재할 때도 그랬지만 타인의 인생에 흙 묻은 신발을 신고 들어가는 불청객이 될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내 마음은 매번 갈피를 차릴 새 없이 흐트러지곤 했다. 무얼 하든 덧없다는 익숙한 무력감이 나를 엄습했다. - P260
그때 내가 원했던 건 누군가의 삶에 내가 또다시 영향을 미치게 되리라는 그 무시무시한 가능성으로부터 도망치는것뿐이었으니까.- P263
바뀌어버린 세상에 주눅이 들 때면 네가 불쑥불쑥 생각나더라. 한국 사람인 너는 독일에 와서 어떻게 그렇게 적응을 잘할 수 있었을까? 사실 너는 내가 짐작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외롭고, 힘들었던 게 아닐까? 내가 겪기 전엔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도 많다는 걸 나는 엄마를 잃고 나서야 배우고 있어. 네가 여자 형제를 잃었다는 이야기를 내게 처음 아주 어렵게 했던 그날 나는 네 심정의 얼마큼을 이해하고 있었던 걸까.- P273
남들은 저의 삶을 부러워했고, 저 역시 커다란 굴곡이나 파고 없이, 미간을 잠깐 찌푸렸다 펴면 될 정도의 근심만 있는 내 삶에 어느 정도 만족하며 산다고 생각했어요. - P294
이제는 얼굴에 기미가 생긴 동생과 고구마를 구워 호호 불어 먹으면서 밀린 이야기들을 나누다가 나는, 해나가 나보다 훨씬 어려 언니에 대한 기억도 적을 것이기 때문에 나만큼 슬프지 않으리라 오랫동안 단정해왔다는 걸 인정하게 됐다. 그건 나의 착각이었다는 걸. 우리는 누구나 자신만의 방식으로 슬픔에서 회복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미안해. 나는 오랫동안 나만 괴로운 줄 알았어."- P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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