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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편적으로 문학이 주는 감동은 독자로 하여금 "그래, 맞아. 이건 내 얘기야." 라고 동감하게 만드는 데 있다. 하지만 가끔은 독자가 전혀 알지 못했던 얘기들을 만나면서 느끼게 되는 '낯선 생경함'에서 문학의 힘을 새삼스레 느낄 때가 있다. 특히 우리에게 그다지 익숙지 않은 나라의 낯선 문학을 접했을 때, 가끔 가슴을 쓸고 내려가는 서늘한 감동을 느끼게 된다.
내겐 북구의 낯선 나라, 헝가리의 작가 산도르 마라이의 소설 『열정』(솔, 2001)이 그랬다.

이 책은 헝가리의 대문호로 일컬어지는 산도르 마라이의 1942년 작품이다.
1900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령이었던 소도시 가샤우에서 태어난 산도르 마라이는 어려서부터 독일, 프랑스 등 오랜 타국 생활 끝에 부다페스트로 돌아와 시와 소설 등 많은 작품들을 발표하면서 헝가리의 영향력 있는 작가가 된다.
그러나 제 2차대전 후 공산주의 체제가 된 헝가리에서 자유에 대한 위협을 느낀 마라이는 1948년 조국을 떠난다. 이후 이탈리아, 스위스, 미국 등 여러 곳을 떠돌며 망명 생활을 하게 된 그는 긴 망명 생활 후 1989년 2월, 89세의 나이로 망명지였던 캘리포니아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의 파란만장한 삶은 여기까지지만 소설가로서 그의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랜 망명 생활을 하는 동안 마라이의 작품들은 헝가리에서 출판 금지되었으며, 산드로 마라이의 이름은 세상 사람들에게서 완전히 잊혀졌다. 그런데 그가 죽고 난 후인 90년대에 정치적 대전환을 겪은 유럽에서 뒤늦게 1998년, 바로 이 소설 『열정』이 이탈리아에서 발행되면서 산도르 마라이의 운명은 크게 뒤바뀌게 된다. 『열정』은 이탈리아에서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이후 독일에서도 발간되어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소설로 인해 잊혀졌던 작가 산도르 마라이는 '위대한 유럽 작가', '헝가리의 대문호'라는 화려한 수식어와 함께 부활했고, 그의 주옥같은 다른 작품들도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그렇다면 반세기가 지난 후에도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린 소설 『열정』은 과연 무슨 내용일까? 소설 밖의 드라마틱한 부활의 사연과는 달리 소설은 의외로 짧고 간단하다.
어려서부터 24년간 거의 형제처럼 지냈던 두 친구가 헤어진 후 사십일 년만에 만나 하룻밤 동안 재회한다는 것이 줄거리의 전부이다. 그것도 아무 사건 없이 두 사람간의 대화, 그것도 대화라기보다는 거의 한 사람의 독백만으로 소설이 이루어져 있다.
이렇게 시시하기만 한 줄거리의 소설에 대체 무슨 힘이 있는 것일까?

소설의 배경은 눈 덮인 북구의 웅장하고 쓸쓸한 성이다.
주인공인 헨릭 장군은 옛 친구 콘라드가 그를 찾아왔다는 전갈을 받는다. 그는 자신을 배신하고 떠나가 버린 친구를 무려 사십일 년간이나 기다려 왔다. 아니, 사실 그가 기다린 것은 그의 친구가 아니라 과거 속에 숨겨진 진실이었다.
어려서부터 친형제처럼 지냈던 친구 콘라드는 사십일 년 전 어느 아침 사냥길에서 헨릭 몰래 그에게 총을 겨눈다. 그는 친구 헨릭의 아름다운 부인과 사랑에 빠졌던 것이다. 하지만 결국 콘라드는 망설임 끝에 그를 죽이지 못한 채 총을 내려놓고, 그날 오후 갑자기 사라져 버린다. 그가 갑자기 떠남으로써 자신을 살해하려 했던 게 분명하다고 생각한 헨릭은 그날 이후로 팔 년 후에 부인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부인과는 말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지내고 그 후에도 수십 년간 성에 숨어서 은둔의 삶을 살아간다.
그리고 마침내 그렇게 떠나가서 동남아 열대를 떠돌던 친구 콘라드가 사십일 년이 지나서야 돌아온 것이다.

이제 다시 만난 그들은 일흔이 넘은 노인이 되었다.
콘라드가 마침내 그를 찾아오리라고 확신했던 것처럼 그때와 똑같이 자리를 장식하고 그때와 똑같은 음식을 차려놓고는, 사십일 년 동안 준비해온 원고을 읽듯이 헨릭은 밤새도록 그들의 과거를 이야기한다. 콘라드는 말 한마디 없이 묵묵하게 듣고만 있다. 소설은 노인의 쉰 목소리가 과거를 생생하고 장중한 어조로 회상하는 동안 팽팽한 긴장 속에 미스테리 구조처럼 진행되면서 사십일 년 전에 벌어진 일말의 진실을 향해 한발씩 나아간다.
콘라드는 정말 친구 헨릭을 쏘려고 했을까? 콘라드와 헨릭의 부인 크리스티나는 정말 사랑에 빠진 불륜 관계였을까? 죽기 전까지 크리스티나가 사랑한 건 둘 중에 누구였을까? 크리스티나가 콘라드에 대해 남겼다는 '비겁하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크리스티나가 남긴 일기장에 담긴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콘라드는 왜 사랑을 포기하고 열대로 도망치듯 떠났을까?
헨릭이 사십일 년간 궁금해했던 비밀을 향해 소설은 천천히 목을 죄듯이 결말을 향해 다가가고 우리 모두는 헨릭과 함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콘라드의 마지막 대답을 기다린다.

그런데, 콘라드는 결국 아무런 대답 없이 떠난다.
그리고 헨릭 또한 말없이 그를 배웅할 뿐이다.
물론 우리는 헨릭의 장광설을 통해서 이미 그날의 상황을 알고 있고, 읽는 사람 나름대로의 해답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소설의 공식에 따라 미스테리가 술술 풀려서 말끔하게 궁금증을 해결해주는 소설의 일반적인 결말을 기대한다. 그런데 정말 소설은 맨 마지막까지도 아무 대답을 하지 않는다. 심지어 모든 의문의 해답을 분명히 제시해 줄 증거인 크리스티나의 일기장까지 - 헨릭은 그녀가 죽은 후 발견된 이 일기장을 그 후로도 수십 년 간 읽지 않은 채 기다려왔다. 정말 무서운 인간이다. - 두 사람은 하나도 펼쳐 보지 않고 고스란히 벽난로 속으로 던져 버린다.

누군가는 이런 결말에 대해 '이게 무슨 소설이냐.'면서 화를 버럭 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무런 대답도 얻지 못한 채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에 도달하고 나서야 이 짧은 소설은 불이 꺼졌다고 생각했던 검불들 사이에서 새로 불길이 확 하고 일듯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아무 대답도 제시하지 않고 끝내는 것이야말로 이 소설이 준비하고 있었던 의외의 반전이었던 셈이다. 그 반전이 전하는 의미란 소설뿐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늘 그렇듯이 이미 질문 속에 대답이 들어 있다는 노인의 오래된 지혜 같은 것이다. 마지막 지점에서야 우리는 그동안 우리가 섣불리 지나쳤던 구절들의 의미를 처음부터 하나씩 되뇌어봐야 하는 셈이다. 여러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야 하는 것은 헨릭이 아니라 바로 독자인 우리들 자신이다.

소설이 수기와 다른 점은 무엇일까?
수기는 모든 걸 까발리지만 소설은 감추고 숨기고 싶어한다. 아니, 소설은 그러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수기는 밝혀진 사실을 추구하지만 소설은 숨겨진 진실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헨릭은 진실을 원하지만 진실이란 사실을 밝힌다고 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점을 헨릭 자신은 이미 알고 있다. 이미 사십일 년 동안이나 진실을 모른 채 살아왔는데, 칠십이 넘은 노인이 된 이제 와서 사십일 년 전의 사실을 뒤늦게 밝혀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헨릭 스스로 말하듯이 어떤 질문들에 대해서 우리는 삶으로서, 생애로서만 대답할 뿐이다.

결국 소설이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마치 풀 수 없는 수수께끼처럼 세 사람을 꽁꽁 휘감고 있는 '운명'이다. 운명이란 우연히 닥치는 불행이 아니라, 가늠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여러 관계들의 피할 수 없는 결과이다. 결국 운명이란 풀거나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받아들일 뿐이란 얘기다.
그래서 소설은 오히려 소설 속 운명보다는 우리가 읽지 못한 그들의 생, 소설 밖의 생에 주목하라고 얘기하는 듯하다.
절친했던 친구와 목숨만큼 사랑했던 여인에게 배신당하고 외딴 성에 박혀 살아온 노장군, 사랑했던 남자(혹은 남자들)와 헤어지고(혹은 말하지 않고) 여생을 침묵 속에 홀로 살아가야 하던 여인, 친구와 여자를 버리고 열대의 밀림을 떠돌아야 했던 한 남자.
소설은 그들의 절박한 운명과 함께 뼈를 깎듯 그들을 찾아왔던 고독의 의미를 헤아리는 것이 더 중요한 것 아니겠는가 라는 숨겨진 질문을 던진다. 정작 중요한 건 사십일 년 전에 일어났던 사건의 진실이 아니라, 삶과 죽음, 아니 전 생애로 대답하고 밝혀내야만 하는 운명의 진실에 대한 것이다.

또한 소설이 얘기하는 것은 엇갈린 운명만큼이나 다르게 살아가게 되어 있는 인간형의 대립이다. 헨릭 장군과 그의 아버지, 크리스티나와 콘라드 양쪽으로 서로 대립되는 쌍은 단순히 부와 가난을 상징하지는 않는다. 비유적으로 음악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으로 대별되는 두 쌍의 사람들은 전혀 다른 삶의 취향과 리듬, 상이한 영혼을 타고난 대립항이다. 현실과 예술의 대립으로 간단히 얘기할 수 있는, 서로의 언어를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의 만남이 빚어내는 삶의 불가해성(不可解性), 떠도는 섬처럼 서로를 고독하게 만드는 엇갈린 비운(悲運)은 소설을 읽고 난 우리를 한없이 쓸쓸하게 만든다.

사십일 년간 고독을 씹으면서 친구를 기다려온 주인공 헨릭 장군이 처음에는 소름 끼치도록 무시무시하고 정떨어지지만, 결국 아무 대답을 듣지 못한 채 친구를 순순히 배웅하고 나서 오랫동안 떼 놓았던 죽은 아내의 초상을 다시 걸면서 자신과 함께 일생을 보낸 늙은 유모에게 입을 맞추는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코끝을 찡하게 만든다. 몹시 사납게 굴던 어떤 높은 사람이 코를 푸는 모습을 보고 담박에 좋아졌다는 어느 소설의 이야기처럼 난 그제야 쓸쓸한 노장군이 담박에 좋아졌다.

그렇다면 우리의 인생이란 결국 불가해한 운명을 안고 초라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일까. 물론 우린 그렇게 태어난 나약한 존재일 뿐이지만 산드로 마라이는 마지막에 우리가 안고 의미를 부여한 채 살아가야 할 작은 해답 하나를 숨겨놓았다.
누군가는 죽거나 혹은 살아남음으로 서로를 배반한다는 건 사실이다. 영리함과 오만, 자만심으로 얻고자 애쓰는 중요한 삶의 이유도 있겠고, 영광과 비참, 전쟁과 평화, 다툼과 화해도 있다.
하지만 결국에 우리 삶에서 의미 있는 건 무엇이고 결국 애써 얻을 수 있는 건 무엇일까? 그때 우리 마음속에 끝까지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일까?
산드로 마라이는 그 해답이 삶에 대한 열정이라고 얘기한다.


"어느 날 우리의 심장, 영혼, 육신으로 뚫고 들어와서 꺼질 줄 모르고 영원히 불타오르는 정열에 우리 삶의 의미가 있다고 자네도 생각하나? 무슨 일이 일어날지라도? 그것을 체험했다면, 우리는 헛산 것이 아니겠지? 정열은 그렇게 심오하고 잔인하고 웅장하고 비인간적인가? 그것은 사람이 아닌 그리움을 향해서만도 불타오를 수 있을까? 이것이 질문일세. 아니면 선하든 악하든 신비스러운 어느 한 사람만을 향해서, 언제나 그리고 영원히 정열적일 수 있을까? 우리를 상대방에 결합시는 정열의 강도는 그 사람의 특성이나 행위와는 관계가 없는 것일까? 할 수 있다면 대답해 주게."
그는 소리 높여 말한다. 마치 대답을 재촉하는 듯이 들린다.
" 왜 나에게 묻나?"
상대방은 조용히 말한다.
"그렇다는 것을 자네가 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 산도르 마라이,『열정』(솔, 2001) 중에서


우연이겠지만, 산도르 마라이가 헝가리를 떠나 쓸쓸히 해외를 떠돌며 망명했던 세월도 공교롭게도 사십일 년이었다.
결국 소설 속 헨릭 장군이 기다려온 세월만큼 떠돌게 된 것이 그에게 주어진 또 다른 운명이었을까? 그 세월 동안 그를 지탱하고 버티게 해준 건 과연 무엇에 대한 열정이었을까?

 출처는 http://blog.naver.com/book_bug/4000321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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