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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중앙공산당(KCCP)

군국주의의 방법과 효과.

 

당면한 임무.

 

이제 우리는 당면한 방법과 효과에 대한 특수한 검토를 마치고 프로이센 독일의 모범적인 방식을 위해 들러붙고자 한다. 관료적인 수학자 자본주의적 군국주의와 군국주의의 최악의 형태를. 국가를 넘어선 국가를.

 

현재의 군국주의가 사실일지라도 자본주의적 사회의 징후는 아닌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견고해진다.

 

군국주의를 끝내기 위해선 유용한 군대를 유연하고 효과적인 부대로 바꿔야한다. 반대로 그것은 아주 높은 가능성을 군사적 기술과는 반대로 기계가 아닌 사람으로 구성된 살아있는 메카니즘으로 제시하기 때문에 올바른 “정신”으로 채워져야한다.

 

첫 번째 측면은 재정적으로 해결된다. 이후에 논의하겠지만 우리는 이제 두 번째 측면에 몰두할 것이다.

 

그것의 내용은 세 가지이다. 군국주의는 군사적 정신에서 생산하려는 것을 보고, 우선적으로 활발한 군대로부터 예약하고 예비군들이 중요해진다. 동원되고 지원되는 마침내, 주민계급들은 환경을 제공한다. 주민계급들은 양육하고 군국주의와 반군국주의에 부합되기 위해 고용된다.

 

군사 교육학에서 병사들의 훈련.

 

진실한 군인정신은 애국정신이라고도 하며 프로이센-독일은 “왕에 대한 충성심”의 한마디로 세계적인 명령을 따라 모든 적들의 국가를 침략할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이 정신은 멍청하고 저능한 대중적인 지도를 필요하도록 한다. 이익관계에서 “존재적 명령”으로 직접적으로 교류한다. 폰 아이넴의 국가의 장관들의 가입은 충실한 왕의 군대를 제공한다. 군대는 나쁜 말로 누구의 생각을 묻지 않으며 덜 올바른지도 묻지 않는다. 독일 군국주의의 대표를 완전하게 아래로부터 말한다. 하지만 군국주의는 악마와 심해에 있다. 무기의 기술은 전략적이고 텍티컬하며 현재의 위대한 군인의 지식인1)과 그러므로 군인은 더욱 지능적이고 캐테리스 파리버스2) 또한 그러하다. 이러한 이유로 홀로 군국주의는 거의 멍청한 대중들에겐 훌륭하진 않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멍청한 대중을 사용하지 않으며 또한, 경제적 기능은 대중들에게 공연하기 때문에, 필수적으로 프롤레타리아로부터 온다. 이 명령은 착취할 수 있으며 더욱 큰 가능성의 이익을 필연적인 삶의 위험을 커지게 한다. 자본주의는 강제한다. 자본주의는 비극적인 운명을 시스템적으로 어마어마한 노예들을 매우 지능적으로, 자본주의는 가득차게한다는 것을 안다. 고유한 죽음과 해체를 야기하면서도 모든 시도들은 능숙한 책략과 교활한 조직으로부터 교회와 학교로부터 자본주의의 함선을 조종하기 위해 지능적인 스킬라 괴물의 적은 착취를 만든다. 다른 매우 위험하거나 프롤레타리아 자신으로부터 짐승이 부담하기에 적합하지 않고 교육의 카라디브스로부터 필수적인 자본주의의 파괴를 계급의식으로 증가한다. 모든 부분들과 혁명과 학대받는 모든 시도들은 실패할 것만 같다.

 

동엘비아 지역의 농부들은 크로체의 기록에 따르면 대부분 쓸모없는 노동자들이었지만 최고의 융커들이긴 했었다. 명령에 따르는 대규모의 군국주의에 기여했다. 그럼에도 이 유형들은 군국주의에서도 낮은 지능을 가졌다.

 

“최고의 병사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이다.”라고 한 사람은 자주 말했다. 세계적인 병영 아래에

군인정신을 주입하는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보여준다.3) 단순히 노예로서 맹목적인 복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실용적이지도 않기 때문에, 군국주의는 “총 쏘는 기계”4)를 생산하기 위해 간접적으로 남성의 의지를 강제한다. 도덕적이거나 심리적인 영향을 강제하거나 폭력적인 수단을 사용하는 의지를 생산하며, 속이거나, 강제한다. “평화에 땀을 흘릴수록 전시에 피를 덜 흘린다.”는 격언은 여기에 적용해볼 수 있다. 외부의 적에 대한 군국주의가 요구하는 기능의 진정한 “정신”은 완고한 쇼비니즘과 편협하거나 이기적이며, 둘째로 국내의 적과 관련해서 모든 진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거나 심지어 증오한다. 위협적인 사업이나 시도를 지배계급 하에서 권력을 장악하고자 한다. 군국주의는 계급적 관계인 쇼비니즘에 매우 반대하는 사람들과 이러계급적 관계에서 모든 것이 진보하는 사람들에게 호의적인 영향에서 군인들의 생각과 감정을 이끄는 통로이다, 기존 사회 질서의 몰락이 초래될 때까지 유일한 합리적인 목표로 나타나야 하며 그리고 비록 규칙적이긴 하지만, 징병의 연령대에 젊은 군인들은 프롤레타리아라는 사실을 무시할 순 없다. 이들은 독립적이거나 정치적 통찰력에 있어 동시대의 부르주아보다 뛰어나고 계급 의식이 확고하진 않다.

 

체제는 군인들에게 도덕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파렴치하거나 교활하다. 사회적인 계급에 따라 분류하는 대신에 지배계급에 의해 연령을 분류하고, 체제는 노년의 “계급”에 있는 사고와 감정을 20~22세의 프롤레타리아로 구성해서 특수한 계급으로 형성하고자 한다.

 

우선 제복을 입은 프롤레타리아들은 무자비하게도 그들의 가족들과 동지들에게 단절되어 있다. 그들의 고향을 잊게하고 독일에선 효율적으로 병영5)에 가두는 것으로 영향을 미친다. 이들은 수도원 생활에 대응하는 예수회 생활을 방불케한다.

 

다음은 이 격리를 지속하고자 하는 시도를 가능하게 한다. 군대와 기술적 관점에서 장기복무의 필요성이 없을 경우 격리를 연장하려는 경향에는 재정적인 난관을 1892년에 2년 동안의 독일의 상황6)에서 확인해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장기복무에 할당된 시간을 활용하는 것은 문제며, 훈련받은 사람들의 정신적인 관점에도 영향을 미친다.

 

교회의 사례에서도, 모든 사람들의 약점과 감각은 군사교육에 수용된다. 열망과 허영심을 자극하고 군복은 최고의 제복을 수여하고, 병사들의 명예는 특히 위엄있게 미화된다. 군인계급들은 가장 중요하면서도 존경과 찬사를 받으며 칭송한다. 그리고 실제로도 많은 특권을 부여받는다.7) 그리고 군인계급들이 끌어들일 하층민들의 거친 취향을 따라 제복을 재단하고 장식하면서 과시한다. 순수한 군사적 목적과는 다르게 군인계급들은 카니발 의상처럼 작은 장식들로도 제복을 다듬는다. 모든 종류의 반짝이는 구별된 장식들과 좋은 촬영을 위한 줄무늬들은 매력적으로 방탕하게 제복을 꾸미려는 과시욕과 뛰어난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에 대한 욕망처럼 저급한 본능이다. 그리고 군인들의 고통에는 반짝이는 장식들과 화려한 군악대들과 함께 진정된다. 아이들, 얼간이, 하녀, 프롤레타리아의 잔재들 사이에서 “웅장한 군대”를 자랑스러워 한다. 한때 행진을 본 적이 있는 수상한 대중들과 베를린의 왕궁 친위병들의 행진을 본 적이 있다면 꽤 이해할 것이다. 특정 민간인들에게서 느껴지는 제복에 대한 호감은 군대 내에서 미개한 요소들에 대한 강한 유혹을 끈다.

 

이러한 모든 수단들은 현저한 지적단계와 사회적 위치에서 더욱 효과적이다.

 

단순히 판단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최상의 제복을 입은 미국의 흑인8)들과 동프러시아 노예들이 싸구려 군장신구들로 사람을 유혹하기란 쉽다. 그러나 그들의 군사적 위상과 민간인적 삶의 단계는 상이하다. 그러므로 이 수단들은 유능한 산업적 프롤레타리아들에게 군국주의에서 계획되고 지정한 비극적 모순에도 좋든 나쁘든 필수적으로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며 적어도 당분간은 군국주의에 유연한 소재를 제공한다. 그럼에도 군국주의에선 정신적으로 동의하면서 보존할 수 있는 수단을 동원한다. 이를테면 카이저의 생일을 축하하는 연대축제가 있다.

 

중독된 상태로 병사들에게 모든 걸 주입할 때, 영혼은 죽고, 타오르는 공상들과 감정은 체계적으로 권력의 수단으로 이용된다. 병사들은 군국주의에 적합하게 자신을 맞추며 왜곡되고 미숙한 세상들로 채워나가기 시작한다. 본성적으로 군국주의 교육은 모든 유능한 산업 프롤레타리아를 양성하는데 적합하지 못한 능력을 갖거나,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군국주의 교육을 가르친다. 병사들에게 군국주의와 적합하지 못한 교육을 가르치는 건 궁수가 쏜 화살에 튕겨진 화살과 닮아있다. 이 사례는 막스 로네즈와 우편들에서 이익을 위한 경쟁에 제빠른 리버트 장군에게 전달되었다. 반사회적이고 반민주적인 교육에 의존하고 가혹한 훈련, 병영에서의 생활, 장교9)와 부사관10)들의 제복을 신성하게 바꾸며, 병영생활의 많은 부서에선 모든 사고를 근무 중이거나 비번일 때조차도 짐쇠에 물려서 병사를 규율에 복종하게 한다. 탄력적으로 복종하는 모든 병사의 의지는 가장 부러지기 쉬운 척추를 구부리고, 당기고, 뒤틀려서11), 탄력적이고 필수적인 생산을 제공한다.

 

1892년 1월에 독일의회는 비록 편견 없이 거부되긴 했지만 열성적으로 “종교”정신을 부합하고자 요청했다.

 

정신적 훈련은 군사적 억압과 노예제도를 완성하기 위해 예전된 군사적 교육으로 특별한 대상을 분명하게 조직한다.

 

명령과 종교적 비방은 당근과 채찍이 따른다. 채찍은 오직 베일에 감춰진채로 해를 가하며

“항복문서”의 체계12)와 고급화된 전망13)으로 성공적으로 고용된 군대의 영구적인 장식용으로 채워진 대형을 위한 미끼로서 당근을 겸한다. “장교”14)나 부사관에 의뢰하지 않거나, 민간인의 삶에 대비하는 증서15)와 매우 교활하고 위험한 배치로 군국주의는 공적인 삶도 오염시키며, 후에 보겠지만 가장 선두에서 규율의 체계16)에서 군국주의에 따른 위협을 전쟁범죄와 최소한의 반대야당을 군사적 정신으로 무장하게 하고 군사적 정의는 준-중세적인 절차에 따라 잔혹하고 상스럽게 처벌하기 위해 최소한의 불복종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과도할 정도로 헌신적인 상급자들은 종속된 부하들에게 최소한 벌을 주고 자기보호의 권리마저도 훔쳐가도록 부하들에게 반복적으로 학습하게 한다. 군국주의에 투쟁할 수 없도록 유익하지도 선동적이지도 못하게, 군사적 논문들과 군사적 범죄 사례를 정독하지 못하게 하고선

 

여기에 혹사된 군인들의 사례를 후에 기회가 된다면 언급하도록 하겠다. 학대는 법적으로 제재할 수 있는 수단이 아니지만 군국주의에선 강압적인 징계의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다.

 

병사들을 야생짐승들로 길들이고자 하며 집합하고, 아첨하고, 억압하고, 투옥하고, 손질하고,

때려서 감각을 죽여버린다. 밀알이 섞여서 군대를 강력한 조직으로 공격할 수 있게 하고

벽과 벽으로 방벽을 쌓아 혁명의 유입을 가로막는다.17)

 

“1년 자원봉사자들”. 예비역 장교들에게 계획된 부르주아의 자식인 “1년 자원봉사자들”은 반군사적이고혁명적 경향에 의심을 부른다. 그러므로 장교들은 막사에서도 떨어져서 그들의 고향에서 떨어져 병영에 갇히거나, 교육을 받고 교회에 나가는 것을 피할 수 있다. 심지어 가혹한 훈련에서도 예외이며 규율의 법적 범위에서도 자유롭고 군사형법에서도 가볍게 예외로 풀어주는 건 당연한다. 예비역장교들이 병사들을 학대하고 “문화”적인 모든 것에 강력하게 증오를 품을 수 있음에도 예비역장교를 훈련하는데 사용되는 기구나 설비들은 강력한 증거를 제공한다. 군사적 규율에서 조직 속의 개인들은 독립성을 상실한다. 군대에서 각 개인들은, 노예선박선의 범죄자와 같이 모든 독립적인 행위를 한심하게 제한하도록 쇠사슬로 묶어낸다. 수천년에 걸친 압도적인 권력은 독립적인 행위를 만들어내는 압도적인 힘을 방해한다. 모든 강력한 조직의 구성원들은 강력한 원칙들과 명령에 노출된 상태로 특별한 종류의 최면술로 지배한다. 군중들을 최면에 사로잡힌 것처럼 속이고 군국주의에 반대하는 계몽되고 단호한 군국주의 반대자들과 상대들을 애초에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포박해버린다.

 

병사들에게 갈등과 난관을 교육하는 영역에서 군국주의는 두 가지 사실을 보인다.

교육과 장비가 적용된 군사훈련은 더욱 건방지고 증가하는 단계에서 병사들의 독립을 제어한다. 병사들은 자본의 감시자로 독립조차 요구할 수가 없다. 어떤 요구들도 할 수 없다는 사실로 인해 자살로 죽음을 선택할 자유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단순히 전쟁은 병사와 외부의 적들과 싸울 수 있는 노예들과 기계를 필요로한다. 장비와 무장도 제외할 수 없다. 밝은 제복과 반짝이는 부대마크, 전투모와 표식깃발, 행진훈련, 기마병의 공격, 자국의 적들과 싸우는 계급적인 정신에 필요한 찌꺼기들이 필요하며 외부의 적과의 전쟁에선 치명적이거나 사용할 수 없게 된다.18) 모든 군국주의를 옹호하는 순진한 비평가19)들은 군사훈련의 기준에서 숨막히는 비극적인 전투를 무시하고 많은 측면에서 과장되게 묘사된다.

 

군국주의의 내부에 존재하는 자기모순은 첨예하게 대립하는 경향이 있으며 국내외의 정치적관계와 어느 쪽이 우위를 차지하는데에 따라서도 이익관계는 두 가지가 상반된다. 이 사실에서 정신을 속이는 세균들을 전파하며 군국주의는 스스로를 파괴해나간다.

 

무장된 혁명은 자국의 적들과 투쟁할 때 단순히 군사기술적인 성격의 끔찍한 측면을 가정하여 장식된 노예들과 기계들이 혁명을 억압할 수 없게 한다. 그러면서 소수에 의한 강압적인 지배의 마지막 기간에는 자본가들의 과두정치는 타격을 입을 것이다.

 

왜곡되고 혼란스러운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의식에서 일반적으로 군사정신의 수단을 아는 건 매우 중요하다. 군사정신에서 일어나는 순수한 군국주의의 오염을 제외하고 모든 공공생활에서 일어나는 전반적인 모든 작용을 동시에 오염시키며 자본주의에 순종하도록 한다. 군국주의는 손쉽게 경제, 사회와 정치에서 프롤레타리아를 노예상태로 생산하고 착취한다. 또한 군국주의는 해방을 위한 프롤레타리아의 계급투쟁을 늦추는데 상당하게 일조한다. 우리는 이를 반드시 돌려낼 것이다.

 

준 공식적이고 준 군사적인 조직과 평범한 사람들의 집단

 

군국주의는 방대한 규모로 현역군을 강력하고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를테면 평범한 사람들을 군사적 관활권(사법)으로 광범위하게 확장하고 예비역 장교와 지휘관들에게도 적용되는20) 군사법정의 지배체제의 수단들은 무제한적인 권한으로 평범한 사람들에게 침범하려한다. 여기서 특징은 통제위원회에 출두하도록 소집된 사람들을 군사적 관할권에 복종하게한다. 군당국은 군 통제위원회가 앉아서 공개적으로 종일 법을 위반하면서도 관할권을 주장한다. 이에 대한 근거들은 조금도 없으며 통제위원회는 군복을 입은 젊은이들의 국방모임과 준-공식적이고, 준-관료적인 경영을 하는 군대 모임들이 속하며 우둔하거나 포식적인 잔치를 벌인다. 이 군국주의 활동 영역에서 매우 중요한 것은 군대의 계급정신을 민간인들의 생활에도 도입하고 이를 영구화하려는 예비군 장교들의 활동이다. 더 나은 민간인과 관련해선 더 큰 해악을 끼친다. 국가 및 공공 행정부의 공무원들뿐만 아니라 처벌하고 교육적인 체제21)의 공무원들도 거의 예외 없이 군대 규율, 군인 정신, 전체적으로 군국주의적 생활적 개념에 복종한다. 모든 어색한 반대운동들을 꼭 가로막는 건 아니다. 민간관료(행정)은 복종하고 부관과 하급관리들에게 동일한 “병역입영자”22)를 연계하여 확보한다. 그러므로 계급정의의 계급교육의 나무들은 군국주의의 하늘로 높이 자라는 반면23) 민주적고 자치적인 나무들은 철저히 가지치기하도록 규정한다. 우리는 현역 장교와 예비역 장교들이 문서작성에 관여하는 일은 명시적으로 금지되어 있다는 사실은 무시할 수 없다. 매우 교훈적인 가드케 사건과 더불어서 군국주의는 정신을 정복하고 손에 닿는 모든 걸 중앙적인 부서를 통제하기 위해 분투한다는 건 가장 강력한 증거이며 합법적이거나 불법적인 수단으로 영향력의 범위를 지속적으로 확장하려는 경향과 만족할 줄 모르는 과격한 성향을 확장해나가며 법적이거나 불법적인 수단들을 동원하여 권력을 열망한다.

 

민간인들에게 미치는 군사적인 다른 영향.

 

군국주의자들의 확장에 대한 열망에서 중요한 결실에는 심지어 예비군 장교들이 저지른 활동조차도 "병역입영제"라는 비참한 체제다. 순수한 국가적 목적과는 별개로 “병역입영제” 체제는

충실하고 열성적인 대리인들과 국가 및 지방행정부의 분파인 군국주의 정신의 옹호자들을 모든 국가에 전파하고자 한다. 동시에 관료기구의 신뢰와 준비24)를 기꺼이 자본주의에 “똑바로” 고정하도록 “국가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사고”를 다수의 국민들에겐 특별한 “교육적 필요”로 전달한다. “민간인 생활의 지급증명서”의 “교육적 목적”은 부사관들의 보험료에 대한 논의에선 훌륭하게도 만장일치와 대담함으로 인정되었다. 1891년 2월 독일 제국의회에선 카프리비 제국총리와 지배계급 대표들에 의해 대중교육의 국가를 이상적으로 유지하게 했으며 운 좋게도, 이전의 소지자였던 상등병이 떠나야했던 이후에 우회적으로 부사관들에게 체계화되었다.

 

그러나 교육의 결과는 너무나 빈약하다. 군국주의자들에게 가난한 마귀인 하급관리의 자리를 차지한 "병역예정자"들은 악마는 매우 열악한 봉급 받는다. 장기적로도 독일에서 아직 임관되지 못한 장교들도 프로이센의 왕25)을 위해 일하기란 불가능할 정도다. 이는 혁명을 매수하려는 끊임없는 문제다.

 

군인들의 군사적 열정이 생산되고 유지되고, 군복과 장식에 꾸며진 과시와 동시에 군국주의의 범위 밖에 있는 주민들과 군대를 모집하는 계층들의 영향을 미치거나 그 비용을 감당하고 자국의 적들에게 굴복할 "위기"에 처한 수단들을 추가로 언급해야겠다. 1906년 가을 프로이센을 방문한 영국의 전쟁 장관 할데인은 이것을 재빨리 알아차렸고 자신을 이렇게 표현했다. “군국주의를 성취하고 귀중한 현상에는 군대에 손쉽게 다가가고 전쟁을 준비하는 국가는 냉정함과 충성심을 배운다.”26)

 

군국주의는 그 정신을 전파하기 위해 상당히 다른 방식의 수단을 지닌다. 군국주의는 소비자와 생산자의 수용과 전략적 중대성이 큰 국가경제에도 영향을 미친다. 군대에 존속하는 고용인들인 생산회사의 장인들과 상인들을 전체적으로 주최한다. 장비를 필요하는 요소를 생산하거나 수송하며 군대의 막사로 옮기거나 유지하며, 모든 군인이 사용하는 요소를 때로는 전체의 공적인 생활에서 깊은 인상을 준다. 특별하게 작은 국경수비대는 더욱 강력한 규칙 제국의 지배 하에서 귀족모임의 규칙으로 국가를 처음으로 주무르도록 돕는다. 국경수비대는 군국주의에도 영향을 끼치고 착취하도록 허용하며 경악스러운 열정과 귀를 막는다. 군국주의는 재반납하며, 열성적으로 지지한다. 자본가들은 선동하는데 제국주의가 흥하는데 도움을 준다. 이름들도 알만하다. 크룹, 스텀, 에크하르트, 로워, 워크맨, 티플스커치 노벨 권력반지가 있다. 크루프는 장갑판으로 수익을 얻고, 터펠스카르체는 뇌물로 수익을 얻고 팽창된 우르만의 운임 및 화물초과료와 100% 및 150%에 달하는 파우더 링의 순익은 독일 재무부의 100만 달러를 덜어주었던가?27) 특히 오스트리아에서 납품업자들의 사기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28) 각각의 유세에는 사기꾼들의 황금 수확을 의미한다. 비단 러시아만이 아니라 기생충으로 포장하기 위해 채취된 수단들이다.29) 위대한 귀족들은 군국주의에 가장 기독교인적인 포교로 인민을 약탈하며 군국주의에 보답한다. 귀족들은 군국주의에 거룩한 망령들인 “그들” 우르만과 의존하는 모든 것에 쏟아붓는다. 혁명에 맞서서 무자비하게 전쟁을 한다. 물론 노동자들의 실질적인 물질적 흥미도 소규모의 방위공조회사의 대부분은 군대와 관련한다. 상비군 무역과 산업이 없는 국가들은 상비군을 보유한 국가들보다 덜 번영한다. 군사생산의 종사자들은 군대가 없어지더라도 경제적으로 더 나빠지진 않는다. 그러나 대부분 그들은 자신의 코끝 너머를 보지 못하고 군사주의적 영향에서 쉽게 굴복하고 반혁명은 큰 난관에 직면한다.

 

방대한 규모의 경제적으로 관계한 식량경리부, 유지공장, 의류 부서, 수리 창고, 무기 및 군수 공장, 조선소 고용주들은 군국주의에서 가장 신속하고 예외없이 그 직원들은 1904년 10월 31일, 독일 육군과 해군 행정부에서 국가의 직접 지배 하에 총 54,723명30)을 고용했으며 사회민주주의에 맞서 제국연합과 같은 반동적 애국 선동에 투입했다. 군국주의는 대부분 미끼의 수단인 냉혹한 방법으로 선전물의 표제, 장식들, 군인회관과 유사한 축회와 무리한 장려금, 심지어 노동조합을 비방하고 실제 병영 규율31)로 조직적으로 애국적인 애국주의자를 계발하고자 한다. 군사작업장에선 더욱 프롤레타리아를 계몽하고자 한다. 물론 노동계급에겐 적대적인 영향으로 인해 한계가 있으며 군사 행정부는 특히 “제국의” 선박 노동계급을 중심으로 달성한 사회민주당의 성공에 대한 환상으로 여기며 환영하지 못한다.

 

노동계급을 중심으로 사회민주당 투표가 계속 증가해야 한다면 (이를테면, 1903년 스판다우 선거에서 채택한 방해공작으로 군사작업장을 폐지하겠다는 모든 협박은 매우 순진하다. 군국주의는 노동계급에게 계속해서 근소한 임금을 지불하고 따라서 그들을 사회민주주의의 반열이 있는 한 계급의식의 발전을 방해할 힘은 없다. 국왕이 허가한 공장의 노동계급 가운데서 임금인상을 위한 잦은 운동과 군사행정부32)와 가진 무수한 투쟁을 기억하면 비관적일 수만은 없다.

 

방대한 철도, 우편 및 전보시설들은 전략적으로 자국에서 적과의 전쟁은 적의 진출에 맞서는 만큼이나 중요하다. 전략적 중요성의 이런 필수적인 요소들은 군사조직의 완전한 붕괴로 이어지는 파업에 의해 군국주의에 타격을 줄 수 있다. 군국주의에선 통신수단과 군국주의와 동맹한 생산적 관계인 철도 가판대, 역마차 공장와 관련한 공무원과 노동자 조직에게 군국주의 정신을 주입하려하고 그 시도가 얼마나 비도덕적인 방식으로 추구되는지 이유를 설명하고자 한다. “병역예정자”의 제도는 제외하고, 그 직원들은 독일의 주마다 달성된 군사법에 복종한다. 또한 독일과 프랑스의 경우33) 행정명령과 이탈리아, 네덜란드, 러시아에선34) 특수한 법적 수단으로 노동조합을 형성할 권리를 박탈하며 군국주의 국가에선 직원들의 정치적 위치와 피상적인 견해를 살펴볼 수 있다. 물론, 우리는 군국주의적 이익과는 별개로 자본주의 국가에서 통신수단의 직원들을 대체로 “국가에 대한 적대적인” 열망에 굴복하게하고 전반적인 이익이 있다는 사실은 감안해야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국가의 분투는 장기적으론 실패하며 노동운동에 어려움을 줄 수도 있지만 사실상 통신수단의 직원들은 프롤레타리아의 위치에서 낮은 임금으로 지쳐있기 때문이다.

 

교활하고도 정치적으로 규제하는 군국주의

 

 

그러므로 군국주의는 먼저 차제적으론 군대에서 등장하고, 군대에서 제도로 나아가 군국주의 및 준군국주의 기관들의 조직에서 전반적인 사회로 침투한다(통제체제, 명예로운 법정, 글쓰기 활동 금지법, 예비군 장교 계급의 "민간인 생활 보증서", 관료기관의 군사화, 끔찍한 “ 병역입영제도”. 이외에도 젊은 남성들의 방위모임, 군사모임 등은 예비군 장교 계급 및 "예비군" 제도에서 유발해서 군사화되며 해를 가한다. 또한 군국주의는 군국주의적인 정신으로 사회의 모든 공공 및 사생활까지 물들인다. 교회, 학교, 저렴한 예술 성향, 언론, 부패한 작가들의 비열한 무리와 "우리의 영광스러운 전쟁군대"를 포위하여 사회적인 후광을 얻아 생활에 먹구름을 끼게하며 집요하고 교활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군국주의는 가톨릭 교회와 함께 가장 최악의 마키아벨리주의이며, 자본주의의 모든 마키아벨리주의 중에서 가장 교활하다.

 

코페닉의 장군를 언급한 적이 있는데 군국주의 교육 방법과 교리문답, 그 결과들은 시사점을 제시한다. 이 교리에서 가장 탁월한 지적은 한 부르주아 사회에선 전반적으로 장교의 제복을 신성하게 여긴다는 사실이다. 극 중에 재소자가 진행했던 시험은 6시간 동안 지속했는데, 그 시험에선 우리의 군대, 관료제도, 프로이센에 대한 충성이 시험대상으로 제시되었다. 모든 학생들이 그 시험에서 나아가 결과에서도 선생님들의 교육에서 핵심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보고 머리카락을 곤두설만큼 놀라게 한다. 게슬러의 모자도 이렇게 자기비하적이고 고분고분한 복종으로 불멸하는 장군의 모자만큼 따르진 못했을 것이며 이렇게나 신성한 트리어의 붉은 망토도 제복에 그렇게나 헌신적인 사람들은 없었을 것이다. 이 고전적인 풍자에서 큰 효과는 군국주의 교육학의 원리를 죽음으로 몬다는 사실이다. 군국주의는 세상의 조롱과 비웃음과 함께 법원에서도 꺼저야 한다면, 현재 부르주아 사회에서 마법사의 제자를 자처하는 군국주의는 일상에서 먹는 빵과 숨쉬는 공기만큼 아깝지가 않다. 자본주의에서 강력한 집행관인 군국주의는 서로를 사랑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두려워하고 증오한다. 이들은 서로에게 다양한 이유를 대며 필수적인 악으로 여긴다. 그래서 코페닉의 교훈에는 부르주아 사회에서 따를 수 없는 사회민주주의35)와 반군국주의을 손에 쥔 강력한 선전수단으로 남을 것이다. 이들이 군국주의의 문제를 심화할수록 더욱 번성하리라.

 

쾨페니크의 장군이 장군의 역할을 해낸 것은 구스타브 투크라는 1880년대에 두툼하고 먼지가 묻고 오래된 “사회적 의미에서 확장된 군사국가”라는 서적에서 군국주의는 “민족적이고 문명적인 사회주의”이며 모든 걸 태우고, 비추며 지배하는 태양을 중심으로 심장과 영혼으로 이뤄진 미래사회를 소개했다. 이 책이 소개한 사회는 하나의 군영으로 뒤바뀌며, 그 군영은 초등학교, 대학 및 애국심을 생산하는 공장이며, 군대는 일제히 파업을 파괴하는 조직으로 변모한다. 군국주의의 새천년에 열광적인 망상은 실제로는 조직적인 광기에 불과했다. 그러나 군국주의적 목적과 방법을 흐리게 하는 모든 사고에서 자유롭게하고 이를 극도로 사고한 조직적인 광기였다는 사실은 징후적인 의미를 지닌다.36)

 

적어도 한 가지 측면에선, 지배적 성격에서 군국주의는 현재에 계급제도의 법률, 관료주의, 경찰행정, 계급적 정의와 교황주의의 종류라는 태양을 중심으로 돌며 모든 계급정치에서 은밀하게 드러나는 최종 규제자이며, 자본가 계급만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계급투쟁에서 전략, 노동조합조직과 정치조직에서도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걸 세부적으로 설명할 것이다.

 

참조.

 

1. 1891년 2월 27일 카프리비의 발언을 참보하라; 제국의회에서 당시 폰 칼텐보른 슈타카우 국방장관도 “새로운 무장, 훈련규정으로 인해 비위대장들에게 요구된 것이 크게 증가했다”고 언급한다.

 

2. 바이에른 주의 장군인 폰 자우어가 1988년 10월 말 뮌헨의 정치경제 학회에서 한 발언을 참조하자. - (베벨, 『상비군 부재』, 77쪽)

 

3. 이와 관련해서 1891년 2월 27일 독일의회에서 카프리비의 언급을 참조해보자.

 

4. 이런 "사격 자동화 장치"에 루크 하사는 비공인된 사람이 작동할 수 있으므로 위험을 초래할 수 있지만 부르주아지들의 비명도 들을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성한 존재, 즉 자본가적인 유사성만이 아니라 자신들의 봉건적인 파벌에 대한 두려움도 느낄 것입니다. 그리고 『더벅머리 페터』의 사냥꾼처럼 고통스러워하며 "도와주세요, 착한 사람들아!"라고 외칠 것이다. 이에 부르주아들은 "독일군대의 규율은 병사들이 판단할 수 없을 정도로 상승했군"이라고 헛소리한다. 라이프치히 일간지와 같은 신문이 코페닉 사례에서 기록했다. 물론, 부르주아지들도 절망적인 상황에서 군국주의라는 광기어린 파괴의 신의 자유로운 희생을 막지 못한다. 또 다른 비극적인 충돌이다!

 

5. 보건적인 측면에선 매우 심각한 문제며, 프랑스에서는 결핵과 매독으로 인한 인구 감염이 높은 수준으로 발생했다. 이를테면 프랑스에서는 독일 군대보다 결핵 환자가 5배에서 7배 더 많이 기록되었다. 한 사람은 프랑스 병영숙소는 사라져야 한다고 경고했으며, 몇십 년 후에는 프랑스의 인구 감소를 겪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6. 슈펠(Schippel)의 소책자, P. 929 참조.

 

경찰은 앞선 군대, 특히 남용을 저지른 장교들에 대해선 무력한 상태임을 유념해야한다. 더 나아가 군사적 미학으로 지속적으로 거리를 막고 도로교통을 방해하는 군사행진의 특권에 주목해야 한다. 몇 년 전에 베를린에선 이런 조롱에 대한 우스꽝스러운 거만이 극한에 이르렀으며 일반적인 위험으로까지 이어졌다. 화재 대응을 위해 출동하던 소방서 부대가 군사행진에 막혀 상황을 대처하지 못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 행진은 소방대원들이 차지할만한 자리를 내주지 않았고, 고상한 군사적 행진이 방해받지 않도록 그대로 진행했다. 이러한 행동은 후에 비난받았다.

 

7. 경찰이 도움을 주지 못하는 국가에 기록에 따르면, 전문가로 위치된다. 군대에 앞서,

특수하게 관리자들은 초과하게 전념한다. 우리는 게다가 특권을 기록하고자 하며, 군사적 관리에 따르면 자주 길가에선 더욱 길이와 랭크가 닫게된다. 교통을 간섭하고, 감각과 근거들도 없이, 물론 퍼레이드는 군사적 미학에 전달도니다. 지난 몇 년간. 우리는 베를린에서 우스꽝스럽고 과장된 지나친 흥분을 본다. 한계와 흔한 위험을. 화력군단의 부분에선 화력은 멈추고, 군사적 기둥으로 멈춰지고, 행진한다. 고상한 집안을 교란하는 걸 제외하고, 아름답고 위엄있는 명령에 주며, 후에 반대하는 행위를 한다.

 

8. 『미국의 흑인 병사들』, 1906년, P.638번, 베를린에 Lokalanzeiger의 논문을 참조하라.

 

9. 참으로 의심쩍은 성자들! 1903년의 11월의 빌제 사건, 폴바흐와 같은 "작은 요새" 사건, 도박과 샴페인 마시기에 관한 규칙, 장교들의 결투 - 장교 명예에는 훌륭한 꽃들인 브뤼에즈비츠의 살인(1896년 10월), 후에 일어난 총격사건(아렌베르그, 13쪽과 이어지는), 하름로스와 루스트랏 사건, 사진적으로 생활을 사진처럼 정확하게 묘사하는 빌제와 바이어라인 소설, 슐리히트의(반디신 백작) "일류 남자들", 예스코 폰 푸트캄어, 마지막으로, 이 소설에서 프린스 아렌베르그 스캔들을 상기해보면 된다. 프랑스의 ‘작은 요새’ 도시인 베르당은 1906년 가을에 꽤 호응을 얻었다. 물론, 군복을 신성시하는 사람들에겐 이 모든 건 재미있고 사랑스러운 약점이겠지만, 여전히도 기독교적 믿음을 굳게 고수한다.



다시 우리에겐 눈부신 최고의 국제적 연대의 선언이 여기에 있다. 영국 근위병 장교들은 서로를 채찍질하는 했다는 건 흥미로운 사례이다! 『청년 사회주의, 1903년 3월』

 

 

10. 이 부사관은 “신의 대표자”이다.

 

11. 가장 강력한 증거는 군인들의 자살 통계자료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역시나 국제적인 문제다. 공식적인 "통계"에 따르면 독일에선 1901년에 3700명 중 한 명이 자살을 했고, 오스트리아에선 약 920명 중에 한 명이 자살을 했다. 오스트리아 제10군단에서는 1901년에 80명의 군인과 12명의 장교가 자살했으며, 127명이 자상을 입거나 학대를 당한 결과로 정신을 잃고 군인의 효력을 잃었다. 동일 기간에는 같은 군단에서 400명이 탈영했으며, 725명은 고역 노동이나 엄격한 감금을 받았다! 이는 분명하게 민족 간의 투쟁으로도 악화한다.

 

12. 법에서 정한 기간보다 오래 복무하는데 서명한 독일 군인을 “말뚝”박은 사람이라 불린다. “말뚝”에는 추가 2년 복무를 약속하는 계약서에 서명하고 100마르크 (£5)의 보너스를 받는다. 이는 부사관이나 간부가 되기에 적합한 병사들을 선택한다.

 

13. 1891년 독일에서 도입했으며 (최대 1000 마르크). 이전에는 작은 지역에서만 있었고, 비정기적인 수당 지급으로 제국 내에선 선례를 확립했다. 또한 다른 국가에서도 유행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프랑스에선 계좌가 훨씬 크다(최대 4000 프랑). 부사관 학교도 여기에 속한다. - Vogel von Falkenstein의 1891년 3월 2일 제국의회 연설 참조.

 

1891년 2월 27일 카프리비의 제국의회 연설에는 아름다운 자본가이자 군국주의자의 고백으로, 그의 두려움과 욕망, 희망과 목표, 그리고 그 목표를 추구하는 방법들이 담겼다. 이 연설은 마음의 창문을 열어주며, 그의 가장 깊은 비밀까지도 자세히 살펴볼 수 있게 해준다. 연설은 “(반)사회주의법을 재도입하지 않을 조건도 내걸었는데 사회민주주의를 기반에 대항하거나 그에 대항하는 대비책을 내야한다.”는 진술로 시작한다. 이 조치 중에 하나는 부사관들에게 “민간인 예비 증명서”와 함께 보험료를 지급하는 것이었다. 카프리비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14. “프로이센에선 더 나은 교육을 받기 때문에 부사관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증가하고 있다. 책임을 지는 장교들은 부하들보다 우월하다고 느낄 때만이 그 자리를 채울 수 있다. 만약 지금 규율을 집행하는게 어렵다면, 우리는 사회민주주의에 맞서 싸우기가 한층 어려워질 것이다. 이싸움은 단순히 총을 쏘거나 찌르는 걸 의미하지 않는다. 나의 기억인 1848년으로 돌아가게 한다. 그 당시엔 오랜 기간의 교육으로 생각이 표면화되기 전이었기에 부사관들은 매우 좋은 군인들이 사회민주주의를 상대해야 하는 지금보다 조건이었다. “우측에선 옳소, 옳소”라고 한다. 그리고 극단적인 경우로 우리는 적과 싸우는 것보다 사회민주주의들과의 싸움에 훨씬 더 나은 비위원장들이 필요하다. 적들에게 군대는 애국심과 고귀한 감정들로 자신을 희생을 감내하도록 유도할 수 있지만 거리의 싸움으로 일어나는 모든 건 군대의 존엄성을 높일 순 없다. 군인들은 언제나 자국 국민들과 맞선다고 느낄 것이다. 비위원장들이 우리가 그들을 키우려고 노력해야만 우리의 우월성을 유지해야한다. 연합국 정부는 부사관 계급의 수준을 높이기를 바라며 그는 또한 비위원장들을 “국가와 끈적하게 연결된 존재”로 만들어야 한다고 언급했다.

 

이는 동시에 엘리트 병사들의 심리를 잘 묘사한 발언이었다.

 

15. “민간인 생활 증명서”는 군 당국이 부여하는 문서다. 군 당국에서 해당 인물은 현역에서 일정 기간을 복무한 사실을 증명한다. 규정된 규정에 따라 제국 및 연맹 당국에서도 민간 일자리를 제공받는 자격을 부여한다.

 

16. 어중간한 식단, 침대와 조명, 누적된 피로로 억류된 것 외에도 미개한 처벌의 영역에서

“구속”이라 불러진다. 오스트리아 군인들을 “구부러진 자세를 핀으로 고정하고” 벨기에 군인들은 국제적으로 동원된 해군 군함과 지하감옥에선 “채찍”이 사용된 것으로 잘 알려졌다.

프랑스에선 훈련상으로 제외된 프랑스 군인들에게 끔찍한 고문기구들을 “정치범”에게도 사용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902년에 출판된 “현대적인 사회주의자들 연합”이란 “백니스 군대들”의 소책자에 담긴 삽화를 참조하면 엄지 고문기구, 수갑 및 포박을 사용했으며, 조지 다르엔 브리타뉴에서 비밀리에 언급한 북아프리카에선 군사적 징계기관을 총칭하는 “비리비”가 있다. 프랑스 외인부대와 징계회사, 교도소, 고문 노동을 담당하는 회사인 de discipline, penitencieurs 및 traveux forces의 희생자들에 대해서는(데이쿠미그, "Neue Zeit", 99-100, 페이지 365 및 페이지 369)과 같이 1906년 12월 8일과 10일의 회의실 토론에선 현재에는 “비리비”를 적극적으로 규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영국의 수류탄 투척병 장교들은 높이 평가할만한 민주적 열정으로 서로에게 가하는 징계적 비난 (Jeunse Socialiste, 1903년 3월)에 대한 열의는 언급될 가치는 있다.

 

17. 군사적인 시각에서 이 모든 교육 방법들의 결과는 다른 곳에서 논의되었다. 여기선 부르주아뿐만이 아니라 무정부주의자, 준-무정부주의자들도 군대에 대한 반대로 인해서 지나친 분노의 외침을 보인 도덕적인 결과에 대해 주목하고자 한다. 안토니 프랑스의 “군대는 범죄를 위한 학교이다.”라는 지적이나, 리히트 교수는 “음주, 경범죄, 위선들은 바람직한 군대 생활의 부분이다”라고 지적했다. "manuel du soldat"에 따르면 병역기간은 “잔혹한 악행을 수습하는 과정이며”, “난폭한 행위의 교실”이며, “도덕적으로 비겁하고, 순종적이고, 노예적인 공포”를 초래한다고 전해진다. 사실, 한 군사 축제는 “국가를 유지하는” 의미로 당연하게도 취기에 취해지는 걸 쉽게 상상할 수 있다. 1906년 12월 1일의 Leipziger Volkszeitung은 목사 César가 “술에 취한 난투”라 불리는 군사모임의 축제를 언급한다. 보건적으로도 결코 즐거움을 주지 못한다. 프랑스 군대에 대해서는 기록의 p.25를 참조하라. 민주주의 국가인 영국과 미국의 상비군들의 위생 상태도 매우 열악하다. 1906-07년에는 죽은 인원들은 독일보다 훨씬 많았으며 L. M. O'Reilly 군의 의사 총장의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군대는 7.13 및 6.18 명 중 1명이 기질염과 알코올 중독으로 전 세계 어느 곳보다 더 만연하다.

 


18. 자국의 적과 투쟁을 언급할 땐, 자연스럽지만 “해외의 적을 상대하는 군국주의”에 맞서는 국제 연대의 정신과의 투쟁들도 포함한다.

 

19. 관련 자료로 장교가 직접 쓴 예나 코스트노블 “사회민주주의와 군대”와 베벨의 “상비군을 대신하는 시민군”에서 46쪽 이후에 소개된 자료들, 그리고 “사회민주당 유권자를 위한 안내서”(1903)의 33쪽 이후에 소개된 자료가 있다.

 

20. 이와 관련해서 유명한 Gaedke 사건을 참고해보자, 프러시아의 항소법원은 군국주의의 놀라운 야망을 합법적으로 인정해 세간에 알려졌다.

 

21. 의사들 중에서도 다수가 이런 압력을 받는다. 이에 대한 결과론 1894년 1월 17일자 Vorwaerts 신문의 주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압력에는 예비 군의관뿐만이 아니라 전문적인 기관에도 영향을 미치고, 이로부터 비군인 의사들에게도 압력을 가한다.

 

22. “병역 입영자”들은 독일에서 장기간 복무하거나 군에서 퇴역한 사람들이 민간인으로서 직업적으로 일할 권리를 획득하는 걸 말한다. 그들이 특정 직업에서 일할 수 있는 “민간 생활 보증서”를 얻으며, 해당 직업적으론 “병역 입영자”가 전체의 50%를 차지한다. 이들은 민간인들보다 우선권을 가진다.

 

23. 지능적인 신발장수이자 죄수였던 볼트와 대담한 쾰펜닉의 “대장”의 모험담은 자유당들에게 경고를 받았다.

 

24. 이 단어는 문자 그대로와 비유적인 의미에서 모두 적용한다! - p. 48쪽을 참조하라.

 

25. 독일에는 이런 공무원들의 조합인 “독일 군 취업 예비자 연합”이 존재한다.

 

26. 1906년 Lokalanzeiger, No. 496을 참조하라.

 

27. 프로이스터(Feuchter)의 “파우더링”, 1896, p. 25~30 참조

 

28. “군대생활의 즐거움”(“Lustig ist’s Soldatenleben”). p. 51 세부항목

 

29. 동아시아 전쟁과 관련해선 대부분의 패잔병들이 마지막 남은 곳은, 1906년 말에 큰 충격을 주었던 그루코-리드발스(Gurko-Lidvalls)의 일가가 있던 곳이다.

 

30. 해군 행정기관, 18,939명; 프러시아 육군 행정

 

31. 1906년 겨울 포젠(Posen)에서 발생한 무기 도난 사건의 경우에, 스판다우(Spandau)의 공장 노동자로 피고인은 계속해서 "장교로" 어느 정도 자신의 상급자이자 도둑이었던 포페(Poppe) 중위의 명령을 따라야 했다고 진술했다. 이는 그들은 훈련을 받았고 포페는 피고인이 소속했던 공장에서 일하지도 않았다. 진품 장교복은 코페닉(Koepenick) 대위의 불법 복장과 마찬가지로 민간인들 사이에선 그의 미심쩍은 일에 도움을 주었다.

 

32. 스판다우 공장에서 발생한 고난은 매년 제국의회(Reichstag)에서 논의되고 잘 알려졌다. 베를린 군단의 의류 부서에 관한 내용으론 1906년 8월 25일에 출판된 슈니더(Schneider) 전문지를 참조하면 된다. 프랑스 해군 공장인 브레스트(Brest), 로리앙(Lorient), 셰르부르(Cherbourg), 로쉬포(Rochefort), 툴롱(Toulon)의 내용은 1905년 11월 11일 자의 템스 누보(Temps Nouveaur) 신문을 참조하면 된다. 현재 1906년 12월, 툴롱 해군 공장의 공장 노동자들 사이에선 강력한 운동이 일어나고 있으며, 어떻게 끝날지도 예측할 수 없다.

 

33. 프랑스 정부는 이런 조치들을 공식적으로 정당화하려고 템스 누보(Temps Nouveaur) 신문 등의 반군국주의 선전에 주목했다.

 

34. 1905년 12월 2일 법률과 관련한 라이프치히 대중신문(Leipziger Volkszeitung), 1906년 12월 14일자를 참조해보자.

 

35. 미궁 속에서 크로이차이퉁(Kreuzzeitung)이 꼼지락거리는 걸 보는 건 즐겁다. 절망적인 처지에서 그들은 사회민주주의가 난관에 빠졌다는 걸 주장하며 그 관점을 바꾸려고 시도하고 있습니다. 즉, 쾨페닉(Koepenick) 공격에 혁명 발생할 경우에 사회민주주의자들이 계획한 건 세상에 너무 일찍 드러내었고, 이제 그 계획들은 실패할거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주장들을 촉발하는 건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하며, 이러한 계획들은 자본주의 질서 아래에선 절대로 실패할 수 없으며, 크로이차이퉁(Kreuzzeitung) 기사들은 그런 절망적인 노력으로 손가락을 움직일 일이 없을거란 건 착각이다. “부디 감사합니다. 우리는 아직도 군대에 의지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이 말은 쾨페닉(Koepenick)에서 용감하게 일어난 일 직후에 우리 부르주아 속물자들이 안심의 한숨을 쉬던 정직한 탄식일 뿐이다.

 


 

군국주의의 주된 죄악에 대한 상세한 내용

 

병사들에 대한 잔인한 대우, 회개하지만 고집스러운 죄인으로서 군국주의, 두 가지 모순적인 상황

 

군국주의는 어리석진 않다. 교육체계로부터 극도로 교활하게 개발된 교육체계에서 작동한다. 대중의 심리학에도 영향을 미치는 추측에서 상당한 기술을 보여준다. 고용된 병사와 인구의 최하층으로 이루어진 프레드리히의 상비군은 보다 기계적인 성격의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가병사들에게 가혹한 훈련과 타격을 주는 수단과 그 잔재들로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군대는 전체 인구 중에서 택해지며 고차원적인 지능과 도덕성을 지니며 시민적 의무의 원칙에 따라 더욱 개인에게 보다 큰 요구를 한다. 이를1) 즉시 알아차린 샤른호르스트와 그나이제나우의 군대조직은 체벌을 페지할 것을 발표해서 세간에 알려졌다. 그럼에도 악용하고, 타격을 주는 체벌과 모든 종류의 고문기술들은 군국주의의 교육체계의 장사도구를 여전히 이용하고 있음이 밝혀지고 있다.

 

군국주의자들이 병사들에 대한 학대에 대해 취하는 태도는 윤리, 문화, 인도적이거나, 정의, 기독교 및 유사한 것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편의적으로 예수회적으로 궤변적인 이유로 고려사항들을 결정한다.

 

아직도 이런 학대2)에는 군사적 규율과 심지어 군인 “정신”3)을 위협하는 비밀스러운 지하조직의 위협으로 인식하는 일은 많지 않다. 고참의 병사들이 초라해보일 정도로 야유하거나 골칫거리 신병들을 “비웃음을 사거나 굴욕하는” 대상이 되고, 저속한 표현과 모든 종류의 거친 학대, 덮치기, 찌르기, 두들겨 패기 등이 있다. “사람들을 공중에 던져 떨어뜨리거나” “의식을 상실할 때까지 사람을 끌어다니는 것”도 있다. 이러한 일들은 하급 장교들과 심지어는 군인들과 거리를 축소하고 편협한 정치가로 훈련된 상관들의 대부분으로 양심의 가책도 없이 심리적으로도 승인한다. 실제로 이러한 일들로 장교와 상관들에겐 필수적으로 치부한다. 이런 과한 일들에 대항하려고 할 때마다, 그 사람은 첫째로 단호한 수동적 저항을 마주한다. 매일마다 상급자들이 “동기”들에게 인간의 존엄성에 어울리는 방식으로 대우하는 걸 요구하는 걸 멍청하게 지껄이는 인도주의적 속담이라고 비난하면서 목소리를 높이진 않고 그들끼리 비밀스럽게 말하는 걸 들을 수 있다. 군 복무는 힘든 복무다. 하지만 지하에서 진행하는 규율적인 학대의 위협을 보더라도, 강압적인 체제는 자연적 발전의 길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단계마다 모순적인 상황에 자연스럽게 휘말린다. 이런 모순적인 상황들 중 일부도 이미 밝혀졌다. 더 상세한 내용은 후에 서술하겠지만 군국주의 교육에서 학대의 방법에는 발생하는 훈련의 필수적인 도구 수단이다. 자유의지에 기반한 규율은 자본주의에선 도달할 수 없다. 군사주의 교육에서 학대는 양심의 가책과 후회에도 불구하고 공식적이거나 준공식적으로 필수적이면서도 불법적이다.

군국주의자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양심이 나쁘다. 무자비하게 사회민주주의적 비판들은 군사 조직과 중산층의 넓은 계층들을 군국주의 도덕관을 후퇴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군국주의는 최상의 사령관들도 연출된 무대를 선보이고 지휘하는게 아니라, 폭도들의 대표회의 기구인 제국의회의 대리인들조차도 물질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악당”들에게 의존하게 한다. 군국주의는 자신의 노출을 수 차례나 잔인하게 드러냈으며 “제국의회”에 면제와 보호를 받는다. 군국주의에선 그 자신의 분노를 억제하면서 비천한 사람들을 데려다 모은 “제국의회의 동료들”은 공공연하게 경멸하고 멸시받는 대중의견을 기분 좋게 유지해야 한다고 본다. 군국주의자들은 부르주아지들이 주장하는 모든 성과의 대상인 군사적 믿음이 아니라, 특히 금융적 압박이 있는 시기에는 빈번하게 반대를 주장하는 부류이기도 하며 생활양식에서 대부분은 반군국주의 계급에 속하지만 자신들의 계급 위치를 인식하기 시작하면 전향할 수 있는 유권자들에 대해선 즉시 사회민주주의자가 될 수 있다. 그래서 군국주의자들은 사회민주주의 선동에서 가장 효과적인 무기를 박탈해야 했기 때문에, 군국주의자들은 은폐하고 얼버무리는 전략을 따랐다. 군사법정의 절차는 비밀리에 개최했으며, “군국주의자의 어두운 심장에는 한 줄기의 빛도 스며들지 않았다.” 한 줄기의 빛이 스며들었더라도, 군국주의자들은 분쟁을 최대한 부인하고 반박하면서 사실을 속이고, 꾸미려고 할할 것이다. 그러나 사회민주주의자들의 횃불은 군사 수용소와 요새의 문 뒤의 창살에서 빛을 내기 시작한다. 지난 80년대와 90년대 세기의 제국의회에서 발생한 군사 토론은, 군국주의의 정기적이면서도 빈번하거나 일부는 유기적인 특징을 띠면서 고립적인 사례로 출현하는 현상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위해 열렬하게 싸웠다. 이 다툼에는 타국의 군사재판 절차가 공개적으로 진행되어 군사적인 학대가 군국주의의 일반적인 속성이라는 걸 입증하는데 더욱 쉬웠으며 증거를 제공했다. 군국주의에서 군사학대는 프랑스 공화국의 군국주의, 벨기에 군사주의, 그리고 더욱 증가하는 스위스 민병대의 군국주의의 특징이기도 하다. 사회민주주의적 비판으론 1891년 6월 8일년에4) 작센의 게오르그 왕자(Prince George of Saxony)의 법령과 1892년 초에 포워츠(Vorwaerts) 신문에 발표된 12월 13일 바이에른 군부에게 각인을 준 것에 큰 승리를 거두었다. 또한 1892년 2월 15일부터 17일까지 이어진 제국의회 회의에서도 그랬다. 또한 일반적인 "고려사항"들과 각종 논쟁으로 결국 1898년 군사형사 절차 의 개혁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 개혁은 여전히 언론의 공개를 제외하는 수단으로 군국기지에 대한 끔찍한 비밀을 기독교적인 사랑의 망토로 걸도록 했다. 모든 학대의 대비책과 빌제 사건을 재판한 판사들이 취했던 매우 주목을 끈 조치에도 불구하고, 개혁은 곧 학대의 끔찍한 사례들이 나오면서, 사회민주주의적 비판들 제기하고 반대했던 모든 끔찍한 학대에 대한 사례들은 군국주의에 먹구름이 낄 정도로 터져나와서 단순하게 밀어낼 수 없었고, 군인들의 고문은 군국주의에서 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일부라는 사실은 마지못했더라도 거의 사방에서 인정했다. 군국주의자들은 사회민주주의의 정치적으로 활동에 유리한 통제를 부르는 제도와도 조금은 부정직하게 대립하고자 했다. 군국주의자들은 사회민주주의가 성공을 성취할 것이라고 믿지 않더라도, 군국주의자들은 이를 제거하기 위해 혈안이 될 준비가 되었다는 인상을 주고자 했다. 군국주의자들도 군인들을 고문하는 가해자들에게 상당히 철저하게 기소하려 했지만, 군국주의에게 있어서 군대에서 발생한 학대에 대한 다툼에는 군사 규율을 유지하고 민족과 국제적 관계에 대항하기 위한 사람들의 무장을 강조하기보다도 덜 중요하다. 이를테면 군인들에게 가하는 미약한 위반사항으로 인해서 거의 자주 상급자를 자극하거나 감정에 취한 상태로 상급자에게 범하는 행동에 대해 내린 판결과, 흔한 유형으로 군인 가해자들에 대해 내리는 판결을 나란하게 놓으면 된다. 한편으로는, 군국주의에선 신성한 원칙에 대해선 가장 경미한 위반조차도 피에 굶주린 용과 같이 엄격하게 처벌한다. 반면에 군인들이 불공정하고 잔인하게 대우를 받은 경우에는, 범죄 행위의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관대하고 방조하고 묵인한다. 그 결과로는 군사법원의 군인 학대에 대한 노력들은 하급자들이 독립의식이나 평등한 권리의 자각들에 대한 모든 요구에는 냉혹한 억제도 함께 이루어지기 때문에, 실제로는 거의 결과를 산출하진 않는다. 작센 마이닝엔에서 세속된 귀족은 모든 걸 설명한다. 그 귀족은 병사들에게 학대에 대한 투쟁을 지원하도록 호소했으며 더욱 강한 의지로 이 문제의 악의 뿌리를 해결하기 위해 평소보다 더 적극적으로 지원할 걸 요청하는 용기는 지녔다. 그러나 이런 대담한 행동으로 인해서 이 귀족은 곧 군대에서 퇴역을 강요받았다.5) 이 사례는 군대 내의 학대 문제와 관련해서 공식적으로 시도된 노력의 부정과 허무함을 타오르게 조명했다.

 

우리의 동료였던 전 바이에른 군인인 루돌프 크라프(Rudolf Kraff)가 쓴 카잔의 희생자들(막사의 희생자들)이라는 책은 귀중한 자료를 담았으며, 전문적인 기술로 구성했다. 그 책은 그가 직접 체험한 일들을 바탕으로 작성했다. 또한 해군에도6) 시험적으로 제작해서 일부 기간 동안에 방대한 자료를 공개해서 배포할 수 있었지만 아쉽게도 아직 정리하진 못했다.7) 이 작업은 누군가가 해낼 수 있는 중요하고 유용한 작업이다.

 

 

우리는 기본 원칙에 따라 군국주의에 대한 환상을 품지 않는다. 군사적 처벌에 대해서 샤른호스트 법령은 다음과 같이 의사를 밝힌다. “군사적 경험은 신병을 갈굼 없이 훈련하는 방법을 배운다. 이를 비현실적이라고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장교는 병사를 가르치는 데 필요한 능력이나 확실한 개념은 부족하다.” 물론 이론적으로는 사실이지만 실제로 적용해보기엔 너무 진전한 시기였다. 군사적으로 군인에 대한 학대는 자본주의적인 군국주의의 내적인 본질에서 기반한다. 인적 자원에서 대부분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도 군사적 요구를 충족할 순 없으며 특히 열병식 훈련의 요구를 충족할 수 없다. 프로이센에선 군사 정신에 적대적이고 위험한 생애를 바치고자 군대에 입대하려는 젊은 사람들이 점차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이는 과거의 영혼을 씻어내고자 “동료”와 왕에게 충성하는 새로운 애국적인 영혼을 이식한다. 모든 문제에는 가장 숙련된 교관조차도 해결할 수 없으며, 군국주의가 처분할 수 있는 종류의 교관들조차도 군국주의는 생각보다 더 경제적이고자 한다.8)

 

그리고 이런 군 교관들은 생계를 보장받지 못한다. 그들의 상사에 친선과 독단에 전적으로 의존하며 상사들은 중단하고자 한다면 언제든지 해고를 예상할 수 있다. 상사들의 주요 업무는 군국주의의 인상들을 대중들에게 유행하고자 하며 이 업무는 군 상급자들인 장교 및 부사관들의 권위적인 명령의 손에서 매우 순응하게 하는 전반적인 전체적인 조직체이자 훌륭한 수단이다. 그런 상급자들은 곧 “내 명령을 거역하면 폭력을 사용하겠다.”로 축소한 신경질적이고 가차없이 부하를 훈련하고자 한다는 걸 알 수 있다. 결국 절대 권력을 가진 상급자는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는 부하들의 생명까지도 학대하는 방법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건 자연스럽고 인간적으로 필연적인 귀결이었으며, 갓 구워진 일본의 군국주의도 그 자체로 매우 신속하게 여기에 연루했다.9) 군국주의는 또한 이 모순적인 환경에 그 자신을 처한다.

 

이런 "음탕한 재미"의 원인은 모든 곳에선 동일하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교육 수준을 강력하게 수정하고자 영향력을 미친다.10) 프랑스 식민지 군국주의조차도 프러시아-독일 조국의 군국주의와 유리하게 대조한다는 사실은 놀랍지도 않다.11)

 

 

이러한 체제에 내재하는 불가피한 폭력의 유형을 징계 조치로 대처하는 건 우리에겐 군국주의에 성공적으로 투쟁할 수 있는 훌륭한 수단을 제공한다. 군국주의에 반대하는 대중을 더욱 늘리고 아직은 군국주의와 투쟁하는데 접근했거나 접근하기가 어려운 계층과 계급의식을 확산해서 투쟁에 일격을 가하는 수단이다. 군국주의적 계급 정의관과 결합한 군사적 학대는 문화적으로도 낙후된 자본가들의 조짐 중에 하나다. 군사적 학대는 동시에 군사적 규율에 대한 지하조직에 위협을 줄 수 있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해방을 위한 투쟁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무기이기도 하다. 자본주의의 죄악은 이중권력으로 그 자신을 떠넘긴다. 그리고 그 죄인은 정직하게 낙담해서 무력감이나 교활한 여우처럼 뉘우치려할 수 있지만 우리는 이 무기를 빼앗길 순 없다. 참회복과 십자가의 잿더미로도 뉘우치려는 녀석을 구원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군국주의의 비용, “고통스럽거나” 아니면 모순적인 처지.

 

변증법적 진화가 알려준 역사적 유물론에는 보복이 필연적으로 내재한다고 알린다. 모든 계급 사회에선 불우하게도 자살을 저지르며 모든 계급 사회에선 항상 나쁜 걸 원하거나 좋은 걸 행하는 힘이다. 모든 계급 사회는 그 계급적 성격을 상속한 죄로 파괴로 인해 죽음을 맞이한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모든 계급 사회는 오이디푸스를 배출하여 언젠가는 파괴한다. 그리고 테베의 전설과는 달리, 그런 사실을 완전하게 의식할 것이다.

 

이 사례는 존속살해한다는 걸 인식하지도 못하는 자본주의 사회 질서와 프롤레타리아에게도 적용해볼 수 있다.

 

자본가들은 물질적 이익을 지키기를 원하는 자본주의 사회 집단과 노동자 계급에게 이러한 말이 적용됩니다. 확실히, 확실히 자본주의의 지배 계급은 물질적 이익관계에 동요 없이 유지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런 냉정에는 자본주의 경쟁, 국내 혹은 국제적으로도 관계없이 용인할 수 없으며, 자본주의가 고문을 가하는 사람들의 가죽의 끈을 벗겨내듯 장기간 맛을 내진 못한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임금 노예와 이윤의 성역을 보호하고자 무기로 무장해 끔찍한 강압적 지배의 성채를 세운다. 군국주의는 자본주의에게 매혹적인 부분이지만, 대조적으로 실제로는 군국주의가 초래하는 방대한 비용에는 자본주의에게 매우 불쾌하다. 그러나 오늘날은 예전 카드무스의 권고에 따라 이를 깎아내는 것이 더 이상 어렵기 때문에, 무장한 군인들의 큰 희생을 요구하는 몰록적인 본성을 받아들여 자본주의의 탐욕을 충족하고자 한다.

 

 

의회는 군국주의의 자산인 병사들의 큰 희생을 삼아 지배계급들의 예산 논의가 이뤄지는 장소다. 초과가치를 생산하는 자본주의는 다시 재정적인 부분에서 기본적으로 약점에서 타격을 받을 수 있다.

 

군국주의에 드는 고가의 비용에는 적어도 자본가들이 비용을 직접 부담하기에 적어도 제한된다. 사실 자본가들의 도덕성은 여기에서 편리하면서도 비열하게 폭리를 취하면서 대비책을 찾아내고 성공하고자 한다. 자본가들은 군사적 부담의 대부분을 차지하거나 적어도 일부는 가장 약하면서도 학대받는 인구 계층의 어깨에 부담을 짊어지게 하고 괴롭게하려는 건 군국주의가 착수하려는 목적이다. 자본가 계급들은 이외의 사회체제에서 지배계급들과 마찬가지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착취에 기반한 강압적 지배로 억압 받고 착취된 계급의 사슬을 생산하며 그에 따른 비용을 지불하고자 한다. 이 비용을 지불하고자 군국주의는 한 사람들의 자녀가 사람들의 학대자로 바뀌는 걸로는 충분하지가 못해서 학대자들의 임금조차도 최대한으로 평범한 사람들의 땀과 피에서 짜내고자 한다. 그리고이 교묘한 속임수로 피비린내나는 자극적인 행위를 여기저기서 감지하더라도 자본주의는 황금 송아지에 대한 믿음, 그러니까 돈을 숭배하는 믿음에 죽도록 충실하다.

 

가난한 계급들의 어깨에 군사적 부담을 짊어지게하거나 떠넘기면서 가난한 계급을 착취하지 못할 정도로만 그 정도를 낮아지게 할 순 있다. 그러나 어떤 궤변들도 사실을 제거할 수 없으므로 이 사실은 착취를 선호하는 자본주의에 따르는 큰 희생들과 투쟁하는데 이로울 수 있다.

 

군국주의는 생계의 전체에 비중을 둔다. 그러나 군국주의는 특히 경제적 부담, 경제생활에 신음하는 걱정거리들로 국가적인 최고의 기운들과 미쳐있는 지출로 생산과 문화적 노동을 중단하게 하고 직접적으로 매년 경제적 부담을 거듭하도록 해서 그 피를 빨아마시는 흡혈귀다.

 

현재 독일에선 대부분 20~22세이면서 655,000명12) 정도가 생산에 가장 적합한 최강의 남성들인 영구적으로 실직했다. 이를테면 독일에서는 1906-7년 기준으로 군사 및 해군 지출이 급증하여, 약 13억 마르크, 65백만파운드13) 또는 대략 13분의 1백억 마르크였으며 여기에는 식민지에 대한 추가적인 지출을 포함하진 않았다.14) 이외의 군사 국가들의 군사 예산도 역시나 비교적으로 가벼운 편은 아니었으며, 이를테면 특혜를 더 누리는 미국 연방이나 영국의 (1904-5년 기준으로 육군과 해군에 13억21만 마르크, 66백만 파운드) 국가에서 군사 예산도 예외는 아니었다. 벨기에와 스위스도 군가예산의 지출에 군사비용은 막대한 부분을 차지해서 예산 내에서 중요한 항목 중 하나다. 이런 비용의 증가적인 추세는 전 세계적으로 나타났으며, 지출의 한계치에 도달할 때까지 계속 증가했다.

“새로운 병사 개론서”(Nouveau Manuel du Soldat)의 선집은 참고해보기에 매우 좋다.

 

 

"1899년 유럽은 군사 예산으로 71억 8,432만 1,093프랑(약 2억 8,737만 파운드)을 비용이 들었다.

 

군사적 분야에서 고용된 인원은 4,169,321명이었다.

이들이 노동할 경우 하루에 한 사람 당 3프랑의 소득을 얻을 수 있으므로, 노동할 때의 하루 소득은 1,250만 7,963프랑(약 50만 3,180 파운드)이다.

게다가 유럽은 군사적 목적으로 71만 342마리의 말들을 필요로 했다.

유럽에선 말 한 마리가 하루에 2프랑의 가치를 얻을 수 있다.

이들의 하루소득의 가치는 142만 68,4프랑(대략 5만 6,827 파운드)이다.

이를 300으로 곱하고 예산을 더해보면, 생산적 가치 손실은 1,136억 2,915만 9,913프랑(약 4,545억 1,634만 파운드)이다.

 

하지만 1899년부터 1906/1907년까지 독일의 군사예산으로만 약 9억2천만 마르크(46,000,000파운드)에서 약 13억 마르크(65,000,000파운드)로 40% 넘게 증가했다. 유럽 전체의 총 군사 지출액은 현재로선 대략적으로 다음과 같다.

 

130억 프랑(52백억 파운드)에 해당한다.

 

이는 러시아와 일본 전쟁에서 지출된 비용을 제외하고, 세계의 외교무역에서 약 3%를 차지하며, 실제로는 파산으로 끝내야 할 거래 방식이다.

 

러시아 발트해 연안 지방에서에서 혁명적인 운동들에 대한 군사적 탄압은 혁명 운동은 혁명에 휘말린 남작들에게도 장기간 이전했다. 따라서 미국에서도 평화로운 시기에 자본가 계급에게 일부 자본주의적 질서를 유지하는 걸 맡길 수 있는 무제한적인 기회가 생겼다. 이는 계급투쟁에서 즉각적으로 고용된 법적 기관인 핑커톤(Pinkertons)의 수단이기도 하다. 벨기에의 방위군과 법적 기관은15) 군인 학대, 지출을 수반하고 군국주의를 동반하는 현상에서 부르주아들이 그토록 부정하는 경제적 비율을 조정한다는 이점이 있다.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에선 그 적들에게 부분적으로 매우 효과적인 선전물을 허용하지 않게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엔 어려움이 있다. 앞서 언급했지만 이는 프롤레타리아를 기쁘게 할 수 없고, 자본주의 국가에선 은폐하는 규칙이다. 전망적으로 경제적 관점에서 볼 때 부담이 적은 민병대 제도를 채택해서 자국의 군대에 대한 정치적 임무인 계급투쟁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지만 사실은, 군대가 수행하는 이 기능은 민병대를 제거하려는 분명한 경향을 보여준다.

 

1906-7년도의 독일 제국의 총 지출액인 2,397,324,000프랑 (119,866,200파운드)와 군대와 해군에 쓰이는 비용을 비교해보면, 이 거대한 부분과 반대해서 이외의 모든 항목이 위성의 역할을 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전반적인 과세 제도와 재정 정책은 군사 예산을 중심으로 군사 예산은 태양 주우의 별들처럼 대규모로 이뤄진다.

 

그래서 군국주의는 현재의 사회 질서에 이익이 될 수도 있는 문화 발전에 위험한 방해물이면서도 무덤을 파는 원인이기도 하다. 학교, 예술과 과학, 공중보건, 통신 체계 등 이 모든 걸 가장 비열한 방식으로 치부하는데에는 잘 알려진 구절을 빌리자면 몰록의 탐욕이 문화적 과제에서 무엇도 남기지 않기 때문이다. 한 장관은 “문화적 과제로 괴롭지가 않는다.”고 언급했다. 장관의 언급에는 문화에 대해 제한된 요청을 한 동유럽 융커들에게만 진심 어린 승인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언급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외의 대리인들은 역설적이게 웃음을 내지었다. 1906년 독일이 군사비용으로 지출한 13억 3천만 마르크(66,000,000파운드)와 프로이센이 1906년 모든 종류의 교육에서 지출한 1억 7천 1백만(8,550,000파운드), 오스트리아-헝가리에서 1900년 군사적 목적으로 지출한 4억 2천만(21,000,000파운드), 초등학교에 지출한 5백만(275,000파운드)을 나란하게 놓으면 충분하게 알 수 있다. 최근의 프로이센 법률로 학교 유지 및 사소한 문제와 선생들의 임금노동에 대한 급여 문제를 규제하는 방식만큼이나 마을에서 선생들의 임금노동에 대한 급여를 인상하지 못하도록 한 스투트(Sudt’s)의 악명 높은 법령은 많은 걸 전해준다.

 

 

독일에선 문화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부유할 수 있었다. 그리고 더욱 문제를 해결할수록 국가에 드는 비용을 지불하는게 더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군국주의라는 장벽은 그 길을 차단했다. 군사비용의 지출은 독일과 프랑스에서 군사비용을 충당하는 방식으로 특히나 역겹다. 군국주의는 억압적이고 부당하게 간접적으로 조세 제도의 창조자이자 유지자이다. 전반적인 제국의 관습과 조세 정책으로 대중을 착취하고자 하며 융커사회만이 아니라 매우 방대한 규모로 군국주의의 이유를 대면서 다정하게 간청하고 부름을 받는 기생적인 계급의 일원을 확보하고, 군국주의의 주된 목적을 제공한다. 주로 조세 정책은 군국주의 때문에 발생한다. 예를 들어, 1906년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의 생계비를 1900-1904년 평균과 비교하면 10~15% 상승했다.

 

다시 우리는 합리적인 자본주의가 그 자신의 이익을 지적으로 의식해서 확대와 개선을 최선의 이익으로 삼고 통신 체계의 교통과 기술의 발전이 요구하는 해답을 충족하지 못한 군사주의에 감사하다. 군국주의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특수한 간접세를 부과하기 위해 손쉬운 돈줄인 통신 체계를 젖소로 이용한다. 스텡겔(Stengel)이 소개한 마지막 제국의 재정 법안에 대한 이야기는 장님도 눈을 뜨게 할만하다. 이 법안에는 군국주의가 국가의 재무부에 다시 두드린 2억 개의 구멍을 메울만한 청구서를 필요하다는 걸 한 푼으로도 계산할 수 있다. 그리고 대중이 소비하는 맥주, 담배 등과 자본주의의 활력을 유지하는 공기인 수송은 조세 법 체계에서 무거운 부담을 주면서 위에서 언급한 내용에 대한 훌륭한 삽화다.

 

군국주의가 여러 측면에서 자본주의를 부담스럽게 하는 건 의문의 여지가 없지만, 이 부담에는 선장 신밧드에서 바다의 노인이 목을 매달렸듯이 자본주의라는 목에 단단히 달라붙어 있다. 전쟁 중에는 스파이가 필요하고 평화적 시기엔 교수형 집행자와 고문 담당자가 필요하듯이 자본주의는 군사주의를 필요로 한다. 자본주의는 군국주의를 싫어하지만 군국주의 없이는 살 수 없는 것처럼, 마치 교양 있는 그리스도인은 복음에 어긋난 죄악을 싫어하지만 죄를 짓지 않고는 살 수가 없는 것과 같다. 군사주의는 자본주의의 유전된 죄악이며, 자본주의는 사회주의의 연옥에서만 그 죄악을 제거할 수 있다.

 

경제 투쟁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맞서는 수단에서의 군대. 예비 발언.

 

앞서 군국주의가 어떻게 정치, 사회 및 경제 생활에서 도는 축이되었고, 군국주의가 자본주의 인형극의 인물을 춤추게하는 배후의 조종자가 되는지도 살폈다. 군국주의의 목적이 무엇이며,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어떻게 노력하고, 그리고 그걸 추구하는 과정에서 본성적으로 죽음을 초래할 독극물까지 생산하는 취미가 있었는지도 살폈다. 또한 군사주의가 남성적인 견해를 형성하고 민간인들만이 아니라 제복을 입은 사람들의 머리에 군국주의자의 사상을 주입하는 학교와 군국주의를 수행했지만 그다지 성공적이지 않은 국가의 유지하는 역할에 대해서도 논의했다. 그러나 군국주의는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평화로운 시기인 현재에도 다양한 방향으로 국가 유지에 대한 영향력을 위해 분투하고 있다. 군국주의는 오랜 기간 견습생으로 복무한 후 자신의 걸작을 내놓을 최후의 날을 위해 훈련하고 준비하고 있다. 거대한 격변의 날, 자신의 스승과도 맞서기 위해 뻔뻔하고 반항적으로 견습생과 여행자로 오랫동안 봉사한다.

 

 

군국주의의 경호원들은 내일이 아니라 오늘, 그 위협에 맞서고 싶을 것이다. 내일이 아니라 구름은 더 확실하게 폭우로 변해서 사회민주주의가 침수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날은 왕과 조국을 위해 마음껏 학살하고 총알과 파편으로 대학살할 것이며, 신의 원조를 받아 1905년 1월 22일과 1871년 5월의 피의 주간에 군국주의에 알맞은 모범을 채택할 것이다. 비엔나 군단 사령관 쇤펠트(Schoenfeldt)는 1894년 4월 한 만찬에서 부르주아들에게 다음과 같이 맹세했다. “사회의 존립과 애써서 번 재산의 향유가 위협받고 있을 때 당신들도 우리를 찾을 수 있으니 안심해도 좋습니다. 부르주아가 최전선에 있다면 군인은 그를 돕기 위해 서두릅시다!”

 

따라서 쇠사슬로 장갑한 주먹은 늘 큰 타격을 가할 준비가 되었다. 위선자들은 “법과 질서 수호”, “노동의 자유 수호”에 대해 말하지만, “억압 보호”, “착취 보호”를 의미한다. 프롤레타리아트가 과도한 활기를 보이거나 힘을 쥔 군국주의가 한꺼번에 나타나면 칼을 휘두르며 겁을 주려고 한다. 이 전능한 군국주의는 국가 권력이 노동자에 대해 취하는 모든 행동의 배후에 있으며, 최후의 수단으로 천하무적의 힘을 공급한다. 군국주의는 경찰과 헌병대의 선봉대 뒤에 숨어 큰일을 대비하는게 아니라, 자본주의 질서의 기념비를 보강하기 위해 그 목적을 충분하게 의식하면서 매일의 노동에도 항상 도움을 줄 준비가 되어 있다. 교활한 자본주의적 군국주의는 다양하게 활동하고 교활하게 특정한다.

 

자유 노동자들의 경쟁자로서 군인들.

 

자본주의의 하수인인 군국주의는 자신의 첫 번째이고 가장 신성한 의무가 자본가들의 이윤 축적을 돕는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따라서 비인간적인 착취와 잔인함으로 인해 농업 노동자가 부족할 때 이를 돕는 짐승 같은 군인을 고용하는 계급이나 유별난 융커계급의 처분에 맡기는 걸 공식적으로 또는 준 공식적으로 정당화하거나 심지어 구속할 수 있다고 느낀다.

병사들에게 추수감사절에 모여서 수확하는 건 노동의 관계에 해롭고 적대적으로 거듭한 규칙적인 관습이다. 또한 장기복무를 순전히 군사적 필요에 따라 간주해서 병사들의 거위 행진과 열병식의 광신자들에게서 대단히 파렴치하고 어설픈 사기를 명백하게 드러내며, 이는 예나 이전에 소대조직에 대해 아첨했던 회상들 외에는 누구도 부를 수가 없다. 이를테면, 대다수의 논의가 있던 총사령부의Ⅰ16), IV, X17)와 XVII의 사단에 대한 법령을 상기해볼 수 있다. 1906년 프로이센 군단. 우체국과 철도의 교통량이 증가 할 때 군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한 다수의 사례도 여기에 속한다. 범주에도 속하지만 그 목적은 훨씬 더 깊다.

 

군대와 파업파괴자.

 

군국주의는 군인들을 군 지휘 하에 파업 방해자로 고용하고 해방을 향한 노동자들의 열망을 직접적으로 방해하고자 한다. 최근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모략에 반대하는 제국주의 연합”의 현 사령관인 폰 리베르트 중장이 다시 전면에 나선 사례를 상기해보자. 그는 이미 1896년에 일반적인 대령으로 파업이 화재나 물부족 사태와 같은 공공적인 재난이라는 사실을 파악했는데, 물론 그 자신을 수호천사이자 집행자라고 여기는 고용계급에게는 재앙이었다.

 

1906년 뉘른베르크 파업에 적용했던 이 방법은 독일에서 특히 악명이 높았다. 이 방법에서 기한을 채운 군인들은 부드러운 압력으로 파업 방해자에 소속해서 사회민주주의자들과 부딪쳤다.

 

독일의 밖에서 발생했던 세 가지의 사건은 훨씬 중요하다. (1) 1903년 1월에 네덜란드의 철도 총파업 기간 동안에 군대를 동원해 대규모의 “검은색 타이즈”들은 진압하고자 했다. 이 파업의 결과로 철도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할 권리를 법적으로 박탈했다.18) (2) 1904년 헝가리 철도 노동자들의 총파업의 경우에 군사행정은 더 심했다. 군사행정은 법에 어긋나게 현역에서 복무하는 사람들을 구성해서 파업파괴자(Black Legging)들을 고용했을 뿐만이 아니라 그 색채를 유지한 채로 복무기간이 끝난 예비군과 예비역들을 소집하는 걸 부끄러워하지도 않았다. 기술적으로 적합한 사람들을 불러내서 칼을 휘두르며 철도 노동에서 파업 파괴자로 노동을 강요했다. (3) 그리고 마지막으로 1907년 1월 3일에 선언한 불가리아 철도 파업의 투쟁은 덜 알려졌고, 1906년 12월 초에 헝가리에서 농업부 장관과 전쟁부 장관은 농업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파업할 수 있는 권리와 투쟁할 때 이를 방해하고 수확을 거두고자 “파업파괴자”(검은색 타이즈)들은 조심스런 훈련을 앞세워 가담했다.

 

 

프랑스에서도 군인들의 “파업파괴자”들은 잘 알려졌다.19) 군사 교육은 “검은색 타이즈”를 체계적으로 기꺼이 조성하고자 했고, 현역 군대를 떠난 노동자들은 계급적 동지들의 등을 뒤에서 찌를 준비를 마쳤기 때문에 타오르는 프롤레타리아에게 위험할 수 있다는 사실은 국제적인 군국주의가 취득한 일부다.20)

 

파업에서 무장할 권리

 

예전부터 모든 군사 기관들은 자본주의의 진리로 파업의 이면에 혁명의 히드라가 고개를 든다는 소문에 홀렸다. 경찰들의 주먹, 칼, 권총만으로 소위 말하는 과도한 파업에 즉각적인 결과에 소용이 없다면 군대는 고용주에 대한 반란으로 노예들을 날카로운 칼과 장전된 소총으로 겁을 줄 준비를 마쳤다. 이는 모든 자본주의 국가에도 해당하며 본성적으로나 전반적으로도 자본주의적이지도 않고 특수한 정치적, 문화적 조건으로 인해 그렇다고 아직은 전형적으로 간주할 수도 없는 러시아는 적어도 가장 큰 규모에 해당한다. 그리고 여기에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가 비록 선두에 서있다고 하더라도, 영국을 제외하고는 군인들이 파업을 분쇄하고자 고용계급의 손을 열렬하게 흔든 국가는 어디에도 없었으며, 벨기에와 프랑스 같은 준 공화주의 및 전반적인 공화주의 국가들에서도 군인들이 그토록 피에 굶주리고 잔인한 방식으로 행동한 곳도 없었다는 걸 거듭해서 지적하는 건 자본주의 정치경제의 노선에서 공화주의 국가의 유형을 역사적으로 평가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 이에 비하면 세계에서 가장 자유로운 국가인 스위스와 미국은 스스로를 그나마 잘 유지할 수 있었다. 물론 러시아는 서로다른 측면에서 잔혹한 행위에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다. 야만, 아니 그보다 더 야수같고, 흉포한 러시아 지배 계급의 일반적인 문화적인 상태를 가르킨다. 군국주의의 야만에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처음으로 무고하게 동요하기 시작해서, 절망적이고 극도로 필사적으로 안도의 눈물을 흘리며 구제를 호소하던 평화로운 노동자들의 피들을 그야말로 급류로 씻어내렸다. 여기서 단일한 사건을 하나씩 거론할 수가 없는 이유는 그렇게하면 시공간에서 끊임없이 이어진 이 무한한 사슬을 자의적이고 사소하게 하나의 고리만으로 분리하는 건 무의미하게 찢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제적 자유를 위한 투쟁에서 서로다른 모든 유럽 국가는 흘린 피의 방울마다 전제군주제인 차르주의는 노동운동의 가장 겸손한 포부를 억압하고자 프롤레타리아의 삶을 빼앗았다.

 

식민지 군대의 활동과, 가혹한 착취로부터 굴레를 씌우는 식민지에 대한 지배를 거부하는 원주민들에 대한 보호 부대의 활동에는 군사력 적용의 방법과 본질적으로 연류한다. 하지만 이 질문에는 더 상세하게 다룰 수는 없다.

 

군대와 헌병대, 경찰 사이에 명확하게 구분하는 건 어렵다. 그들끼린 손에 손을 잡고 서로를 대체하고 보완하며, 여기서 작용하는 바로 그 특성, 즉, 공격적인 폭력성, 무례하고 악랄한 방식으로 진압용 무기를 들고 사람들을 덮칠 준비를 마치고 밀접하게 연류한다. 경찰과 헌병대의 주요 특징은 막사생활의 주된 산물이며 군국주의 교육과 훈련의 결실이다.

 

이탈리아

 

오타비오 디날레는 이탈리아의 노동자 대학살에 대한 두 개의 교훈적인 기사를 함께 게재했다.21) 그는 거리에서 발생한 대학살만이 아니라 파업과는 별도로 경제적 투쟁에서 노동자들의 시위와 관련해서 계획한 학살에 대해서도 다루었다. 이 기사에는 이탈리아 군대가 얼마나 빠르게 현장에 도착했고, 군대가 무방비 상태에서도 군중에게 극도로 엄격하게 그토록 공격하고자 시덥잖은 이유를 대는지, 군대가 군중이 해산하거나 도주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발포하고 타격하는 걸 강조하고 그는 이탈리아에서 “왕의 총알”들로 매년마다 다섯 번, 여섯 번, 심지어 열 번이나 이탈리아 노동자들을 불구가 될 정도로 뼈를 박살냈다는 걸 설명한다. 그는 학살의 원조인 이탈리아 부르주아지는 대학살에서 전 세계적으로 가장 반동적이고 퇴보했으며, 부르주아지들의 눈에 사회주의는 정치적 개념이 아니라 일종의 범죄적 사고 방식일 뿐이었으며 공공 질서에서 가장 위험한 범죄였다.

 

오타비오 디날레는 그라미첼레 학살 다음 날 아침에 밀라노 신문 「이상과 해방」(Idea Liberale)에서 인용한 “사망자와 부상자, 이들은 운명으로 떠났다, 문명과 지배의 가장 소중한 진실은 파편이다.”고 언급했다.

 

 

 

 

이런 기준들이 마련된 후에 지올리티(Giolitti)와 같은 소위 말하는 민주적인 정부조차도 저지른 이 피비린내 나는 열성적인 만행에 대해 군대에게 책임을 묻지 않은 건 놀랍지도 않다. 오히려 군대는 “의무를 다했다”며 공식적으로 찬사를 얻었다. 의회의 회의장에서 사회주의 분파가 제기 한 대중과의 충돌에서 군대의 고용을 제한하자는 동의안을 부결한 건 여전히 더욱 자연스러울 정도다.

 

1898년 5월에 발생한 총격 사건은 눈이 멀고 근시안적인 낙관주의자들에게도 계급 투쟁에 대한 상황을 명확하게 밝혀냈다. 이건 최근에 매년마다 일어난 유혈 사태에 대한 대부분은 완전한 기록이다.

 

희생자. 사망자. 부상자.

베라(Berra), --------------------------------------6월 27일

1901----2------10

파투그나노(Patugnano), ----------------------------5월 4일

I902-----1-----7

카사노(Cassano), ----------------------------------8월 5일

1902-----1-----3

칸델라(Candela), -----------------------------------9월 8일

1902-----5-----11

지아라타나(Giarratana), ---------------------------- 10월 13일

I902-----2-----12

피에르(Piere),-------------------------------------- 5월 21일

1903-----3-----1

갈라티나(Galatina), ----------------------------------4월 20일

1903-----2-----1

토레 아눈치아타(Torre Annunziata), -------------------8월 31일

1903-----7-----10

세리뇰라(Cerignola), -------------------------------- 5월 17일

1904-----3-----40

부게라(Buggera), ------------------------------------9월 4일

1904-----3-----10

카스텔루조(Castelluzzo), ------------------------------9월 11일

1904-----1-----12

세스트리 폰테(Sestri Ponente), ------------------------9월 15일

1904-----2-----2

포기아(Foggia), --------------------------------------4월 18일

1905-----7-----20

성 엘피디오(St. Elpidio), ------------------------------5월 15일

1905-----4-----2

그라미첼레(Grammichele), ----------------------------8월 16일

1905-----18-----20

무라(Mura), ----------------------------------------3월 23일

1906-----2-----4

스카라노(Scarano), ----------------------------------3월 21일

1906-----1-----9

칼리네라(Calinera), ----------------------------------4월 30일

1906-----2-----3

토리노(Turin), ---------------------------------------4월 4일

1906-----1-----6

칼리아리(Cagliari), -----------------------------------5월 12일

1906-----2-----7

네비다(Nebida), -------------------------------------5월 21일

1906-----1-----2

소네자(Sonneza), ------------------------------------5월 21일

1906-----6-----6

벤벤타레(Benventare), --------------------------------5월 24일

1906-----2-----2

 

총합 23건의 학살로 78명이 사망하고 218명이 부상을 당했다! 풍년일 정도다! 

 

이탈리아에서는 경제적 원인으로 시위를 벌일 수밖에 없었던 파업의 참가자 혹은 노동자와 “소작농”을 상대로 군대를 동원하여 유혈 사태가 끝나지 않았던 사례가 없었을 정도다. 이런 군대의 “훈련”은 알프스 산의 반대편에선 일상생활의 일부분이자 선물이었다.22)

 

그리고 바로 여기서 우리는 흔하게 알 수 있는 걸 거론하고자 한다. 헤르베(Herve)의 증언에 따르면23) 한때는 해가 지지 않았지만 현재엔 해가 뜨고 싶어하지도 않는 스페인에서 파업 중이던 노동자와 농민들의 학살을 세는 건 이탈리아와 마찬가지로 어렵다.

 

 

오스트리아-헝가리.

 

흔히 알려진대로라면 같이 국가의 업무가 흑인과 황인이던 이중의 군주제에선 그렇게 나아지진 않았다. 1903년 9월 23일 오스트리아 의회에서 사회주의 대표 다친스키(Daszynski)는 “파업이나 민중 시위는 각 국적들의 의사가 불타오를 때 노동자와 농민에게 총검을 겨누는 건 언제나 군대였다”고 외친 건 매우 정당한 발언이었다. 여기에 정치적 왕국이 연류했다는 걸 보여주고자 다친스키는 “우리는 평화로운 시기에도 군대가 이질적인 부류로 묶는 유일한 시멘트인 상태로 살고 있다.”라고 발언하면서 1897년 그라츠(Graz)에서 발생한 사건과 그라슬리 츠(Graslitz)에서 발생한 유혈 사태를 암시했다. 우리는 1897년 11월 바데니(Badeni)가 전복했을 때 군대가 개입하여 비엔나(Vienna), 그라츠(Graz), 부다페스트(Budapest)에서 유혈 사태가 발생했다는 걸 알고 있다. 특히 갈리시아(Galicia)에서 흔하던 노동자 학살은 모든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으며, 1902년 부로비츠키(Burowicki)와 우비니(Ubinie)의 카님카(Kanimka)에서 농업 노동자들은 피를 흘렸고 팔케나우(Falkenau), 누에르샨(Nuerschan), 오스트라우(Ostr며)의 피비린내 나는 사건을 마찬가지로 언급했다. 그러나 후자에서 헌병대(gendarmerie)는 비난받아야하며 군사 당국의 명령을 따르고 부분적으로는 민간 행정부의 명령을 받아서 국가의 질서를 유지하고자 고안했지만 순전하게 군사 규율을 따랐다. 1902년 트리에스테(Trieste) 총파업 당시에 군대와 충돌도 발생하여 10명이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었다. 1902년 렘베르크(Lemberg)에서 일어난 석공들의 파업에서 발생한 사건도 언급하고자 한다. 파업과 관련해서 정치적 시위가 열렸을 때 경기병들은 말을 탄 상태로 군중들 사이에서 총을 난사하여 5명이 사망했다. 1905년 인스부르크(Innsbruck)에서 일어난 폭동은 전적으로 민족주의적 성격을 띠었기 때문에 업무로 볼 땐 외부의 범위였다.

 

군 당국은 사람들에게 저지른 대규모의 선을 넘은 행위들에는 현재까지 헝가리에서 자주 발생했으며, 헌병대는 평화로운 농업 노동자들에게 아무런 원인도 없이 사격한 타마시 푸스타(Tamasie Puszta)의 폐해의 사례를 참조하기에도 “완전하고 전적으로” 자연스럽게 “의무”를 수행했다. 최근의 한 가지 사건, 즉 1906년 9월 2일 후에 훈야드(Hunyad) 지방에서 벌어진 군대가 초래한 전투에서 페트로세니(Petroseny) 탄광의 파업자들 가운데 큰 피해가 일어난 전투를 유념하고자 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중상을 입었고, 150명이 경상, 2명이 사망했다.

 

합스부르크(Habsburg) 이중의 군주제에서 발생한 정치적 싸움에서 군대와 프롤레타리아트 가운데에서 일어난 소규모의 충돌과 투쟁은 이외의 지면에서도 언급하고자 한다.

 

이미 인용한 연설에서 다친스키는 “총검이란 무력으로 정치를 뒤볶을 순 없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러나 모두가 알겠지만, 그 이후로도 군대는 더욱 강력한 힘과 결단으로 정치에 개입했다.

 

벨기에.

 

벨기에에서 노동자 학살은 오래된 이야기다. 1867년과 1868년의 사건은 국제적인 개입 때문에 중요하다. 시위를 벌인 비무장 노동자들의 행렬에서 군인 중대에 의해 타격을 입고 잘려나간게 사건의 발단이었다. 1867년 마르시엔(Marchienne)의 굶주린 봉기로 공은 굴러갔다. 1868년 3월에는 샤를루아(Charleroi) 대학살이, 1869년에는 악명 높은 세랭(Seraing)과 보리니지(Vorinage) 대학살로 이어졌다.

 

생산량 제한과 임금 체불로 필사적인 광부들을 대상으로 한 샤를루아 학살은 군대와 헌병대가 계획하고 수행했다. 이를 계기로 국제적으로 벨기에에게 강력하고 격렬하게 선동을 지속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총회에선 선언문을 발표했고, 이 선언문은 국제적인 조직24)을 개선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1886년 이른바 굶주린 봉기가 발생했을 때, 보편적인 선거권에 대한 요구를 명확하게 명시하진 않았지만 경제적 문제와 함께 1860년대의 장면을 반복했다. 1886년 4월 3일, 반더스미센남작 장군(General Baron Vandersmissen)은 악명 높은 사안을 발표했는데, 이후에 그 사안의 회의에서도 못마땅했다. 이 사안에는 냉소적으로 “무기의 사용은 사전에 경고 없이도 사용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희생자의 수는 이례적이었다. 벨기에의 루(Roux)에선 한 번의 일제 사격으로만 16명의 노동자가 사망했습니다. 그리고 계급 정의로 대다수의 노동자들에게 중형을 선고하고 이 모든 걸 승인하는 도장을 찍었다. 1866년부터 1902년까지 벨기에에서 군대의 개입 없이 파업을 섬뜩하게도 마무리할 순 없었다. 이 기간 동안에만 대략 80명이 사망했다.

 

1893년 총파업은 전장에 남겨진 사망자는 많았던 정치적 성격의 주된 사건이었지만 이 사건을 언급하고자 한다. 베르비에(Verviers), 루(Roux), 라 루비에르(La Louvière), 제마페(Jemappes), 오스텐데(Ostende), 보르거하우트(Borgerhout), 몽(Mons)에선 계급 의식을 지닌 벨기에의 노동자들에겐 불의 문자들이 불길로 타오르고 있다. 벨기에의 노동자들은 벨기에 자본주의의 죄악에 대한 견고한 책에 피 묻은 나뭇잎을 꽂았다. 상비군을 마지막으로 동원한 건 1902년 총파업 당시 예비군을 소집했을 때였다. 병사들의 사고와 분위기는 곧 "라 마르세예즈"(Marseillaise)를 부르고 장교들을 경멸하는 등으로 상당하게 드러낸 방식과 혁명적 사상을 표출하면서 국방부에 불리한 보고를 줬다. 이 결과로 이전에도 자주 일어났던 플랑드르(Flemish) 군인들은 왈룬(Walloons)에 거주하는 구역으로 발령했다. 그 반대에도 마찬가지였지만 마침내 상비군은 결국 사라졌다. 1902년 이후 벨기에의 프롤레타리아 병사들은 적어도 자국의 군국주의에 대해선, 앞서 살펴본대로 헌병대와 방위병을 선호하는 자본주의의 감시기구, 즉 “고용 계급의 금고 앞에서 보초 임무를 수행하는 떠오르는 기념비”라는 명예로운 역할을 포기했다. 착취라는 신성한 특권을 지키고자 부르주아지는 어느 경우에도 비무장 대중들이 반대할 때 그 자신이 위험에 처한다면 문제를 마다하지 않고 자신에게 목숨을 건다. 방위군들이 자국의 적에 대항해 감탄스러운 그 기능을 수행한다는 건 이미 어느 곳에서나 입증했다.

 

프랑스

 

프랑스에서는 계급 투쟁의 역사가 피의 문자로 새겨져있다. 사흘 동안 지속한 1830년 7월 전투, 1848년 6월 23 부터 26일까지의 시가전에서 사망한 10,000명, 1851년 12월 1일 카바이낙(Cavaignac)과 1852년 "작은" 나폴레옹들의 사형을 집행한 1871년 5월의 붉은 주에 코뮌을 무너뜨리려고 프랑스 부르주아지가 분노로 울부짖으며 자본주의의 의무이자 원한으로 일어난 28,000명의 영웅의 피 바다를 떠오리는 건 아니다. 이 사건들은 영웅적 행위에 따른 비극적인 표시로 프랑스의 묘지들이 아니라 군국주의가 저지른 끔찍한 혁명적인 행위로 우리의 역사적 조사에선 벗어난다.

 

 

 

파업 중인 무방비 상태의 노동자들과 맞선 군국주의의 영웅적인 행동은 일찍부터 시작했다. 1831년 11월, 군대가 평화로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면서 리옹의 견직공 노동자들은 “일하며 살거나 싸우다 죽거나”라는 유명한 문구가 적힌 현수막을 내걸고 이른바 “반란”을 시작했다. 분노한 노동자들은 이틀 만의 투쟁 끝에 마을을 점령했고, 방위군은 분노한 노동자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지만 군대는 곧 칼을 뽑기도 전에 마을에 진입했다. 리카마리 황제(Empire Ricamari) 치하에서 성 오뱅(St. Aubin)과 데카제빌(Decazeville)은 출전으로 유명한 지역이다. 당시에 부르주아 공화주의자들은 군인들이 파업 경기장에 투입하는 걸 열정적으로 반대하며 싸웠다. 그러나 같은 공화주의자들은 정치권력을 장악하자마자 방금까지 싸웠던 보나파르트주의 방식을 습득하기 시작했고 곧바로 더 앞선 방식으로 나아갔다. 성직자나 군주제지지자들이 유죄를 선고받을 때만 정치적 원한으로 혹평했을 뿐이었다. 1891년 5월 1일, 르벨식 연발 소총의 총알은 당시에 어린 소녀였던 마리아 블론도우(Maria Blondeau)의 몸을 관통하면서 새로운 정권은 피의 세례를 받았다. 145 라인 연대가 의무를 서던 날에 10명이 사망하고 35명이 부상을 입었다. 그러나 프루미스(Fourmies)의 콘스탄트(Constant) 도살자와 그의 동료 샤푸이(Chapuis) 대위는 고립된 사건이 아니다. 프루미스를 따라서 1988년 샤롱(Châlons), 1900년 라 마르티니크(La Martinique) 1905년 5월과 6월 롱위(Longwy)에서 프랑스-러시아 동맹을 체결하고 이를 기념하고자 장교들은 채찍을 들었다. 1905년 4월 17일, 빌프랑슈르손 (Villefranche sur Saône)에서25) 특히 리모주(Limoges)에서26) 무엇보다 기병대의 공격과 연속사격이 있었고, 1905년 12월에는 콩브레(Combrée)의 비극27)은 발생했고, 1907년 1월 20일에는 파리의 거리에서 일요일 휴무에 찬성하는 시위를 하는 대중들을 막고자 막강한 군대를 소집했다.

덩케르크(Dunkirk), 크루소(Creusot), 몽소 레 마인(Montceau les mines)을 포함하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더블린에서 열린 국제회의에 제출한 “노동 총연맹의 난관”(“Confédération Générale du Travail”)의 보고서에 따르면 이 회의에 참석한 한 군인들은 파업 노동자들과 연대를 선언했다.28)

최근에는 반군국주의자들에 대한 대심판에 메슬리에(Meslier)는 진실로 외쳤다. “프루미스(Fourmies)에서 어린 마리아 블론도의 살해 사건 이후에 프랑스의 노동 계급은 오랜 순교자적 고통을 겪었고 대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이 사건은 터무니 없이 부조리하고 프랑스에서 눈에 띄는 반교권주의와 공화주의 견해와 활동에는 평화로운 고대의 “새로운 방법”적 환상에 큰 자극을 주었다는 사실 외엔 더 큰 발전은 없었고, 지난 5년 간 프랑스의 밀러란디즘적 사회주의는 감소했지만 반면에 파업을 “가혹하게 처리”하는 군대 수도 증가했다. 최근에 수립한 두 명의 사회주의자가 있으며 급진적 민주주의였던 클레망소 부처에서도 마찬가지로 어느한 변화도 주지 못했다. 라파르그는 “현대 군대는 식민지를 훔치는데만 관여하지 않으며 자본주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서도 고용한다.”고 마찬가지로 프랑스의 정곡을 찌르면서 신랄하게 언급했다.29)

 

 

미국

 

자본주의는 매우 효과적으로 자신의 고유한 어조를 유지하는 논조를 알고 있으며 필요에 따라서 "사격소리", 소총의 장전소리와 칼이 휘두르는 수단들로 필요한 경우 미국의 자본주의 사회 및 공공 생활에서 조정되는 “평등 권리의 논조”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지 알 수 있으며30) 이로인해 당분간은 미국에서도 자본주의가 프롤레타리아를 이길 수 있다. 이 사실은 군대를 모집하고 훈련하는 군사적 방법에서 가장 중요하고 “자국의 적”에 맞서서 군대를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데 매우 유익하다. 병력을 모집하고 훈련하고 다른 부대로 병력을 이동하는 특이한 조건에서도 노동자들은 자주 잘 무장했기 때문에 미국은 특이한 상태을 띠고 있다.

 

벨기에와 마찬가지로 미국에서도 노동자 대학살의 기간은 실업자 운동에서 시작한다.

 

1874년 1월 13일, 뉴욕에서 강한 경찰 병력들이 별다른 도발 없이 실직자 행렬을 공격을 감행했다. 수백 명의 노동자들은 치명적인 중상을 입었고 톰킨스 광장(Tompkin’s Square)의 전장에 쓰러져갔다. 그러고나서 1877년 7월 철도 노동자들의 파업이라는 극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주지사는 볼티모어(Baltimore)와 오하이오(Ohio) 철도의 파업에 맞서 주 민병대의 여러 중대를 파견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헤이즈(Hayes) 대통령은 중대를 돕고자 250명의 정규군을 더 파견했지만 성공적이지도 못했다. 메릴랜드(Maryland)에선 소집한 민병대원 중 10명이 소총 사격으로 사망하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피츠버그(Pittsburg)에선 보안관을 소집한 지역 민병대가 개입을 거부했다. 다른 부대로 병력을 이동해서 다시 분류하는 오래된 속임수를 이용했다. 필라델피아(Philadelphia)에서 온 민병대원 600명은 파업자들과 짧지만 격렬하게 전투를 벌였고, 다음 날 아침 정규군들은 패배하고 도망쳤다. 펜실베이니아(Pennsylvania)의 레딩(Reading)에서 파업에 반대하는 민병대원들은 대부분 파업 노동자들과 친분을 쌓고 탄약을 공유하며 파업 노동자들에 대항하는 민병대원들에게 무기를 휘두르겠다고 위협한 노동자들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한 부대에서 독점적으로 소유 계급들 가운데 모집했고, 고집스러운 장교가 이끄는 한 중대는 군중을 향해 발포해서 13명을 죽이고 22명을 부상 입혔다. 이 중대는 영웅적인 행위의 결실을 오래 누리진 못했고, 압박을 받아 곧 후퇴해야했다. 한동안 파업 노동자들의 손에 완전히 장악했던 세인트루이스(St. Louis)에선 파업 노동자들은 집행위원회 본부를 정기적으로 포위해서 민병대의 여러 중대와 함께 투입해서 타격한 후 마침내 전체 경찰 권력의 “법과 질서”에서31) 승리해 되찾았다.

1886년 5월 시카고(Chicago)를 휩쓸었던 두려움의 원인은 핑커톤(Pinkerton)의 입구와 경찰들에게서 찾을 수 있다. 재봉틀 생산업체인 코믹(Mr. Cormick)은 “노동하려는 사람”들을 보호한다는 근거 없는 혐의를 들어 파업 노동자들에 맞서는 300명의 무장한 핑커톤을 풀어 주었고, 그 결과 경찰의 유혈 공격에 자극을 주어 남성, 여성, 어린이를 무차별적으로 공격해서 6명이 사망하고 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입었다. 이 사건은 5월 3일에 발생했다. 5월 4일에는 그 유명한 다이너마이트 폭탄을 투척해서 치열한 거리 투쟁의 신호탄을 알렸고, 이 투쟁으로 노동자 4명이 사망하고 50여 명이 부상했으며, 경찰의 손실로는 7명이 사망하고 60명이 부상을 입었다. 1886년 5월 4일의 섬뜩한 사법적 속편으로, 미국의 민주주의 계급적 정의가 타격방식을 취할 수 있는지를 입증한 이 사건은 널리 알려졌다.

 

1892년과 1894년에 일어난 사건도 자세히 살펴보자.

 

첫째로, 1892년 7월 정부가 공여하던 농지이던 카네기 철강 작업소 공장에서 파업이 일어나는 동안에 고용주가 고용한 무장한 핑커톤과 파업 노동자 가운데서 격렬한 전투가 일어났다. 이 투쟁에서 12명이 사망하고 20명이 중상을 입었다. 핑커톤은 패배했지만 후에 정부군은 마을을 점령하고 계엄령을 시행해 파업대를 해산했다. 거의 동시에 아이다호(Idaho)에서 광부들의 파업이 발생해서 파업방해자들과 파업대들 가운데 충돌에서, 대략 백 명의 민병대로는 무장한 파업대원들을 상대로 맞설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오직 주지사가 요청했던 연방군만이 파업대를 해산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1892년 8월 버팔로(Buffalo)에서도 철도 신호원들은 파업에 나섰다. 파업이 시작했을 때 출동한 지역 민병대는 팻말 시위를 막으려고 하진 않았다. 마침내 보안관은 주지사에게 48시간 이내에 병력을 요청했고 거의 대다수의 주에서 민방대는 파업대보다 20배나 넘게 현장에 출동해서 “평화”를 원상복구하는 데 성공했다. 같은 달에 인맨(Inman)의 철광산, 올리버 스프링스(Oliver Springs)의 탄광, 콜 크릭(Coal Creek)의 파업으로 주지사에겐 주 민병대 전체에 주력할 기회를 주었고, 파업으로 대부분의 민병대는 고립하거나 파견됐고 결국 무장을 해제하고 자신의 고향들로 돌아갔다. 이 파업을 무산한 후에도 계급적 정의는 무자비하게 행동했다.

 

마지막으로 일리노이(Illinois)32) 주지사였던 알트겔드(Altgeld)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미국 대통령은 연방군을 주에 파견하여 주의 민병대와 결합해 파업을 진압하고 12명이 사망한 1894년 시카고 풀만 파업(Chicago Pullman Strike)을 상기해보자. 이 사례에는 이전의 모든 사례들보다 군국주의와 손에 손을 잡은 계급적 정의로 악명 높은 명령들과 대량의 체포적 수단들로 노동자들을 좌절하고자 했다. 파업 지도자였던 유진 뎁스는 이렇게 언급했다. “우리는 철도가 아니라 군대에게 쳐맞았습니다, 군대도 아닌 미국 법원이 휘두른 권력에게 쳐맞았다”라고.33)

 

그러나 민병대는 명령을 거부하고 파업대들이 자주 무장했다는 사실과 언급한 모든 사례에서 군사 권력은 노동자들의 패배를 가져온 결정적인 요인이라는 건 여전히 사실이다. 이후에도 미국의 파업은 “주요한 사례에서 지역 경찰들과 주 민병대 또는 연방군의 도움” 과 의심 해볼 여지도 없이 “정부가 명령한 수단들”의 도움으로 부딪쳤다. 이에 다소 비관적인 성향이 있던 힐리킷(Hiliquitt)에 따르면34) 대부분 파업은 예외없이 노동자들의 좌절로 끝이났다.

 

캐나다

 

캐나다에서 자유의 땅이던 해밀턴(Hamilton)에선 노동자들의 피로 얼룩졌었다. 1906년 11월 24일. 파업 중이던 철도 노동자들과 충돌해서 민병대는 50명에 부상을 입혔고 그들 중 일부는 중상을 입었다.

 

스위스

 

스위스의 군대를 이용한 죄의 목록은 정말로 오래됐다. 1869년 제네바 주 정부는 경찰과 함께 파업 중이던 노동자들을 상대로 민병대를 파견했다. 같은 해에 보주(Vaud)의 주 정부는 대대에게 전보해서 실탄을 지급하고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이고 있는 마을로 총과 검으로 행군하라고 명령했다. 1869년 바젤 주 정부는 견직공들의 열악한 환경을 개선하고자 파업을 벌였을 때 군인들에게 같은 방식으로 의무를 다하라는 팻발을 들라고 지시했다. 같은 해에도, 라 쇼드퐁(La Chaux-de-Fonds)에서 시계 제작자들과 조각가들 가운데 파업이 발생하자, 새로운 부르주아 정부는 민병대를 동원할 필요를 예상하고선 무기와 탄약을 제공했다. 1875년에는 유혈 사태가 발생했다. 우리(Uri) 주에서는 건설 계약업체가 처분하고자 2만 프랑 정도를 취득해서 알려진 정부는 고타드(Gotthard) 터널에서 주로 파렴치한 실물 급여 제도에서 자신을 보호하려던 2000명의 파업 참가자들에 맞서 민병대를 동원했다. 격렬한 공격으로 희생자는 속출했고, 계급 전투의 전장에선 여러 사망자와 대략 15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1901년 발레(Vallais) 주에서도 정부는 두 개의 중대를 파견하고 심플롱(Simplon)의 파업을 진압하고 피가 흘러내렸다. 그 결과로 대다수의 노동자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같은 해에 티치노(Ticino)에서는 석공들의 파업에 의무적으로 반대하는 팻말을 들고 두 개의 소대를 투입하기도 했다. 제네바에서 잘 알려진 사건은 1902년 10월에 발생했다. 노동자들은 미국의 착취업자들에 파업을 벌였고 정부의 명령을 따라서 양처럼 몰아 얻어맞았다. 당시에 군인들은 치안의 의무를 거부하면 감옥에 갇히고 시민권까지 박탈했다. 당시 소집하지도 않았지만 부르주아지들은 노동자들을 반대하고자 그 자신들이 대규모로 무장했다는 건 지나가는 말로만 언급하겠다. 거의 같은 시기에 바젤(Basle)에서는 파업에 반대하고자 민병대를 동원했다. 1904년 라 쇼드퐁의 건축 청부업자들은 건설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해 정부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다. 놀랍게도 파업은 모든 도발에도 불구하고 체계적으로 전진했기 때문에 고용주의 입장에서는 절망적이었다.

 

기병대와 보병의 한 대대가 한꺼번에 현장을 출동할 정도로 대응은 신속했다. 이들은 합법적인 방법으로 투쟁하던 프롤레타리아들을 위협적인 성향이 있었고, 프롤레타리아들을 다시 공장의 노예 생활로 내몰았다. 1904년 성 갈(St. Gall) 주의 리켄(Ricken)에서 과일과 채소 농작물을 보호하고자 파업을 벌이는 동안에 군대를 동원하기도 했는데, 이 파업은 전혀 위험하지도 않았다. 성 갈 주의 임금 분쟁 중에 흥분한 한 군중은 프랑스 고용주가 운영하는 주조공장의 유리창을 깨자 로르샤흐(Rorschach)에 민병대를 파견한 방식으로 민병대를 파견했다. 1906년 여름 취리히에서 발생한 사건의 성격은 심각했다. 생필품의 가격을 크게 상승한 결과에 따른 임금 인상을 목적으로 한 파업은 수 차례 발생했지만 아무런 원인도 없이 민병대는 개입해서 유혈 사태가 발생했다. 민병대는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파업 노동자를 때리고 구타했다. 파업의 노동자를 연행했을 뿐만이 아니라, 특히 외국인들까지 막사로 끌고 가서 승마용 채찍으로 채찍질했다. 이 방식은 장교들의 명령을 따랐으며, 파업 중에 팻말 시위만이 아니라 어느 한 시위의 개최도 금지했다. 수치스러운 사건에 대한 대의회의 해명은 우선적으로 무기한 연기했으며 부르주아 정당의 소규모 단체에선 논의없이 묵인했다. 그리고 이를 마무리하고자 6명의 파업 지도자들은 법정에 출두했다. 1906년 8월 24일, 법원은 이들 중 5명에게 무죄 판결을 선고했고 시그(Sigg)는 민병대에 반군국주의 전단을 보내서 반란을 선동한 혐의로 8개월의 징역과 1년 간의 시민권을 상실하는 형을 선고했다.

 

실제로 이는 부르주아 공화국과 민병대에서 예상을 이루는 한계에 해당한다. 이러한 자료들에 특별한 의미가 부여되는데, 이미 다른 관련 부분에서 언급된 것처럼 1899년에 스위스의 민간인들은 병역 의무가 없는 시민들이 총알을 보유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 있다. 이외의 관련한 부분에서도 언급했지만 이에 대한 자료에는 특별한 섬광을 비추는데 1899년에 현역으로 복무하지 않는 스위스의 민간인들에겐 탄약을 보유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로 인해 더욱 치열해진 계급투쟁에서 고용 계급의 이익관계는 민병대의 고용을 촉진하고자 제 시간에 맞춰 이뤄졌다는 걸 알 수 있다.

 

1906년 12월 21일, 국민의회는 찬성 65표, 반대 55표로 군조직법 수정안을 채택했다. 이 수정안에 따르면 경제적 성격들과 충돌했을 때만 “국내의 질서를 어지럽히거나 위협하는 경우”, 군대 동원은 “공공 질서 유지”를 위한 목적으로 “필요”로 했다. 이 법은 105표 반대 4표로 통과했다. 그리고 의심 할 여지도 없지만 앞에서 언급한 수정안은 이미 군대 개입에 대한 기준을 구성하지도 못했으며 초라할 정도로 쓸모가 없는 이 수정안에 반대표를 던졌을 큰 소수들에게 생각을 잠기게 한다.

 

노르웨이

 

자유로운 노르웨이, 1905년 여름에 세계에서 가장 평온하게 혁명을 지나서 원시적인 욕망을 채우고자 군주국가를 세우고 왕위를 올렸다. 이 나라에는 모든 소작농적 낭만에도 불구하고 전적으로 자본주의 국가의 발자취를 따른다. 소작농적 민주주의 국가인 이 나라에서도 파업 참가자에 대한 군사적 권력의 사용은 드문 일은 아니다. 1903년 5월 1일자35) 티벤데 아르흔데(Tyvende Aarhundrede)의 기사에 이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1902년에만 던드랜드 달렌(Dunderlands Dalen)과 트롬쇠(Tromsoe)에서 두 건의 사례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독일

 

그래도 독일은 여전하다. 독일에서는 경제적 투쟁에서 군대를 고용하는 건 관습은 아니다.

적어도 아직은 군대가 적극적으로 활동한 사례는 기록하지 않았다. 1847년 방직공 폭동에서 프로이센 보병은 11명을 죽이고 24명에게 부상을 입히고 프롤레타리아를 죽음에 이르게 할 정도로 비참한 고문과 계급적 정의라는 왕권에 기반해서 대다수에게 고된 노동형을 선고하고 마무리했던 예외가 있다. 또 다른 예외로는 1889년 광부들의 파업으로, 5월 10일 “초대 대통령”이던 폰 하게마이스터(von Hagemeister)가 요구했던 군대는 몰트케(Moltke) 광산에서 3명이 사망하고 4명이 부상입었으며, 보훔(Bochum)의36) 전장에선 2명이 사망하고 5명이 부상을 입었다. 1892년 2월 베를린 실업자들의 소동에는 군대를 개입하지 않았지만, 신뢰할 만한 소식에 따르면 베를린 군대는 1894년 1월 18일 실업자들이 궁전 앞에서 시위가 일어날 계획이라는 시답잖은 소문으로 막사에서 대기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런 군국주의자들을 완화하는 결과에는 결정을 내린 당국의 관계자들이 유난하게 친절하거나 건전하게 사고하는 방식들과는 상관이 없었다. 정반대로! 독일은 고용 계급의 관점에서 우수하고 강력하게 조직한 경찰과 헌병대를 보유하고 있다. 독일이 저명한 경찰 국가라는 건 헛소리가 아니다.

 

잘 무장된 경찰과 잘 무장된 헌병대는 타지에서도 군대가 맡은 임무를 독일에서 수행하며, 더 번거롭고 투박한 방식으로 행동하는 군사 기계들보다도 은밀하게 수행하고 순식간에 다방면적인 지시에도 더 잘 적응할 수 있다.

 

 

독일에서는 파업 노동자와 경찰 또는 헌병대 간의 유혈 충돌도 꽤 자주 발생한다. 1900년 베를린(Berlin) 시내의 이동수단인 전차 파업과 1906년 이른바 브레슬라우(Breslau) 폭동도 예외는 아니다. 비발트(Biewald)의 손으로 군국주의를 생산한 경찰의 거친 진압과 쥐어뜯은 흔적으로 잘려나갔던 역겨운 사례일 뿐이다. 비발트의 손은 여러 수의 두개골, 도려낸 귀, 코, 손가락 이외의 부위들이 잘린 채로 좋은 회사에 소속했으며, 이 좋은 회사는 급속도로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다. 독일에선 무장한 국가 공권력에 의해서 파업 희생자의 수는 이외의 국가에 비해선 보다 적다. 경찰과의 충돌로 부상당한 사람들의 수는 완전하게 기록했거나 알려지지조차 않았기 때문에 대략적인 추산조차도 어렵다. 독일에서 이런 희생자들이 여타의 국가들보다 적은 건 자본주의 국가에서 고용 계급들이 호의적이고 다정하기 때문이 아니다. 이는 군대가 막사에 소집하고 대규모 파업에 대비하여 준비 태세를 유지한다는 건 거의 다반사라는 사실은 우리들에게 가장 분명하게 입증했다.

  

이와 관련한 가장 심각한 사례는 1905년 1월 8일부터 2월 10일까지37) 지속한 루르(Ruhr) 광부들의 파업에서 제공한다. 그와 반대로 이 결과는 전적으로 독일 노동자들의 신중하고, 차분하고, 엄격한 자제한, 훈련과 계몽에서 기인한다. 프로이센과 작센(Saxon)정부가 북과 나팔, 칼과 총을 들고 경제적 투쟁에서 두 번 생각해보지도 않고 고용 계급의 편을 들거란 건 조금도 의심할 여지도 없다.

 

군사회와 파업

 

군국주의는 현역 복무 기간 이후에도 사람들의 군국주의적 성향을 유지하고 군대 집단이라는 매개들로부터 이를 확산하고자 분투하기 때문에 군대가 파업에 개입하는 건 대부분 알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사실이다. 군국주의는 노동당의 경제적 투쟁을 폭력으로 진압하려는 활동을 내버려 둘 순 없지만, 아마도 검은 타이즈를 위해 고안한 조직으로 특징할 수 있다. 어쨌든, 특정 분기에 이용할 수 있도록 그들을 너무나 쉽게 고용고자 한다. 모든 대비책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비율로 반대하고 심지어 사회 민주주의적 요인들을 담아낼 수 있는 상황만이 이런 군사 집단의 활동을 최대한으로 막을 수 있다. 이런 집단을 활동하지 않게 막아내는 건 고용계급과 노동계급 가운데서 사회적 시각이 부족하고 흔한 양처럼 온순하던 노동자들도 투쟁에서 가장 먼저 분노하고 계급투쟁과 자신의 계급적 위치를 알아차린다. 게다가 고용주들의 일부분인 기독교 와 자유주의 노동자 단체들의 뒤에서도 설립했으며 그 선을 넘어버렸다. 그럼에도 1906년 6월 오스트하임(Ostheim)에서 개최한 “작센-바이마르 대공국 군사회 연합” 파견 회의에서 이에 대해 논의한 내용은 매우 흥미롭다. 이 논의는 파견 회의에서 채택한 원칙들과 관련해서 시작했다. 이 원칙은 국가에 적대적인 정당을 지지자나 특히 사회민주당으로 판명한 회원을 제명하는 걸 모든 회원의 의무로 규정한다. 파업에 가담했거나 적어도 “황제, 왕자 및 조국에 대한 충성”하는 의무를 위배하는 파업에 참여했다는 건 국가에 적대적인 혁명적 견해을 지녔다는 사실을 확증하는데 주목했다. 파업으로 인해 그러한 충성심이 언제 어디서 위험에 처하는지 공표하는 건 군사회에서 한가하게 빈둥거리는 고위급 인사들에게 달렸으며, 경찰과 사법부와 마찬가지로 직간접적으로 고위급 인사들은 자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익에 타격을 주는 모든 파업을 사회민주주의를 책략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이에 군사회에선 생산적인 작업을 수행한다고 착각했다. 그러나 노동자를 계몽하고 어설프고 어리석은 군사회를 약화하는데 기여하는데 좋은 건 사회민주주의만큼 고용 계급들에게 유익한 건 없다. 군사회는 사회민주주의자만이 아니라 현대 노동운동의 규칙을 지지하는 모든 노동조합의 구성원들을 더욱 더 체계적으로 추방하고자 한다. 대체로 군사회에서 “화려하게 치장한 장식”38)과는 별개로 상당히 높은 회비를 납부하면서 얻는 특정한 물질적 이득39)에 묶여 있기 때문에 당분간은 작은 도시의 노동조합에선 활동하는 조합원들은 일정한 어려움을 겪는다는 건 분명하다.

 

군사회는 계급적 정의와 관리부에서 그 목적을 강력하게 지원하며, 정치적 선전적인 성격을 모든 모공에서 내뿜지만 여전히 사회민주주의자들을 비정치적 조직으로 취급하는 무모한 용기를 가졌다. 군국주의에게 자본주의 국가에서 이런 기관들은 자본주의 사회 질서를 보호하고 공공의 높은 이익관계와 결속으로 묶여 있기 때문에 손을 내밀 수밖에 없다.

 

 

프롤레타리아트에 맞서는 무기들인 군대의 정치투쟁 또는 무장할 권리.

 

정치 투쟁은 가장 집중된 형식의 계급 투쟁 자체이기 때문에 우리는 정치투쟁에서 직간접적으로 군사 개입을 예상할 수 있다. 애초에 군사주의는 생산자이자 소비자로서 경제 강대국 역할을 합니다. 처음부터 군국주의는 생산자이자 구매자로 경제적 힘을 좌우한다. 모든 사회민주주의자를 잔혹하게 배척하거나 혹은 군사 생산 시설에서 사회민주주의자라는 혐의를 받은 사람들을, 예를 들어 슈판다우(Spandau)에서 노동자들은 군국주의에 작용을 받은 반동적인 정당, 특히 "사회민주주의와 맞서는 제국주의 노동조합"에 무조건적으로 굴복하며 수백의 어두운 독일인들은 동시에 사회민주주의와 가벼운 접촉도 완강하게 막으며, 군국주의는 고용주 보호 주요 임무를 얼마나 훌륭하게 파악하고, 실제로도 군사적으로 빈틈없이 수행할 수 있는가를 판단하며, 권력을 지지하거나 방어하려는 열망에서 군수 회사인 크루프(Krupps)와 스텀즈(Stumms)를 능가한다. 이를테면, “사회민주주의에 반대하는 제국주의 노동조합”은 슈판다우의 군사 생산 시설에서 대부분은 왕의 모든 노동자를 통제하는 왕의 감시자 역할을 자임한다. 그 뜻은 어느 노동자를 해임할지를 즉시 결정한다. 1906년 여름에 군 생산 시설은 미숙련 노동자들의 무해한 노동조합들을 집행위원회에서 해임을 내린 사건에서 현저하게 입증했다.

 

사실, 군사적 거부 운동에서 발휘하며, 노동자 조합이나 여타의 사회민주주의적 성향을 띠는 어느 단체든지 활동하는 술집을 운영한 사람들에게 군사적으로 불매 운동을 가하기도 하는데는데, 이는 유력한 작용들을 미치기도 하지만 급속하게 감소하는 추세다. 이 불매 운동에는 위에서 논의했던 군국주의의 교육적인 세력들에 속하는 혁명이라는 독약에 접촉할만한 병사들을 보호하는 일석이조를 가져왔다. 게다가, 노동자들은 공중실 하나도 빌리기가 어렵기 때문에 칸이나 공간을 확보하기가 어렵다. 이를테면 베를린에서는 불매 동맹에는 효력이 없으며 대부분 버려진 걸로 드러났지만, 소도시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경제적 투쟁이라는 “흑사병”에 직접적으로 맞서는 동지들은 이로인해 괴로워한다.40)

 

그러나 이는 “사소한 죄악”일 뿐이다. 군국주의는 매일 일어나는 시답잖은 정치 투쟁에 끊임없이 개입하고 그 속내를 파보려는 걸로는 부족하고 무한하게 큰 열망도 가졌다. 군국주의는 혁명에 대한 모든 능숙하고 심각한 왕좌의 제단을 자본주의적 반동으로 가장 고결하고 위대하게 지지한다. 이전의 모든 거대한 혁명 운동 동안에도 마찬가지로 규모 면에서도 전반적인 저울을 던졌다. 이를 쉽게 설명하겠다. “어린 나폴레옹”들의 폭동이 일어났을 때 1830년 7월, 1848년 6월, 1871년 5월, 1852년 12월 2일에 가시로 뒤덮은 섬뜩한 월계수로 장식한 회관을 쓴 자본주의적 군국주의와 파리의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은 이전에도 다루었다. 1839년 영국에서 일어난 뉴포트(Newport)와 버밍엄(Birmingham)에서 10명이 사망하고 50명이 부상을 입은 차티스트(Chartist) 대학살에서 특히나 흥미롭다. 러시아 전체는 지난 2년 동안에 차르의 전제 군주제로 잔혹한 야만적 만행을 저지르는데 조력하고 계엄령이 내려진 불행한 나라를 공동묘지로 바꿔놓은 군인들은 주먹, 채찍, 칼, 소총과 총기 류로 해방 운동을 잔인하게 짓밟았다. “이 짐승 같은 놈들아!” 오직 혁명적 발전의 전진에는 혁명 세력들이 보여준 행동력과 필연적으로 손에 손을 잡은 군대의 해산만이 “기독교”적이지만 자살 계획을 옮길 수 없다는 걸 시기적으로 안전하게 보장한다. 반복적으로 언급했지만 러시아에서 자본주의 국가를 조사할 때는 대다수의 예외를 충분하게 고려한다.

 

중요한 부분에서도 첫 번째 벨기에(Belgian)는 선거전에서 상비군을 투입한 만큼 1902년 두 번째 벨기에 선거전에선 부르주아지의 특수한 군국주의적 기구에서 국가 정규군들을 계급투쟁에 이용하고자 투입했다. 1896년 5월 1일 오스트리아 빈의 프라터(공원)에서 시위를 벌인 노동자들을 상대로 군대를 동원하고 1897년에 프라하, 빈, 글라츠(Glatz), 1902년에 렘버그(Lemberg)와 트리에스트(Triest)에서 일어난 사건과는 별개로 오스트리아는 특히 1905년 선거전에서 대규모의 군국주의 정치적 행위에 나선 두 번째의 훌륭한 사례를 제공했다. 알다시피 보헤미아(Bohemia)는 특히 내전의 현장으로 변질할 시점에 처해 있었다.41) 1905년 11월 5일과 28일, 선거 시위가 열리던 날, 프라하에서 파업을 벌이던 광부들은 동시에 혼잡하게 군대가 몰려들어 주변을 포위하고 높은 고지를 선점하고 발포 준비를 마친 포병들은 대략 80명을 사살했지만, 실제로는 경찰들이 저질렀다.

 

이 사건은 이미 이탈리아의 항목에서 언급했었다.

 

다시 독일로 돌아와서, 독일에선 모든 나라들에 반군국주의 선전에서 상비의 무기고를 지키는 가장 유능한 무기들 중의 하나로 연설을 알린 한 장성 장군은 병사들에게 “안식일을 지키라”는 네 번째 계명에 대해서도 미심쩍은 해석을 전했다. 이 장군은 1895년 세단(Sedan)의 날 근위병들의 연회에서 “폭도”에 맞서는 유명한 연설을 전했을 뿐만이 아니라 1901년 3월 28일에는 알렉산드리아(Alexandrians)에서 유명한 호소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헌법"의 안전한 대들보인 프롤레타리아트들은 군사적 무장과 랑겔(Wrangel)의 기습을 의미했다. 실질적으로 부르주아지들은 거의 모든 전선을 저버리고 1848-1849년에 독일 혁명의 생득권을 불리하게 남게하고 파렴치하게 강탈하고 짓밟았다. 1870년 9월 보옌(Boyen)-로첸(Loetzen) 연쇄 사건과 비스마르크 푸트카머(Puttkamer)의 피비린내 나는 기억을 상기해보자. 악명 높은 사회주의 법을 재촉한 19세기의 영웅들은42) 고뇌하는 노동자들을 거리로 내몰거나, 군대의 칼로 난도질하고, 소총과 포탄의 파편으로 뒤덮으면서 대단히 예술적이고 정정당당한 방법으로 보여주기를 고대하고 갈망했다. 5월 축제43)와 독일의회 선거의 사례에서도44) 군대가 막사에서 채비할 태세를 갖추었다는 사실은 비교적 최근에도 너무 잘 알려진 사실이다. 1896년 작센(Saxon) 선거권 도난과 1905-1906년 작센 주민들의 “화해”를 위한 군대의 관여와 관련한 사건들도 마찬가지로 잘 알려졌다.45) 1905년 11월에 함부르크(Hamburg)에서 열린 “피의 수요일” 선거 시위는 경찰의 칼과 권총으로도 충분했고, 함부르크의 원주민으로 이뤄진 군대가 그 주위를 지켰다. 자유로운 한사(Hansa) 마을에 두 명의 시체들이 포장도로를 장식한 건 경찰의 작업 덕분이었다.

 

1906년 1월 21일은 자본주의의 옹호자들이 가장 큰 영광을 누리는 날이었다. 베를린의 포장된 거리에서 총성이 울려퍼진 걸 들은 사람들은46) 이 날에 군국주의의 마음과 영혼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이 기관총성은 현재에도 여전히 귓가에 반향해서 울리며 아낌없이 무자비하고 꾸준한 결의로 군국주의에 맞서 임금을 위해 투쟁하는데 박차를 가할 것이다.

 

1906년 1월 21일, 부끄러운 프로이센의 3급 선거제도를 반대하는 시위가 발생했다. 그러나 쿠데타로 반동적인 의미에서 국가 헌법을 수정하는 문제였다면 군국주의가 칼을 풀고 탄환을 발사하는 성향이 있다는 걸을 알고 있다. 그리고 최근 호헨로헤(Hohenlohe)와 델브뤼크(Delbrueck)의 폭로에는 1890년에 비스마르크가 제국 의회를 해산하고 선거권을 도난하고 프롤레타리아 대중들을 거리로 내몰아 총과 소총에 직면하고, 속수무책의 노동자 대열을 박살내서 사회민주주의를 무너뜨리고47) 프롤레타리아 시체들의 무덤에는 반동적인 비스마르크-융커들이 테러 행위와 강압으로 무서운 요새를 건설했다. 게다가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독일 황제는 이 계획을 승인하지 않을 거라는 소식도 있었다. “노동자들의 근거가 충분한 불만을 납득하고, 모든 사건들에 노동자들의 요구를 충족하고자 마주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 노동자들은 노동자의 한 근거들을 지니고 요구하는지에 대해 지배계급과 완전하게 서로다른 견해가 있다는 걸 알고 있으며 독일 북부에서 매우 세력 있는 모임들이48) 독일 의회 선거권에 대한 모든 사건들에 취한 적대적인 태도는 더욱 두드러졌으며, 호헨로헤(Hohenlohe) 회고록에서도 폭로했지만 이전의 공산주의자 미구엘(Miguel)도 이런 권리에 대해 가장 적의에 찬 적대를 표시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소구경 소총과 대구경 대포의 수단으로 사회적 문제에 대한 "군사적 해결책"에 대한 위험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가까이 다가왔다.49) 최근의 예고에 따라 헬무트 폰 몰트케(Helmut von Moltke) 참모 총장이 제국의 수상이라면 악명 높은 군사 법정 당의 승리를 의미 할 것이다.50)

 

세계 역사상 파편적인 왕자들, 파편적인 융커들, 파편적인 장군들이 부족했던 적은 없었다. 모든 걸 대비해야하며, 잃을 시간조차도 없다.51)

 

정치투쟁에서 군사회

 

군사회는 당연하게도 눈을 속이고 침묵하기 때문에 독일 재판부가 볼 수 없도록 매우 격렬하게 정치 활동을 하는 건 자연스럽게도 명백하다. 선거 기간 동안에 이런 단체들을 어떻게 동원하고 회원들이 야당의 정치 조직을 떠나도록 강요하는지는 누구나 알고 있다. 군사회는 집회 장소에서 계급 의식을 지닌 노동자들을 추방하고 “왕에 대한 충성”을 드러낸 건 언급할만 하다. 앞에서 제시할 두 가지 신선한 사실은 다음과 같다. (1) 1909년 10월에 찍은 “전직 16사단 군인 협회인 뒤스부르크 비크(Duisburg Beek) 육군 사단은 1906년 10월 광부들의 집회를 위해 빌려준 뒤스부르크(Duisburg)의 카이저호프(호텔)를 불매 운동하기로 한 결정과 (2) 집회장을 빌려주고 노동자들을 호텔을 사용하도록 허락한 호텔 주인을 작센의 (Saxony)의 군사회에서 추방한 사실이다.52) 노동자들이 잘 조직된 작은 마을에서도 바람이 세차게 부는 수단들로 맞서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 범주에 속하는 소재들은 소규모로 싸우는데 사용하고자 체계적으로 수집할만 하다.

 


평화를 위협하는 군국주의

 

민족주의 모순에는 인구 증가로 인한 국가 확장의 필요, 자연적으로 재산을 보유한 토지의 합병 필요, 국가적 재산인 지배 계급의 재산을 늘리고, 그리고 국가를 자급자족으로 전환해서 구성원을 자급자족하려는 시도, 생산과 관련해서 자급자족하는 단위로 관세를 보호하는 정책을 확장하려는 자연스러운 경향들에는 현재에도 국제적인 정치에도 팽팽한 긴장을 생산해서 더 큰 규모의 국제적 분업에 직면해 성장을 줄어들게 한다는 사실에 직면한다. 한 국가 내에서 외국과의 연락을 촉진하는 필요, 일반적인 문화적 수준, 특히 정치적 발전 단계에서 대조에는 국제적인 정치적 긴장을 생산할 수 있다. 이미 살펴봤지만 현재에 국제 전쟁에 연루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정치적 긴장에는 세계 경제 내에서 개별적인 국가들의 경쟁, 세계 무역, 복잡한 세계 정책, 특히 식민지 정책으로 인해서 발생한다. 이런 긴장들을 비난할 주된 사람들에는 산업과 무역의 확장에만 흥미를 두는 권력자들이며, 이들은 전쟁의 성공에만 흥미를 둔다고 지적할 수 있다.

 

군국주의는 현저한 방법들로 정착한 상비군들의 존립에는 그 자체로도 국제 평화에 대한 위협이자 전쟁도 위협하는 독자적인 위험이다라는 사실에 눈을 감을 수 없다. 그리고 이런 “끝없는 나사”들인 군사적 부담을 증가할수록 군사적 우월을 확보하려는 풀리는 순간을 놓치지 않거나 군사력의 관계에서 불리한 변화를 막고자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군사 전투를 개시하는 사실과는 완전히 별개의 목적이다. 알다시피, 이런 성향은 모로코 전투에서 프랑스에 영향을 미치는데까지는 실패했지만 전쟁이 발발했다는 자체적인 사실보다는 전쟁이 발발한 시기를 결정한다. 그러나 상비군은 민병대보다 훨씬 적은 규모로도 현대적인 전사들의 사회적 계급, 즉 초기에 전쟁 훈련을 받은 계급, 전쟁에서 모험과 승진을 모색하는 정복자 계급에게 특권을 준다. 이 범주에는 전쟁의 사례에선 도끼를 갈고, 무기, 군수품, 전함, 말, 장비, 군복 소재, 운송 수단 및 식량보급을 공급하는 군수업자 계층들이 속한다. 물론 적은 규모지만 민병대가 거주하는 지역에도 존재한다. 이들 집단은 “알고 보면” 국가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동시에 전쟁과 평화에 대한 표면적인 결정을 내려야하는 권력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군국주의를 악용하여 처음에 획득한 영향력을 누런 황금으로 바꾸고 프롤레타리아의 시체를 이윤의 제단에 올려 대학살로 희생하고자 한다. 식민지를 지지하는 선동자들은 “친애하는 조국”을 위험하고 높은 비용이 드는 모험으로 몰아넣고, 선동자들은 해군을 지지하면서54) 같은 조국을 이외의 방식에서 구하고, 선동가들은 다시 큰 이득을 얻는다.

 

따라서 상비군들과 강경한 애국적인 군국주의 정신에 맞서 싸우는 수단들은 민족들의 평화에 대한 위험에도 맞서 싸운다는 걸 의미한다. “평화를 바란다면 전쟁을 대비하라”는 오래된 속담에는 군국주의 국가에 둘러싸인 일부 개별적인 국가에 적용할 수 있지만, 사회민주주의가 직접 국제적으로 선전에 맞서는 자본주의 국가 전반에도 결코 적용할 수 없다. 그리고 이 속담에는 대조적으로 상비군을 수립해서 전쟁에 대비한다는 필요를 덜 제기하지만, “평화를 바란다면 전쟁에 대비하라”는 이 속담의 반전에는 상비군을 투입하는 방법으로 평화를 보호한다는 건 전쟁을 매우 높게 유발할 정도다! 우리 시대에도 침략적인 경제와 정치적인 제국주의 사례에서도 상비군은 실제로도 전쟁을 준비하는 적합한 형태다.

 

 

 

그러나 민족들의 평화에는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의 관계를 지나서, 인류의 문화적 관계에 부합하는 건 사실이지만, 모든 평화를 방해하는 자본주의적 기질들의 총합이자 본질에 해당하는 군국주의와의 투쟁에는 민족들 간의 불화를 부른다는 건 사실이다. 요컨대, 세계 대전을 심각하게 위협할 수 있는 건 프롤레타리아가 임금에 대한 자랑스러운 문화적 투쟁이며, 프롤레타리아는 자신들의 생명적인 관계이기도 한 임금을 위해서도 투쟁해야하며, 여타의 어느 계급들도 프롤레타리아의 임금에 대해선 큰 흥미를 두지 않으며 투쟁을 벌이는 건 프롤레타리아만큼 중요한 선의적인 몽상가들 중에서 그 규칙들을 입증하고자 한다.

 

군국주의는 자국의 평화를 방해하고 평범한 사람들에게 짐승으로 굴 뿐만이 아니라 무거운 경제적 부담을 심어주는 걸로는 모자라서 세금과 관세들의 의무적인 수단들에서 가해서 압박을 주고, 뵈르만(Woermanns), 피셔(Fischers), 폰 티펠스키스(von Tippelskirchs), 포드비엘스키스(Podbielskis) 회사 등에서 부정부패로 인해, 이미 계급적인 분리에서 오는 충분한 고통을 평범한 사람들이 겪는데도 사회적 계급들로 분열할 뿐만이 아니라, 군사적인 학대와 군사 정의로 인해서, 특히 모든 전진들의 정도에 강력하고 유력하게 제동을 걸면서 국내의 평화를 방해하고자 한다. 인류의 발전이 필수적이라고 보는 사람들에게, 군국주의의 존재는 그런 발전을 평화롭고 한결같이 이루는데 가장 큰 장애물이며, 그 사람에게 야생에 놓인 군국주의는 자본주의의 우상들을 위한 피에 붉은 황혼들과 마찬가지로 필요로 존재한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난제.

 

군국주의를 폐지하거나 성취할 수 있는 한으로 약화하는 건 해방을 위한 정치적 투쟁에서 생명이 걸린 문제다. 군국주의는 전투의 방법과 형태를 훼손하고, 그러므로 결정적으로 정치적 투쟁에도 영향을 미친다. 비무장한 사람들, 프롤레타리아 위에서 고도로 발전한 기술과 건조한 전략의 결과로, 군대의 엄청난 규모, 지역적으로 불리하게 계급적으로 분리한 결과,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 가운데 경제력 관계의 결과로, 특히 전자에 불리한 관계의 결과로 군국주의는 군사적 우월들로 생존의 문제로 더욱 치닫고 있다. 이런 근거들만으로도 다가올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이전의 어느 혁명들보다도 성취하기가 훨씬 더 어려울 것이다. 부르주아 혁명에서 주된 혁명적 부르주아지는 좁은 의미에서 혁명이 발생하기 오래 전부터 경제적인 권력에 대한 주도권을 쥐고 있었고 부르주아지들에게 경제적으로 복종하는 대규모 계급이 있었으며 정치적 영향력 아래에서 부르주아지들은 군국주의를 화로에서 밤을 고르는 고양이 발로 사용한다는 걸, 부르주아지는 먼저 봉건 제도의 낡은 잡동사니들을 부수고 지스러기 더미로 내던지기 전에 먼저 한도 내에서 매수하는 반면에, 프롤레타리아는 굶주리고 알몸을 드러낸 재산의 도움으로 부르주아지들이 축적한 걸 정복해야한다는 걸 명심하는게 중요하다.

 


1. 매우 흥미롭지만 “군사적 처벌에 대한 규정”(Regulations as to military punishments)을 참조하라

 

2. 군 복무 제도에서 병역의 의무를 기피한 탈영병들은 특히 먼 지역으로 안내한다. 프랑스는 명예로운 첫 20년 동안에 식민지 군대만으로 15,000명에 달하는 독일 탈영병들이 그들의 목숨을 잃어가는 동안에 비온빌(Vionville)의 살벌한 전투에서는 16,000명의 사망하고 부상을 입었다. - 다쿠미그 (Dacumig), 371쪽 등 참조.

 

3. 1885년 4월 18일자 만테펠(Manteuffel)의 명령서에는 “학대에는 부상을 입히고 명예를 파괴하고자 하며, 부하들을 학대하는 장교는 자신의 피를 흘리며 타락하므로 그 장교에게 충성과 용맹은 따를 수 없다. 한 마디로, 상관들은 상급자로 대장부터 중위까지 부하를 대하는 그대로 부하들은 따른다.”는 간파하는 내용을 드러냈다.

 

4. 그들은 여기서 “고도로 심각한 상태”, "정교한 고문", "야만적이고 퇴보한 폭력적인 방관들"에 대해 “좀처럼 신뢰할 수 없고”, 그런 장교들에게 훈련에서도 관리 체계를 “거의 했어야”한다고 밝혔다. 1895년 2월 8일, 보르베르트(Vorwaerts)는 1890년 2월 6일 자로 이 사례에서도 적용하는 제국 법령을 지휘하는 장군들에게 발표했다. 1885년 4월 18일 예나(Jena)와 만테펠(Manteuffel) 이후로 샤른호르스트-나이제나우(Scharnhorst-Gneisenau)의 법령과 마이닝엔(Meiningen)의 세습한 왕자의 법령에는 이외의 문제를 가져왔다.

 

5. 이를테면, 석면으로 된 실로 덮힌 철사가 끔찍한 부분을 했던 참혹한 그나이제나우 함선에서 발생한 유켄브로트(Eueckenbrodt)의 화재 사례를 참조해보자. 군인 고문관들에게 “군사 교육자”라는 별명으로 신랄하게 풍자했다. - 보르베르트(Vorwaerts), 1906년 9월 25일.

 

6. 1903년 4월 6일자 프랑크푸르터 차이퉁((Frankfurter Zeitung), 1904년 3월 4일부터 8일 까지의 제국의회 토론, 특히 베벨(Bebel), 레데부르(Ledebour), 뮐러 마이닝겐(Mueller Meiningen) 의원의 1903년 5월 6일, 13일, 14일, 21일자 보르바르트 연설도 참조하라. 또한, 1903년 4월 29일 발행된 육군 관보에 재게한 내각 명령은, 병사들의 고충을 제기하는 건 병사들의 의무가 아니라 권리임을 강조한다.

 

또한 1903년 5월 29일 군사 주간지에 따르면 세습한 왕자는 내던지고 퇴역할 의무가 있다는 사실이 “가장 고통스러운 감각”을 부른다고 했다. 무슨 말이 필요한가?

 

7. 이외에도 “프린츠 아렌베르그(Prinz Arenberg)와 아렌베르그 왕자”, 15쪽에 있으며, 그리고 다음, “군인을 학대하는 귀족”에 대해서 이어진다.

 

8. 1891년 2월 27일, 카프리비는 병사 학대와 연관해서 “교육받은 부사관은 잔인한 장교보다 우리에게 더 가치가 있다”며 “전자에는 비록 분개하더라도 자신의 기질에 휩쓸리는 일이 드물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납치할 수도 없고 교육받은 부사관들은 어디서 구할텐가?

 

9. 이를테면 1906년 12월 8일 자 브란덴부르크 자이퉁(Brandenburger Zeitung)을 참조하라.

 

10. 독일은 주요한 강에 의해서 형성한 이 군사 분계선을 인정하지 않았다. 본문에서. 병사들의 학대의 영역에선 적어도, 독일의 협조와 화합은 실현했다.

 

11. 도미그(Dauemig), 370쪽 및 기타 출처를 참조.

 

12. 1906-7년 상비군 614,362명, 1905-6년 해군, 40,672명.

 

13. 독일 남서부 아프리카에서 싸우는 병사 한 사람 당으로 독일 제국은 연간 9,500 마르크(475파운드)를 지불했다.

 

14. 이를테면 프랑스에서는 1905년에 1,101,260,000 프랑(44,050,400파운드)을 지불했다. 1870년 이후로 프랑스는 거의 4천만 프랑(100,000,000파운드)을 군사적 목적으로 (식민지를 제외하고!) 군사 목적으로 지출했다.

 

15. 그러나 미국에서도 전쟁 및 해군의 부처에서만 총합 720,000,000달러의 예산 중 240,000,000 달러나 단독적으로 먹어치웠다.

 

16. 코니그스베르거 볼크스차이퉁(Koenigsberger Volkszeitung)의 한 편집자는 1906년 가을에 수확 기간 동안에 휴가 부여에 관한 법령에 수준 높은 비판을 감행해서 이 부대를 명예훼손했다는 혐의로 1906년 가을에 무거운 벌금을 부과했다.

 

17. 1906년 11월 3일에 보르베르트(Vorwaerts)에서 이 부대를 지휘하던 장군의 답장을 참조하라.

 

18. 1903년 1월 30일에 시작한 파업은 2월 1일에 승리로 끝났습니다, 이미 1903년 3월 10일에 파업 금지법을 의회 회의실에 상정했다. 4월 6일에 총파업을 선언했고, 4월 9일에는 파업 금지법은 표결에 부쳐졌다, 결국 4월 13일 총파업은 좌절하고 마무리했다.

 

19. “병사들의 소책자”(The Manuel du Soldat), p. 9. 참조.

 

20. “병사들의 소책자”, p. 8. 참조.

 

21. “사회주의 운동”(Mouvement Socialiste), 5월에서 6월, 1906

 

22. 한 예시로, 새로운 시간들(the temps Nouveaux), 1905년 12월 16일 안코나, 타우리사노(Ancona, Taurisano) 항목 참조.

 

23. “그들의 조국”(Leur patrie), p. 99.

 

24. 이런 관계는 “재크(Jaeckh’s)의 국제적”(International)”, p. 69에서 이어지며 참조.

 

25. 1905년 “사회주의 운동” 1905년, 9월 1일에서 15일과 관계를 참조.

 

26. 세부적인 설명으로는 “사회주의 운동”, 155호와 156호, “사회주의자”(Vie Socialiste), 첫 해년, 15-18호를 참조. 1905년 10월-11월 샤를롱(Châlons)에서 열린 국민의회는 사회주의 분파의 의회 조사 심의요청을 거부하고 리모주(Limoges)와 콘스탄틴(Konstantin)의 보고서를 첨부한 포괄적인 결의안을 처리했다.

 

27. 템즈 누보(the temps Nouveaux), 1905년 12월 16일.

 

28. 오래 전에 파업 중인 군대(L' armeée aux grèves)라는 소책자는 큰 파급력이 일어났다.

 

29. 장 조레스가 창간한 1904년 “인류”(Humanite), 1906년 10월 9일.

 

30. 좀바르트의 “왜 미국에는 사회주의가 없는가”(Warum gibt es in den Vereinigten Staaten Keinen Sozialismus?) p.129 참조

 

31. 힐퀴트((Hillquitt), “미국 사회주의의 역사”, p. 211 참조. 주로 북미와 관련해서 여기에 사용했다.

 

32. 1890년 6월 26일 시카고 무정부주의자들을 사면했던 바로 그 앳겔드(Atgeld)다.

 

33. 위와 관련해서 힐퀴트, 같은 책 p. 190쪽과 p. 209쪽 및 p. 236쪽, 306쪽 이하 참조.

 

34. P. 314

 

35. P. 53

 

36. 1899년 5월 19일, 독일 황제는 그와 대기하던 대표단에게 “만일 이 운동이 사회민주주의 과격파들을 배반한다고 인식하고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사람들을 불법 저항으로 선동한다면, 나는 가차 없이 엄격하게 개입할 것이며 내가 가진 권력을 사용하고자 할 것이다 그 권력은 위대하다”고 언급했다. 프라이지니게 차이퉁(Freisinnige Zeitung)에 따르면 그는 “당국에 대한 저항을 조금이라도 보인다면 모두 격추할 것”이라고 추가적으로 언급했다.

 

37. 1906년 9월 란다우(Landau)-카이저슬란턴(Kaiserslantern)에서 발생한 사건을 참조.

 

38. 1906년 12월 8일자 “사회민주주의지”(Sozialdemokratische) 21호, 이와 관련해서 세자르(César) 목사에게 이름난 군사회의 “덩컨(dunken) 난투극”.

 

39. 1906년 12월 1일자 라이프치히 볼크자이퉁(Leipziger Volkszeitung)에 실린 “작센( Saxony) 주 저격병과 소총병 군사회”의 항소를 참조.

 

40. 이 범주로는 1903년 제국 의회 선거 기간 동안에 사회 민주당에서 선거인 목록들을 돕고자 선거인 목록 복사본들을 전시해서 관리하고 촉구한 슈판다우(Spandau)의 가게 주인들에 대한 군사적 불매 운동도 포함한다. 숙박시설 주인들은 전시된 명단을 강제로 철거했었다. 제국의회 회상록, 618호, 1905-1907 참조.

 

41. 또한 1905년 12월에 유긴들리히르 아르바이터(Jugindlicher Arbeiter)의 기록에 따르면 16세 소년 조한 후박(Johann Hubac)의 총격 사건을 참조.

 

42. 팔츠(Palatinate) 주에서 루드비히스하펜(Ludwigshaven)은 1887년 선거 전 일요일에 군대에 의해 사실상으로 점령했고, 사회민주당원들의 정신적인 존재들만이 소총이 난사하는 걸 막을 수 있었다. “만하임(Mannheim) 당 대회에 대한 각서(Memorandum to the Party Conference at Mannheim)”, 1906년 p.9 에서 이어진다. 1889년 12월 12일 자 호헨로헤 회고록(Hohenlohe Memoirs)에 기록한 독일 황제의 기록 중에는 “베를린 시의회에서 사회민주당이 다수당이 되면 사회민주당은 시민들을 약탈할 것이고, 황제는 궁전은 열리고 약탈을 하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제서야 시민들은 황제에게 용서를 애원하며 청할거라고” 진술한 대목은 이와 관련해 흥미롭다.

 

43. 이는 특히 1890년 메이데이 기념일 첫날에 적용했는데, “군사당”의 군사적 선동자였던 1893년 9월 14일, “호헤니체 회고록”에는 골 때리고 증오하는 사회민주당과의 피흘린 합의를 기회로 삼은데 만족했을 것이다. “소르게셔 브리프웨셀”(Sorgescher Briefwechsel) “소르게 통신”(The Sorge Correspondence), p. 334와 p. 337를 참조.

 

44. 1903년 실레지아(Silesia)의 상부에 로라후에트(Laurahuette)와 자브르체(Zabrze)에서 일어난 선거적 폭동을 참조.

 

45. 1906. 1906년 4월 3일 자 라이프치히 볼크자이퉁(Leipziger Volkszeitung)에서 공표한 1906년 1월 21일자 재발포 명령서 참조.

  

46. 각주 이전에 색슨(Saxon)에서 재발포 명령서도 참조.

 

47. 알다시피, 함부르크 신문(Hamburger Nachrichten)은 이 계획을 1892년 3월에 한 번 더 폭로했다.

 

48. 사회민주주의 선거자를 위한 핸드북(the Handbook for Social-Democracy Electors), 1903 참조. 독일 주 의회 선거인을 위한 핸드북(Handbook for Landtag Electors) 1903, 과 무엇보다도, 함부르크 신문(Hamburger Nachrichten), 크로이츠차이퉁(Kreuzzeitung), 도이체차이퉁(Deutsche Tageszeitung), 전단지로 발행한 선거인 안내서들은 1906년 12월 13일 독일 제국의회 해산과 관련해서 이 사례에서 불리한 선거 결과를 대비해서 연관했다.

 

49. 1905년 5월, 독일 제국의회에서 순종적인 융커 콘 올덴부르크 야누샤우(Oldenburg Januschau)가 호소한 프로이센 무력에 대한 호소와 코니츠(Konitz)에서 열린 “농민 연합”(Union of Agrarians) 지방 회의에서 영향력 있는 사설 고문단들의 모든 사건들에 대한 진심 어린 지지가 있었다.

 

50. 베를린 일간지(The Berliner Tageblatt)는 이 떠오른 사람에 대해 이렇게 묘사했다. “헬무트 폰 몰트케(Helmut von Moltke)는 단호한 반동주의자로 평판이 높으며, 군인 특유의 정직하고 즐거운 성질로 단련했으며 심지어 심령술을 배운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는 학설적인 사람이라는 의미에서가 아니지만 “침착한 담력”에 홀려있고, 소총을 쏘고 칼로 베는 정치에 종사할 준비를 마치고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는 사람이다. 선동자들이 간절하게 원했던 성격들이 그 사람의 주위에 있다!”

 

51. 비극에서 풍자적인 요소도 부족해선 안 된다는 의미에서 1904년 튀링겐(Thuringia)에서 힐드부르하우젠(Hildburghausen)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공연한 희극을 언급하겠다.

 

기술 전문 학교의 학생들은 소란스러운 젊은 부르주아들에게 충분하게 관대하지 못했기 때문에 경찰들에게도 분노했다. 어느 날 밤에, “지나치게 들 떠 있던” 학생들은 경찰서를 습격했고, 유혈 사태는 없었지만 보병 중대가 출동해서 격퇴할 수밖에 없었다. 마이닝엔(Meiningen) 주 법원에서 일어난 이 사건의 속편도 상기해 볼 만 하다.

 

52. 이와 관련해서 “작센 군사회 연합”(Union of the Military Societies of Saxony) 회장의 해명이 1906년 12월 1일 자 라이프치히 알게마이네 차이퉁(Leipziger Volkszeitung)에 실렸다.

 

53. 또한 크로이츠차이퉁(Kreuzzeitung) 1906년, 600호에 실린 폰 제플린(von Zeppelin) 소장의 기사를 참조.

 

54. 1906년 12월 5일자 라이니쉬 베스트팔렌 차이퉁(Rheinisch Westfaelische Zeitung)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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