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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중앙공산당(KCCP)

군국주의

 

공동발의

 

군국주의의 본질과 의미에 대하여

 

군국주의는 우리 시대의 가장 빈번한 전쟁이며 번잡하고 혼란스럽고 다면적인 현상을 의미하며 동시에 그것의 기원과 성격의 방법과 여파를 아는 건 흥미롭고 중요하다. 군국주의는 계급조직 사회의 생활에도 뿌리박힌 현상이다. 아직은 개별국가와 지역의 특수한 자연적,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상황을 다각도의 형태로 드러나는 사회적 제도와 비슷하다고 추정할 수 있다. 군국주의는 대부분에 사회적 제도의 생활에서 가장 중요하고 필수적인 증후이다. 왜냐하면 군국주의는 가장 강하고 대부분 자기보호 본능을 가진 계급에게 민족적, 문화적, 독점적으로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군국주의의 역사는 인간의 진화와 강력한 권력의 역사를 중심으로 온전한 의미를 드러내며

쓰여진다. 자본주의적인 군국주의의 정밀한 분석은 자본주의에서 가장 은폐된 경찰의 근원을

해부하는 걸 의미한다. 군국주의의 역사는 동시대에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인 역사에 전반적인 국가와 민족 사이의 문화적인 갈등관계와 개별국가와 국가단위 내에서 계급투쟁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런 역사를 시도하는 건 의문의 여지도 없지만 분명하다.

 

사회적 관계에 대한 힘의 기원과 기반

 

모든 힘의 사회적 관계에서 결정적인 지점은 마지막 수단이고 사회적 힘으로 보기에 물질적 힘은 우선적이며 한 사람만의 힘1)으로 드러나진 않는다. 게다가 한 사람은 다른 사람과 동등하며 순전히 수칙적인 비율로 누가 다수인지로 결정한다. 수칙적인 비율은 단순하게 이익관계가 모순되는 사람들이 속한 모임들의 수칙과 일치하진 않는다. 모든 사람들이 특수한 한 사람의 근원적인 관계까지 정확하게 아는 건 아니기 때문에 계급의식에서 지적이고 도덕적인 발전과 광범위하고 집중적인 단계를 중심으로 결정한다. 그리고 지적이고 도덕적인 단계는 개별적인 이익집단인 계급으로 결정하지만 반면에 정치적, 사회적 지위는 강력한 반응을 보이더라도 다양한 결과와 권력관계의 표출을 대변한다.

 

경제적 우위는 직접적으로 복잡한 수칙적인 비율을 대신할 수 있도록 돕는다. 왜냐하면 경제적 압력은 지적이고 도덕적인 단계의 수준에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계급적 이익관계의 인식에서도 암묵적으로 완전하게 계급적 원칙에 거의 순응하고 행동하도록 생산하는 경향이 있다. 지배계급의 정치적 조직이 지배적인 이익집단에게 유리한 수칙적 원칙을 “수정”하고자 증가하는 힘을 빌려준다는 건 알려진 모든 기관에 대해서도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 경찰, 사법기관, 학교와 교회도 여기에 포함되며 기관들은 정치적 기구로 세워지고 행정적 능력으로 고용한다. 처음에 두 가지는 주로 협박과 폭력으로 위협해서 작동한다. 학교는 주로 핵심에 도달할 수 있는 계급의식에 대한 모든 과정을 저지하고자 한다. 교회는 악을 드러내는데 눈이 먼 사람들에게 가장 효과적이고 미래의 삶에 대한 그들의 즐거운 욕망과 지옥이 있는 고문실로 협박하면서 경각심을 준다. 그러나 습득한 수치적인 비율도 절대적으로 힘의 관계로 결정하진 않는다. 무장한 사람의 손에 있는 무기는 빈번하게 신체능력을 증가하게 한다. 무장기술은 결과적으로 외부적인 무장과 전략을 포함하여 공을 들여서 이 힘을 증가시킬 수 있는지에 따라 개발에 의존하고자 한다. 지적이고 경제적인 우위는 한 집단의 이익관계에선 순전히 무기를 소지한 신체적인 우월성이나 더 나은 무기를 가진 우월한 계급으로 둔갑한다. 그러므로 계급의식이 강한 다수파가 계급의식이 강한 소수파를 완전히 지배할 수도 있다. 계급적인 분열이 일어나서 경제적 지위를 결정하더라도 계급에 따른 권력의 정치적 관계는 한 사람이 차지하는 경제적 지위에 의해서만 결정된다. 둘째로는 무수한 지적이고, 도덕적이고, 물리적인 수단을 처리하는 경제적으로 지배적인 계급에게 규제된다. 그렇다고 이 모든 행사하는 힘의 집중이 계급의 구조에 영향을 미치는 건 아니다. 이 구조는 의존하지 않는 위치에 의해 세워지기 때문에 위치는 다수를 구성할 수 있는 한 계급에게 강제한다. 자연의 명령이 조화를 이룬다면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계급은 소수의 집단을 구성할 수도 있다. 계급투쟁이나 변화에 대한 정치적 힘의 수단도 없이 전자는 국가에 의존하며 남는다.2) 그래서 계급투쟁은 오직 한 계급의 관계에서 희생과 혁명적 실천을 준비하고 수용하며 계급의식을 발전하기 위한 투쟁일 수 있다. 이 투쟁의 중요성은 계급의식을 세우거나 억압하는데 있어 자연적이고 지적인 힘의 수단을 차지하는 물리적 힘의 증대를 포착한다는 걸 의미한다.

 

이 모든 것에서부터 사람들은 무기의 기술이 사회적 투쟁에서 중요한 기능으로 무엇을 하고있는지도 파악해볼 수 있다. 경제적 요구를 할 수 없는 소수파가 적어도 이 기간 동안에는 “가장 집중된 정치적 행위”인 군사작전으로부터 다수파와 전투하고 유지할 수 있다. 지배할 수 있는 위치를 유지할 수 있는지도 이 기술에 달려있다. 계급의 분열을 떠나서 힘의 관계에서 발전은 현실적으로 모든 무기기술의 발전과 연관되어 있다. 모든 사람들, 심지어 최하층에 있는 사람들도 다수의 원칙과 민주주의가 지켜지기 어려운 조건 아래에선 기본적으로 동등하게 좋은 무기를 생산하며 그 사회는 일정한 정치적 형태를 보일 것이다.

 

앞서말한 위의 주장이 옳다면 계급에서 경제적 분열이 일어난 경우에만 해당한다. 발전의 자연발생적인 과정은 경제와 기술개발의 결과로 나타난 계급으로 나누는게 방어술과 전략을 포함해서 무장기술의 개선과 평행하게 진행할 수 있다. 따라서 무기생산은 더욱 전문화된 직업이 된다. 게다가 한 계급이 다른 계급와 경제적 우위를 좌우하는 건 계급지배이기 때문에 무장기술의 개선은 지속적으로 무기상품3)을 생산하면서 더욱 구체적이고 비싸지게 된다. 무기생산은 점차 경제적으로 지배적인 계급이 독점하면서 민주주의의 물리적 기반은 제거된다. 그렇다면 핵심은 누가 소유하고 있는지가 중요해진다. 한때 정치적인 권력의 수단으로 소유해본 계급이 발생할 수 있으며 경제적 우위를 상실한 후에도 적어도 한동안은 정치적 지배를 유지할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지적에 연연해할 필요는 없다. 권력의 정치적 관계에서 형태와 성격만이 무기기술을 결정하는 건 아니며 계급투쟁의 형태와 성격도 마찬가지다.

 

모든 민간인들이 동등하게 무장하고 그들의 무기를 책임지는 것으로는 민주주의의 지배를 영구적으로 보존하기에 충분하진 않다. 한 스위스의 사건이 보여주듯이 무기를 균등하게 분배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분배에는 다수파로부터 떨어져 소수파가 되려고 하거나 소수파가 타격을 위해 잘 조직될 위험성을 제거하지 않는다. 전체 인구는 무기생산이 민중들의 손에 있을 때만이 영구적이고 동등할 수 있다.

 

무장기술이 할 수 있는 민주화의 역할에서 불워리턴은 주목할 공상적 정치체제를 “다가온 경쟁”에서 분명하게 묘사했다. 그의 저작 중에선 알려진 작품은 아니다. 이 책에서 불워리턴은 모든 민간인들이 쉽게 전기와 유사하고 신비한 힘을 이용하거나 옮기면서 작은 막대기를 수단으로 어느 시점에서 성취할 수 있는 가장 처참한 결과를 가져올 기술의 높은 발전을 전제한다. 그리고 자연의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인간의 지배가 실제로 쉬운 일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예상해볼 수도 있지만 비록 먼 미래에는 학살의 기술을 응용하는 걸 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를 것이다. 왜냐하면 인류의 전멸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기술적 진보는 어느 정도에선 금권정치에 의해 착취되는 대신에 무기를 제작하는 방법을 가져오며 다시 어느 정도 민주주의의 광범위한 기반에서 소유가 될 것이다.

 

군국주의의 역사에서 드러난 몇 가지 항목.

 

계급으로 분열하지 않았다고 알려진 하위 문화권에선 무기는 지배를 돕는 방어수단만이 아니라 작업도구이기도 하다. 돌과 막대기, 창과 화살촉, 활 이외에도 무기와 도구는 원시적 성격으론 언제든 쉽게 구할 수 있다. 남편과 아내 사이의 가장 원시적인 분업을 제외하고는 기록적으로 훌륭한 노동의 분업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이 적어도 남성과 여성 중에 한 성의 구성원들이 동등한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고 경제적이거나 정치적인 힘의 관계가 아직은 없었기 때문에 그러한 힘의 관계를 지원하고자 무기를 사용할 순 없었다. 설령 힘의 관계가 존재했다고 하더라도 무기를 사용하기 위한 수단으러 사용하진 않았다. 힘의 관계는 원시적인 기술과 함께 오직 민주적인 힘의 관계에서만 할 수 있었다.

 

하위 문화권에서 무기가 공동체에도 사용한다면 기껏해야 개인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지만

계급이 분열하거나 힘의 기술이 더 크게 개선될 때 그들이 의도하는대로 상황은 달라진다. 하층 농업의 원시적 공산주의와 함께 여성이 지배하는 구조에 있는 사람들은 사회적 지위가 없었으므로 평균적인 환경에서는 계급지배의 정치적 관계를 알 순 없었다. 일반적으로 군국주의는 의도를 감춘다. 군국주의의 외부적인 요인에는 전쟁을 준비하도록 강요하고 임시적인 군사적 전제주의를 생산했으며 유목민들 사이에서는 이전부터 지배하던 계급으로 분열했기 때문에 빈번하게 일어난다. 개인적이고 계급의 위치에 따라서만 분할된 순전히 무력적인 조직으로만 상응하는 그리스와 로마의 군대조직을 상기해본다면 계급적 지위에 따라 무장의 질이 좌우되었다. 게다가 기사들의 봉건적 군대도 상기해볼 때 대지주의 병사들은 질 나쁘게 무장하고 도보로 다녔으며 패트리스 라로크에 따르면 전투에 직접 충돌하는 전투원보다 대부분 전투부대의 지원을 담당했다. 당시에는 하층민들의 무장을 허용하진 않았고 일정한 도움을 주긴 했지만 실제론 국가가 최소한의 안전도 개인에게 보장해주지 못했기 때문에 외부의 적을 보호하거나 가능한 공격에 대비해서 사람들은 무장할 필요성을 있었고 국가와 민족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사회의 개별적인 계급의 무장에서 차별화는 힘의 기술을 가능하게하며 힘의 관계를 유지하고 단련하는데 고용된다. 이 물음의 측면에서 로마의 노예전쟁은 기억해둘만하다.

 

이 물음에 독일의 농민 전쟁과 독일의 도시전쟁도 중요하고 불을 지핀다. 14세기에 독일의 도시전쟁의 결과로 인해 직접적으로 불리했던 근거가 첫째로는 교회의 봉건군들의 군사적 기술이 우월했기 때문이다. 14세기에 도시전쟁에서 전투했던 부대는 성공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1525년의 농민전쟁의 기간과 대조적으로 화기의 기술이 유난히 낙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도시의 거대한 경제적 결과로 인해 사회적 중심지가 지역적으로 제한되어서 좁은 범위 내에서만 밀집할 수 있었으며 상충적인 관계에선 상당한 혼란이 없었던 대표적인 사례였다. 게다가 처음부터 마을을 건설하는 기술로부터 소도시와 요새는 봉건귀족, 교회, 황제와 같은 중요한 전략적 위치를 점령했으며 부대의 군사적 요소(방어시설)였다. 마지막으로 무기의 생산은 마을들이 담당했으며 시민들은 기술적 준비에 있어 모두 우월했기 때문에 기사들의 군대를 물리칠 수 있었다.4)

중요한 시각을 잃어선 안 된다. 같은 지역에서 함께 살거나 다른 계급 사이에서 소수적으로 산한 사회의 다양한 계급이 수행하는 중요한 부분을 간과해선 안 된다. 농민전쟁과 도시전쟁의 조사는 자세한 사실을 보여준다. 계급분산이 분산과 일치할 때 지역적으로 계급투쟁은 더 쉽다. 이 상황은 계급의식이 발전하는데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기술적인 관점에서 계급의식을 군사조직으로 연관하는데 도움을 주며 무기의 생산과 공급을 돕는다. 이러한 지역적으로 유리한 계급조직은 부르주아 혁명5)의 좋은 본보기였다. 프롤레타리아의 혁명6)은 대부분 거의 부재했다.

 

또한 현재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고용된 군대에서 군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경제적 힘은 물리적 힘으로 둔갑하며 메피스토의 사악한 격언에 따르면 “만일 내가 여섯 마리의 종마를 지불할 능력이 있다면 과연 그들의 기운을 받을 자격이 없겠는가?” “24개의 다리를 가진 것처럼 멀리 갈 수 있으며 바른 구실을 하는 사람이리라.” 그리고 또 다른 격언에 따르면, “나누고 지배하라!” 이 두 가지의 격언은 소위 말하는 엘리트 부대에도 적용할 수 있다. 반면에, 이탈리아인이던 콘도티에리는 프레토리안이 그랬듯이 무기, 군사작전과 전략적 기술을 소유한 자에 의한 정치적 권력에 무엇이 달렸는지 두드러진 방식으로 설명한다. 고용된 군인은 왕의 왕관에 뻔뻔하게 매수된 후에 그들과 공놀이를 했고 국가에서 최고 권력자의 타고난 후계자7)가 되었다. 우리는 열광과 전쟁이 나폴레옹과 그의 장군들, 불랑제들에서 군사적 권력으로 개인의 손에서 침략에 대한 명분을 준비하면서 반복되는 이 현상을 현재에서도 본다.

 

해방운동에서 독일전쟁의 역사는 군사조직과 전반적인 군국주의의 형성에서 외부에 대한 정치적 상황의 영향력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가르친다. 프랑스혁명에 대항했던 1806년의 연합전쟁에서 프리드리히 대왕의 봉건적인 상비군들은 프랑스의 시민군들에게 격파되었다. 전쟁이 너무나 비참하게 끝났기에 무력한 독일의 정부는 다음과 같은 차선에 직면했다. 코르시카 정부에게 끊임없이 시달리거나, 전반적인 지원제도에 시민군과 자신의 무기들로 정복자를 물리치거나 존속하려는 욕망과 대중의 충동적인 자극은 대중을 후자에 합류하도록 강제했다. 독일에선 민주화의 위대한 시기가 시작했고 프로이센의 특수한 압력에는 국내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긴장을 완화시키고 돈과 자유를 갈망할 수 있는 투사를 원했다. 남성의 가치가 증가했다. 가치생산자로서 사회적 자질을 가진 장래의 세금납부자들과 물리적 힘과 지능을 타고난 신체적 자질이 있는 남성에겐 일반적인 곤경에 처했을 때마다 결단력을 습득할 수 있었고 열광적인 능력을 겸비하면서 환율이 증가할 수 있었다. 반면에 계급 차별화의 영향력은 낮아졌다. 군사주간지의 전문용어로 “프로이센 국민”들은 타국의 오랜 통치기간 동안에 그들의 모든 불만을 잊어버리는 법을 학습할 수 있었다. 흔한 사례로 재정과 군사적 문제는 대변혁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난관은 제거되었다. 전성기에 재정적으로 중요한 산업과 무역은 프로이센-독일의 하찮은 관료주의적 정신이 수용하는 한에서 위탁될 수 있었다. 적어도 정치적 자유를 도입하거나 약속했다. 사람들은 일어섰고, 폭풍은 분노하기 시작했다. 보편적인 제도 아래에서 해방전쟁 기간에 라인강 너머에 샤른호르스트의 그나이제나우 군대가 “세습의 적”을 몰아냈다. 그들은 대혁명의 프랑스를 약화시키고 그의 긴장된 세계를 경멸하게 할만한 제도를 구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민주적 조직은 아니었지만 샤른호르스트의 그나이제나우는 그 뜻을 세웠다. 독일 국민이던 흑인들은 의무를 다한 후에 합스부르크 가문으로부터

적절한 호의를 얻을 수 있었다. 칼스루에 결의안에는 레이프직의 민족전투를 이끌었으며 신뢰할 수 없고 저주받은 메트르니히 정권의 부질없고 가장 중요한 업적 중 하나인 제거되지 않고 반동적인 모든 악마들이 풀려난 후에 억압으로부터 해방운동의 전쟁에서 민주적 군대는 폐지되었다. 높은 수준의 문화를 이룩한 독일의 영토에선 군대가 무르익었을진 모르지만 동쪽의 엘빈의 보루시아인들의 몹시 현저한 문화적 무게는 갑작스럽게 민주적 군대와 충돌했고 가까이에서 민중들의 위대한 봉기들의 영광에 가까울 수 있었다. 군사조직에 대한 추상적인 검토는 사회적 분단 뿐만 아니라 무기의 기술이 발전한 정도가 마침내 군대의 구성과 규모에도 좌우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이를테면 대혁명적 운동에서 사용된 소형화기의 발전은 전쟁의 역사에서 가장 두드러진 사실 중에 하나였다.

 

참조

 

1. 그리고 물론 체력과 불가분한 관계인 지적인 능력도 남성에게 최대한의 체력 사용과 신체적 발전에도 영향을 미친다. 사실, 어느 정도는 체력의 한계를 요구한다. 이러한 신체적 힘으로 정복한 크기가 사회적 현상으로 얼마나 존재했는가는 경제적인 지위에 속하는 집단들과 관계한다. 이를테면 광범위한 규모와 균형적인 거래관계 사이에서 개인적인 집단의 관계가 발생할 때 권력의 사회적 관계를 결정할 수 있다. 더 중요한 측면은 후반부에 논의해볼 것이다.

 

2. 사회적 생산에서 인간의 생활은 인간의 의지에 의존하지 않는 분명하고 필연적인 관계인

생산적인 물질적 힘의 진화와 생산관계에서 분명한 단계로 부합할 수 있다. - 마르크스

 

3. 모든 종류의 군수품과 무기들 외에도 전기장치, 요새, 무장하기 위한 장비들, 군사통신체계(말, 무기, 이동수단, 도로와 교량의 건설, 내해상의 선박, 철도, 자동차, 전보, 무선 전신술)등과 망원경, 비행선, 사진, 그리고 군견도 상기해보자.

 

4. 또한 15세기 이탈리아의 발전이 여기서 중요한 관계를 보여주며 더욱 구체적으로 조사해볼 수 있도록 유도하며 핵심적인 구상을 확인해볼 수 있다.

 

5. 러시아의 초기 단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특수한 성격으론 1905년 12월에 광범위하게 일어난 무장봉기이다. 주목할만한 드러난 강인함에는 대부분의 마을주민들이 도화선으로 소수의 혁명가들과 협력해서 도시 게릴라전의 전술은 모스크바에서 아주 훌륭하게 발전했으며 획기적일 것이다.

 

6. 그래도 공장에서 함께 일하고, 노동자 계급의 숙소에서 함께 생활하는 건 고려해야한다.

7. 버크하르트(Burckhardt), p. 22. 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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