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날. 한 출판사로부터 거절 당했던 칼 리프크네히트 - <군국주의와 반군국주의>를 올려본다. 블랙 로즈 출판사 본이다. 저작권은 없고 무료 배포하겠다.
서문
드미트리오스 루소폴로스
리프크네히트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군대와 연관이 깊다. 지식인들이 내다 본 20세기 일련의 사건들 이후에도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그의 주장들은 사실로 인정하고 있다. 이제는 고전인 군국주의와 반군국주의의 재출간과 문헌을 보관하는 건 블랙 로즈 출판사의 의무이다. 이 자료는 방대한 비판적인 문헌 중의 하나로 여러 전쟁을 거치면서 인문주의자들과 반전주의자들에게도 영향력을 미쳤다.
물론 군국주의는 자본주의보다 앞서있다. 둘 사이의 관계를 구분하자면 리프크네히트는 군국주의는 자본가를 위한 계급으로 복무하고 있다고 언급한다.
“군국주의는 외부로부터 적을 보호하는 수단만이 아니라 계급으로 가시화되는 두 번째 조건을 가지고 있다. 군국주의의 계급적 모순은 자본주의와 노동계급의 해방에 반대하는 반동세력에게 지배적인 사회질서를 지지하고자 더욱 애쓴다.”
이 리프크네히트의 문헌은 1907년에 작성했다. 한 관찰자가 무단정치(stratocracia)로 이름붙인 첫 소비에트 공화국의 출범 이후에도 방대한 규모로 국가자본주의나 국가사회주의가 ‘적색’ 군국주의의 희생양이 될 거라는 사실은 1917년 이후에 그마저도 내다볼 순 없었다. 2차 세계대전이 종식하고 민족해방운동을 가속화하면서 식민지 국가들은 군수산업으로부터 대량무기를 구매하면서 국가권력을 강화했다.
특수한 비판으로도 반군국주의는 모든 군사기관과 경찰의 통제에 대한 “합법적 폭력”의 국가적 독점을 반대한다. 반대로 이는 반국가주의의 논리적 귀결이기도 하다. 반군국주의는 무정부주의와도 관련이 깊다. 군국주의는 18세기와 19세기의 민족국가에서 발생한 역사적인 성취가 선두적이라고 위장한다. 나폴레옹 치하의 프랑스가 징병제를 처음으로 도입했다. 군국주의가 국가의식을 창안한다는 사실은 루소를 포함한 대다수의 이론가들도 간과했다. 반면에 미셸 푸코는 군국주의가 감옥과 학교를 강화하는 규율로 보았고 병원은 절대적으로 규율 사회에 기여했다.
반군국주의는 언제나 국가와 국가적 통치권에 집중한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레닌이 제국주의를 비판했던 경고와 1961년에 미국의 대통령이자 전 장군이던 아이젠하워(Eisenhower)는 군·산업 복합체에서 경제와 산업적인 권력과 연관했다.
그러나 리프크네히트가 쓴 글에 대한 시각은 부족하며 완전하진 않다. 그는 무정부주의에 대한 잘 알진 못했다. 무정부주의라면 군국주의가 외부의 적으로부터 보호하고자 한다는 주장에 글을 읽고 다시 적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군국주의가 외부로부터 적을 방어하는 수단만이 아니라 계급으로 가시화되는 두 번째 조건을 가지고 있으며 군국주의의 계급모순은 더욱 은폐해서 자본주의로부터 모든 형태에 자유롭고 온전한 민주사회에 대한 투쟁을 방해하는 반동세력과 국가자본주의와 시장경제에 지배적인 질서를 유지하고자 더욱 두둔한다고 쓸 것이다.’
공식적으로 그의 책이 출판한 이후로 리프크네히트는 체포되어 18개월 동안 글래츠(Glatz)에 수감했다. 하지만 다음 해에 감옥에 있었음에도 의회의원으로 선출된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에 독일의 참전을 반대했고 1914년 12월에 2일에 전시공납에 반대표를 던진 의원들 중에선 유일한 사람이었으며 지지자들 중에선 그의 사회주의 정당에서 선출된 110명의 당원이었다.
그러나 의회의원으로 그를 더 수감할 순 없었고 그를 묵살하기 위한 일환으로 군대에 징집하게 했다. 그래도 그는 전쟁에 투쟁하고 끝까지 싸웠다. 1916년에 5월 1일 그는 베를린에서 대규모의 반전 시위가 일어나기 전에 전쟁이 멈추기를 바라는 독일 사람들의 요구로 완전한 군복을 입고 카이저 광장 앞에서 연설도 했다. 그는 “외부의 적은 영국, 프랑스 또는 러시아 노동자들이 아니라 부유한 독일의 토지 소유자들, 독일 자본가들과 그들의 집행 위원회, 그들 정부”라고 말했다.
칼 리프크네히트는 1871년 8월 13일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났다. 독일에서 1919년 1월 15일 베를린에서 살해됐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자이자 사회주의자였고 로자 룩셈부르크와 함께 스파르타쿠스 연맹을 설립하고 독일 사회당과 그는 모든 힘을 다해 1차 세계대전에 반대했다. 독일의회의 의원이었으며 1919년 민중봉기를 주도했고 이 봉기로 사회민주주의 정부와 독일의 불법무장조직과 참전용사들로 구성한 자유군단과도 충돌했다. 그는 로자 룩셈부르크와 함께 암살됐다.
이후로 이 책은 여러 나라에서 번역해서 출판했다.
서문
몇 주 전에 그렌츠보테(Grenzbote)에선 1892년 10월에 비스마르크와 오토 케멜 박사와의 대화를 보도했다. 비스마르크 특유의 냉소와 함께 입헌주의라는 가면을 벗긴 “세기적인 영웅”에 대한 대화였다. 그 사이에 비스마르크는 말했다.
“중세시대 로마에선 법 밖에 있는 사람들은 범법자로 간주해서 추방했어.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정치적 권리를 무시하고 이를 비슷하게 취급했지. 내가 보기엔 이보다 심했어. 사회민주주의의 문제에는 군사적인 문제가 있지. 현재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부사관들을 성공적으로 설득하기 위해 분투해. 함부르크에 있는 대다수의 군대는 이미 사회민주당원들로 구성되었어. 왜냐하면 주민들은 오직 지역부대에서만 가입할 권리가 있기 때문이야. 어느날 이러한 군인들이 발포를 거부한다고 가정해볼까. 그들의 아버지와 형제가 황제의 복무자라면 어떨까? 함부르크와 싸우려고 우리는 하노버와 메클레부르크에서 부대를 소집할까? 그렇다면 우리는 파리코뮌과 다를게 없어. 황제는 두려웠어. 그는 언젠가 “살육왕자”라는 별명으로 자신의 할아버지와 똑같이 “피가 발목 위로 넘치듯이” 지배하기를 바라진 않았어. 그때 내가 말했지. 폐하께선 힘겨운 길을 걸으셔야 합니다. 뒷걸음질 칠수록 심연은 더 깊어질 뿐입니다.”
전반적인 물음을 요약하자면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문제에는 군사적인 문제가 있다.” 귀족이던 폰 마소(Von Massow)가 흘린 고통의 외침, “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오직 병사들의 총검과 대포에 달려있다.”1)보다 깊이 드러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물음에는 군사적인 문제가 있다.” 이는 현재에도 선동가들이 부를 수 있고 선율로 삼을 곡조다. 만일 알렉산드리아인2)들에게 전했던 비스마르크와 푸트카메르(Puttkamer)가 벌인 경솔한 행동이 아무 눈에도 띄지 않는다면 함부르크의 보도 소식과 순종적인 젊은 융커였던 폰 올덴부르크 야누샤우(Von Oldenburg Januschau)는 연말에 호헨로헤델브뤼크(HohenloheDelbrück)에서 상류층 법원 판사인 쿨레르만(Kulemann)에게 비스마르크의 비정한 말에 한술 더 뜬다.
사회민주주의 문제는 정치적인 문제일 정도로 군사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국내의 적은 해외의 적보다 위험하며 민족의 영혼을 독살하고 우리가 일어나기도 전에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우리의 행동을 저지하고자 한다. 1907년 교차로(Kreuz zeitung)에 따르면 ‘민족주의의 깃발이 휘날리며’ 진행한 선거싸움에선 계급적인 이익관계가 국익보다 우선하다고 보도했다. 그리고 이 선거싸움은 선거권과 노동조합 조직의 권리에 대한 위협을 고조하고 ‘보나파르트적인 검’으로 위협했으며 새해 전날 부친 편지에서 부엘로 왕자(Prince Buelow)는 독일 사회민주당의 지도자들을 위협하고자 이들의 주위를 서성였다. 계급투쟁의 기치 아래로3) 전개해서 싸운 가장 치열한 선거였다. 눈을 감고 귀도 들을 수 없는 사람만이 폭풍을 모는 호통을 치며 서약에 거부할 수 있었다.
따라서 ‘자국의 적’과 투쟁하는 사안은 매우 중요해졌다.
1907년의 혼란스러운 선거는 민족주의 문제와 식민지 문제, 강경한 애국주의와 제국주의에 대항하며 치러졌다. 이 모든 걸 보여줬음에도 이 선거는 비열한 애국사업자들의 거짓되고 애국적인 위선에 맞서 독일 사람의 저항력이 작았는지도 보여준다. 지배계급의 정부들도 이용할 수 있는 허황적인 민중선전 조직이 무엇인지도 우리에게 가르쳤다. 1907년 선거는 노동자 계급에게 이들이 힘에 있어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관계에 대해 스스로 생각해보도록 눈을 뜨게 했다. 노동자 계급은 추악한 ‘승리의 비결’에서 해방할 수 있도록 가르쳤다. 1907년 선거는 노동자 계급의 운동을 올바른 요구로 나아갈 수 있도록 더욱 깊어졌으며 민족적 행동에 대한 대중의 심리도 알 수 있게 해주었다. 확실히 우리가 소위 말하는 패배의 원인은 다수들이었고 실제로 패배는 아니었으며 오히려 승자들이 패배한 사람들보다 더 당황했다.
군국주의는 사회민주주의의 진입을 방해하는 특수한 함정들을 설치했으며 노동자계급에게 오염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를테면 그들은 정부의 테러주의에 휘둘리는 국가노동자들과 하위직 공무원들이다. 이는 반군국주의에 대해 청년들에게 최전선에서 질문해볼 수 있도록 지도할 것이며 독일의 노동자 운동은 이후로도 확실하게 이들의 지적에도 주목할 것이다.
다음의 책자는 1906년 11월 28일, 독일에 청년사회주의자 조합의 저자로부터 읽은 신문사의 논설을 확대했다. 이 논설은 기본적으로 새로운 걸 주장하진 않는다. 단지 이미 알려진 자료들의 모음집일 뿐이다. 그렇다고 주제를 소모적으로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저자는 전 세계의 흩어지고 단절한 자료를 최대한 수집하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반군국주의와 젊은 사회주의 운동에서 중요한 국가들에 대해 적지만 언급해볼 수 있도록 한 벨기에의 드만 동지에 대해 감사를 표한다. 만일 실수를 발견해서 정보의 출처가 신뢰성이 낮다는 이유로 자료의 숙달에 난관을 겪는다면 감안해주기를 바란다. 군국주의의 범위에서 현재의 많은 것들도 빠르게 변화한다. 이를테면 프랑스와 영국의 군사개혁을 더욱 언급하는 건 구시대적인 발상이다. 이 책은 반군국주의자들과 젊은 사회주의 노동계급의 운동에 더욱 진실하다. 이 책은 해방을 위한 노동자계급에 대한 근래의 지침이다. 때때로 차질을 빚기도 하지만 어디에서나 빠르게 발전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을 보게 되어 기쁘다. 이 책자가 출판한 이후로 나는 핀란드 젊은 사회주의조합이 타마스포에서 1906년 12월 9일과 10일에 첫 회의를 열었다는 사실을 알게됐다. 이 조합의 특수한 목적은 젊은 노동자들이 계급의식을 훈련하는 곳 외에도 모든 방면에서 군국주의와도 싸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우리의 작업에 이론적인 원리를 충분하게 조사하지 않고 역사적 깊이가 부족하다고 불평할 수도 있다. 이에 대한 대답으로 나는 이 책자의 정치적 목적이 반군국주의 사상을 전파하고자 한다는 걸 지적하고자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쌓여만 가는 무수한 사항들에 청년 사회주의 운동과 반군국주의의 역사에 관해선 하찮게 보일 수도 있고 불만할 수도 있다. 이 불만이 정당할 순 있다. 저자는 상부적으로 구체적이고 분명하게 볼 수 있도록 가정했고 하위적인 운동의 조합에 발전을 전술적 원칙과 방법으로 응용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했다. 반군국주의적 시위와 반대운동에서 주된 곤경을 제시하는 건 세부적일 뿐이라는 걸 고려했으면 한다.
박사. 칼 리프크네히트
1907, 1월 11일, 베를린
1. 독일 아렌츠 주간지 1896년 11월 중순 사회민주당 연대서신 참조
2. 황제는 알렉산더 대대 신병들에게 그들의 아버지와 어머니들에게 총을 쏘라고 호소하는 연설을 했다.
3. 1907년 2월 5일 저녁에 두 번째 투표가 실시했을 때 베를린 수비대는 실탄과 함께 행군준비를 마쳤다. 1903년 6월 25일, 스판다우에서 개척자들이 슈왈더 거리에서 선거결과에 열광한 노동자들을 “정신차리게” 하고자 출현했다.
원전 출판사 편지
“군국주의와 반군국주의”를 영어권 노동자들에게도 소개하고 전 세계의 반군국주의 사회주의자들을 선전하고 격려했고 군국주의와 용감하게 싸운 칼 리프크네히트를 소개할 필요성에 사회주의 노동 언론은 어떤 언급과 사과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책자의 출간이 독일 군국주의와 마찬가지로 영국 군국주의에 대한 동등한 도전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칼 리프크네히트는 독일인이기 때문에 독일 군국주의를 공격하진 않는다. 왜냐하면 독일의 강경론자들을 공격하는 건 국제적인 반군국주의자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리프크네히트는 1916년 5월 8일에 왕립 군사법정에서 이 지점을 분명하게 지적했다. 그는 자국에 가까운 적을 비판하는 건 국제주의자들의 의무라고 말했다. 이 주장의 근거로 그는 말했다.
“이를테면 독일의 사회주의자가 영국 정부와 싸우고, 영국 사회주의자가 독일 정부와 싸운다면 우습고 심각할 것입니다. 그 사람은 제국주의와 적들과 직면해서 맞서 싸우지 않으며 그와 무관한 주위의 사람들만 비난합니다. 그 사람은 제국주의에 맞서는 사람에게도 도움을 받고 심지어 정부의 도움과 승인을 받으면서 지배계급의 비참한 글쟁이로 남지만 사회주의자는 아닙니다. 그런 정책들도 계급전쟁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전쟁을 조장합니다.”
리프크네히트의 태도는 그가 수용하기에도 옳았으며 자국의 S.L.P가 전쟁 동안에 유지했던 권리이기도 했다. 우리는 단호하게 영국의 귀족계급과 싸워왔고 그리고 현재에도 이전과 같이 노동자 계급이 우리의 깃발 아래 흔들리며 함께하기를 촉구하고 군국주의와 자본주의를 타도하며 전 세계적인 국제 사회주의 공화국은 군국주의와 자본주의가 죽음이 있는 곳에서 일어날 것이다.
전 세계에 노동자의 대의는 하나이며 노동자 계급의 적은 자본주의 계급이다. 동지들이여 어서 모이자. 전쟁에 맞서 전투를 실행하고 자본주의에 맞서자.
S.L 프레스
1917년 7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