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이상한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
요즘 많이 드는 생각이기도 하고, 또 사람들이 많이 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상한'이라는 말이 친숙하게 들릴 정도다. 원래 세상은 무척이나 넓으니까. 이렇게 다양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는 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혹은 내가, 그리고 이상하다고 느끼는 우리가 특별히 예민한 감수성을 타고난 사람들일까?
잘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당연하다고 느끼는 일들이 사실은 당연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이렇게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당연하게 느끼지 않는 일들이 당연하게 느끼게 되는 순간들도 올 수 있을 것이다. 즉, 세상은 아무도 예상하거나 단언하여 정의내릴 수 없다. <노래하는 밤 아무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세상은 '불가해'한 것이다. 이런 세상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이 소설집에서 나오는 것처럼, 어쩌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완전한 불면>에서처럼 어느 누구도 편하게 잠을 자지 못하거나, <눈물이 서 있다>에 나오는 것처럼 갑자기 귀가 들리지 않을 수도, <호우>에서처럼 부유종 때문에 오후 4시면 비가 내리게 될지도 모른다.
이렇게 염승숙의 소설이 펼쳐 보여주는 세상은 묘한 구석이 있다. 소설 안에서 나타나는 세상은 예측불가능하다. 하지만 이것이 그저 ‘상상력’이라고만 말할 수 있을까? 불면증은 근대 이후부터 사람들을 끈질기게 괴롭혀 온 병이 되고 있고, 각종 소음이나 이어폰의 사용 등으로 이명을 겪는 사람 또한 꾸준히 늘고 있다. 부유종? 질병들? 그리고 감염된 사람들의 격리와 주변의 시선?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것들이 한 발자국만 앞으로 간다면 소설의 상황과 굉장히 흡사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변해버린’ 세상 속에서 또 겪고 있는 것이 있다.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사람들은 우울과 상처의 틈바구니 아래에 놓여 있다. 소설의 이 인물들은 가끔 '세상은 왜?'라는 말을 중얼거리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그 물음들은 답 없이 질문자 곁에서 부유하고 있을 뿐이다.
표제작인 <그리고 남겨진 것들>에서와 같이 외롭게 홀로 죽은 사람들은 사후에 답답하게 꽁꽁 끼어 있는 벽돌로 남게 된다. 죽기 전에도 그러했지만, 벽돌이 되어서도 그들의 외침을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게다가 '로테이션' 때문에 그 외로운 벽돌들도 자꾸 변화를 겪는다. <시절의 폭>에서 '나'와 사촌인 '명'이 어릴 적에 겪은 일은 상처가 되어 그들의 삶을 조금, 바꾸어 버렸다. '나'의 작은 아버지이자 '명'의 아버지가 한 말만이 오롯이 남아있을 뿐이다.
'인간도 결국에는, 누군가의 먹이가 되겠지.'(<시절의 폭> 중에서, 270)
인간을 잡아먹는 저 주체는 누구란 말인가. 다른 인간, 그리고 그 인간이 속한 공동체, 사회. 모든 테두리일지도 모른다. 모두가 테두리 안에서 태어나지만, 보호를 보장받기 이전에 자격을 검증받아야 한다. 기준치에 합당하지 않으면 그 테두리에게 먹힐 것이다.
표제작인 <그리고 남겨진 것들>의 이야기를 들춰보면, 외롭게 죽음을 맞이하고 나서도 조그만 벽돌이 되어 벽면에 ‘끼어있는’ 주인공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작가의 분신처럼 느껴지는 <청색시대>의 주인공 역시. 과거를 회상하면서,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앞에 두고 ‘청색’의 바람이 부는 세상에서 여전히 아무것도 아닌 채로 살아간다. 이렇게 먹히고 난 다음이라면, 혹은 먹히고 있는 중이라면? 제목에서 말하고 있는 ‘남겨진 것’이 있기는 할까?
아마도 우리가 그 남겨진 것을 찾아서 기억해야 할 것이다.
‘잊어야 하는 것과 잊지 말아야 하는 것, 잊히는 것과 잊히지 않는 것의 간극에 무엇이 위치해 있는지, 그는 알 것도 모를 것도 같았다. 사라지는 것은, 잊히는 것은, 어떤 의미로든 슬픈 것이다. 그것은 연민도 무엇도 아니지만, 때로는 노력해서라도 기억해야 하는 수고가 필요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만이 덧없이 되풀이될 따름이었다.’ (<습> 중에서, 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