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무거운 제목이다. ‘죄책감’, 세상에 죄책감 없는 사람도 있을까. 어떤 사람들은 그런 감정이란 없는 것이라며 발뺌할지도 모른다. 그만큼 남에게 드러내기 어려운 감정이다. 때로는 불편하기까지 하다. 말 그대로 무겁기 때문이다. ‘죄의 무게’라는 말이 실감이 날 정도다. 죄책감에 사로잡힌 사람은, 그리고 그로 인해 절절하게 진지한 모습으로 자신의 죄를 시인하는 모습에까지 이르면 분위기는 숙연해진다. 죄의 무게가 분위기를 압도한다.
솔직히 시를 읽는 내내 불편했다. 시 구석구석에 죄책감에 물들어 있는 주체의 목소리가 묻어있었기 때문이다. (고백하건대 이런 부류의 글들은 불편하다 못해 잠을 못 자게 만든다. 몇몇 독일 문학과 일본 문학에서 자주 느끼던 불편함과 닮아 있다.) 물론 그 불편함의 정도는 각각 시편에 따라 정도가 다르다.
친구의 결혼을 앞에 두고
비어가는 잔고를 걱정했다
우리는 춤추고 노래 불러줄 수고를
몇 장의 지폐와 교환하고 있다
<가을>
누구나 한번쯤은 겪어보았을 ‘죄’의 고백이다. 우리를 죄책감에 시달리게 하는 것은 이렇게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에게 짓는 마음의 죄다. 국가의 법률에서 정의를 내리는 죄보다는 범위가 더 크고 개인적이며 내밀한 곳에 위치해 있고, 대부분 평생 비밀로 감추고 살아갈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것을 집요하게 겉으로 드러내는 것이 바로 시적인 주체가 할 일이다. 위의 경우보다 더 불편한 죄책감들을 드러내는 시들이 많다. 이를테면 가족과 관련한 시들이다.
출근길에 생각했다
나는 왜 저 사내가 되지 못할까
선로는 나가지도 들어가지도 못하는 문
그 위에 서서 나는 왜 저 사내가 되지 못할까 생각했다
그러니까 등이 아주 작게 말린
가난한 아비 하나가 선로 위에 누워 있던 거다
잠이 오지 않을 때마다
외할머니는 그의 등을 긁어주었던 거다
좁게 파인 등골은 손바닥으로 쓰다듬으며
등이 작으면 저 긴 잠 일렁이는 물결에도
별자리들이 출렁이지
출렁이기 마련이지,
혀를 찼던 거다
외할머니 연곡 뒷산에 묻고 오던 날
어린 그에게 감을 따주었다는 셋째 외삼촌과
그날 따먹은 건 감이 아니라 밤이었다는 첫째 외삼촌,
그는 그 중간쯤에 서 있는 담이었던 거다
혹은 이듬해 연곡천에서 끓여먹던 개장국 안에
흰둥이의 눈깔이 들어 있었다는 사촌누이와
처음부터 대가리는 넣지도 않았었다는 막내의 실랑이,
그는 그 사이에 끼여 들리지 않는 발음이었던 거다
있거나 말거나 있었거나 없었거나
그러니까 선로 밖으로 휩쓸려나가
처음 보는 동네 정류장에서
노선도 모르는 버스를 기다리며 생각했다
나는 왜 달려오는 전동차 밑으로 몸을 눕히지 못할까
그리하여 수십 수백의 출근길을 몇십 분이라도
훼방 놓지 못할까
생각했다
<우두커니>
출근길에 ‘가난한 아비 하나’를 발견한다. 선로 위에 드러누워 출근길을 ‘훼방 놓’고 있다. ‘가난한 아비’가 선로에 드러누운 그 모습에서 시적 주체는 등을 긁어주곤 했던 ‘외할머니’를 생각한다. ‘가난한 아비’의 ‘외할머니’라고 말은 하지만 실은 시의 화자의 ‘외할머니’를 떠올리게 만든다. 장례 이후 친척들이 장례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대화를 나누는 그 가운데에서 자신은 ‘중간쯤에 서 있는 담’이었고 ‘들리지 않는 발음’의 상태로 있었다. 그와 반대로 저 ‘가난한 아비’는 선로 위에 드러누워 온 몸으로 출근길을 방해하고 있다. 말은 없지만 세상에 대해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친척들이 ‘외할머니’ 장례식 이후에 주고받는 그 말들 가운데에서 아무런 말없이, 혹은 저 ‘가난한 아비’ 같이 온 몸으로라도 적의 아닌 적의를 표현하지 못했던 자기 자신에 대해 ‘우두커니’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형은 기타를 연습하네
엄마는 습관처럼 아프고
형은 습관처럼 기타를 연습하네
음악 선생인 아버지는 형이 딴따라가 될까봐 장롱 위에 기타를 올려놓았지 엄마가 입원을 하는 동안 형의 키가 자란다는 걸 몰랐던 모양이야
부모가 집을 비울 때마다
숨겨둔 음악이 빈집을 채우네
누나는 피아노를 시키면서 왜 형은 기타를 못 치게 할까?
피아노는 장롱 위로 올라갈 수 없으니까,
엄마는 앰뷸런스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네
똑같이 의대 나온 사람들인데 왜 여기 의사들은 엄마의 병을 못 고칠까?
서울엔 의사들이 흰건반처럼 많으니까
누나가 서울에서 레슨 받는 이유를 진짜 모르겠니?
좋은 건 많은 거라고 형에게 배웠지
엄마의 병이 깊어지자
기타 연습할 시간이 많아져 형은 좋았네
엄마의 부재가 깊어지자
집 곳곳에 공의 검은 그림자처럼 굴러다니는 머리카락들
이게 도대체 사람 사는 집구석이야? 이놈의 여편네는 왜 청소도 안 하고 누워 있는 거지?
엄마가 죽을 병에 걸린 걸 알면서도 형이 지껄이자
아버지의 목소리가 걸어나오네
아버지가 있지도 않은 집안에서
- <클래식>
가정사는 ‘클래식’이다. 어느 집의 이야기든지 비슷한 패턴을 가지고 있다. 이 시에 나타나는 화자의 집안 이야기도 ‘클래식’과 같다. 아픈 엄마, 횡포를 부리는 ‘아버지’, 형과 누나 틈에서 어린 눈으로 집안을 읊는 시의 화자 자신, 꿈을 키워나가는데 저지당하는 형과, 그런 형이 아버지의 횡포를 답습하는 것까지. 그렇지만 ‘클리셰’는 아니다. 가족관계를 클리셰로 치부해버리기에는 조금 가혹하다. 오히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계속해서 차용되는 고전의 스토리, ‘클래식’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다. 그리고 그 속에 담겨져 있는 가족 구성원 사이에 숨겨진 죄책감까지. 누가 누구에게 가지고 있든지, 죄책감은 분명히 저 안에 꽁꽁 숨겨져 있다.
어떻게 보면 죄책감은 ‘오해’와 관련이 있을 수 있다. 잘못을 타인이 명명하여 그에 따른 응당한 대가를 받으려 한다면, 그리고 실제로 그 대가를 받는다면 죄는 해소가 될 수 있다. 그렇지만 사람 일이 다 그렇듯, 그리고 마음의 일이 다 그렇듯이 감정이라는 것은 물물교환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죄의 대가와 상관없이, 혹은 죄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죄책감은 어느 때나 불쑥 나타날 수 있다. 어찌 보면 ‘과잉’이라는 말과 연관이 될 지도 모르겠다. ‘과잉’ 혹은 ‘오해’, 두 축의 움직임 위에서 죄책감은 자꾸만 시의 화자를, 그리고 읽는 우리를 바닥으로 가라앉게 만든다. 이 때, 시집의 마지막 시에서 이렇게 이야기를 한다.
우리는 계단을 내려갔다
짐을 부리자마자 계단을 내려갔다
눈이 쌓인 만큼 계단은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곳이 계단이라 믿으며 계단을 내려갔다
눈이 쌓인 곳으로 소리도 사라졌다
길이 길이었던 곳으로
계단이 계단이었던 곳으로
우리는 내려갔다
내려가도 내리막이었다
멀리서 벼랑을 때려대는 파도는 몇천 년이고 그래왔다는 듯이
파도였다
우리는 계속 계단을 내려갔다
내려가다가 우리는
우리가 길을 만들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별 시답잖은 생각을 다
해보기도 하였다
천부에서, <죄책감>
시의 화자는, 그리고 우리는 시의 결을 하나하나 따라가며 죄책감의 계단을 밟아 내려간다. ‘오해’와 ‘과잉’의 아슬아슬한 수위에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가 길을 만들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별 시답잖은 생각을’ 말이다. 시의 화자는 불편하고 무거운 감정인 죄책감을 마주보려 애를 썼다. 죄의 해소란 평생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오해’와 ‘과잉’은 언제나 화자의 감수성 아래에서 살아갈 것이다. 그렇지만 시적인 그 움직임에도 어느 순간은 멈추어야 할 지점이 필요한 것이다. 화자의 삶에서나, 혹은 물리적으로 이 시집의 마지막에 있어서나. 이렇게 우리는 마지막 시를 통해 잠시나마 죄책감의 무거운 공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렇지만 언제든 뒤를 돌아 계단의 아래쪽을 응시하고 싶을지 모른다. 이것은 일종의 유혹이다. 시집 죄책감을 읽고 싶은 유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