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단편소설집을 펴들었다. 개인적으로는 장편소설을 더 좋아하지만 가끔은 이렇게 호흡이 짧으면서도 탄탄하게 세계를 그려내는 단편을 읽는 것도 좋아한다.
여름부터 백수린 작가의 글을 읽어보고 싶어 벼르고만 있었는데 이제야 겨우 읽게 되었다.
펴들기 잘했다는 생각이 든 것은 계속해서 소설을 쓰고 싶다는 ‘작가의 말’을 읽으면서 부터였다.
첫 책이다.
오랫동안 소설을 쓰고 싶다.
좋은 소설을 쓰고 싶다.
내가 처음으로 수줍게 건네는 손을 당신, 부디 맞잡아주시길.
작품 내용을 읽기 전에 작가의 말이나 해설 첫머리 같은 것을 먼저 읽는 습관이 있다. 아마 이 책을 쓴 사람을 조금이라도 알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습관이라고 생각하는데- 아무래도 나는 작품보다는 작품을 만들어 낸 사람이 더 궁금한 것 같다. 독자는 책 속의 인물과 대화를 나눈다고 하지만 그것을 뛰어넘어서 그 인물을 만들어 낸 사람과 대화하고 싶은 마음이 큰 것일지도?
표제작인 <폴링인폴>과 함께,
마음에 들었던 작품은 <자전거 도둑> 그리고 <까마귀들이 있는 나무>였다.
<폴링인폴>은 제목으로만 보았을 때 왠지 로맨스소설 같았다. 사실 책의 표지도 살짝 간질거리는 분위기라서 사랑 이야기인가 싶었다. 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사랑 이야기가 나오기는 해도 서술자의 입장에서는 마냥 행복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고 다시 표지를 보니 마냥 간질거리지는 않는다. 톤이 좀 다운된 것이- 아, 염장을 지르지는 않는군. 다행이다.) 그렇지만 사랑 이야기를 떠나서 폴의 가정사를 들여다보면, 마음이 조금은 따뜻해진다.
‘폴’이라는 이름에서 짐작하겠지만 그를 한국인이라고 지칭하기엔 조금 낯선 구석들이 있다. ‘토종’ 한국인이던 부모님과는 다르게 그는 미국에서 태어났다. ‘한민족’이라는 말로 한 나라-한 인종-한 언어를 사용하는 ‘우리 집단’을 통틀던 과거와는 다르게, 요즘은 한민족이라는 단어가 수상하게 보일 정도로 다양한 ‘예외들’이 생겨났다. 인종은 같지만 국적이 다르고 언어까지 외국어를 쓰는 ‘폴’과 같은 교포들이나, 인종도 다르고 언어도 미숙하지만 우리들과 함께 살아가는 한국 국적의 ‘외국인’들까지. 누가 외국인이고 내국인인 걸까? 외국인이라는 단어는 맞는 단어일까? 그들을 무어라 불러야 할까? 이런 모호한 경계에 서 있는 사람이 바로 ‘폴’일 것이다.
혹은 외국에 체류한 상태이거나 그런 경험을 통해 겪는 낯섦을 가지고 이야기한 작품들도 많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까마귀들이 있는 나무>이다. ‘리’라는 남자는 아르바이트로 외국 관광객에게 고궁을 설명해주는 일을 하고 있다. 시청 담당 직원의 착오로 아침 일찍부터 오후까지 담당 관광객을 기다려야 하는 그는 하릴없이 고궁을 돌아다니게 된다. 그 곳에서 한 여자 관광객에게 시선을 빼앗긴다. 자연스럽게 고궁 안을 설명해주면서 과거에 외국에서 겪었던 ‘킴’이라는 외국인과의 스토리를 회상한다. 작품의 분위기라던가 중후반부의 전개가 꽤 마음이 들었는데, 그 중심에서 작동하는 것은 ‘외국-외국인-외국어’라는 소재다. 낯선 나라, 낯선 사람, 낯선 언어라는 소재로 인해 버석한 행동을 보이는 인물들이 친숙하게 느껴진다. (이런 부류의 작품들은 위에 두 작품 외에도 <부드럽고 그윽하게 그이가 웃음짓네>나 <거짓말 연습>이 있다.)
무엇보다도 작품들 속에 나타나는 인물의 심리가 좋다. 심리 ‘묘사’는 잘 모르겠지만 인물들이 느끼는 감정, 생각하는 것들이 매우 친숙하다. 그런데 이 친숙한 생각과 느낌이 그다지 밝은 종류의 것이 아니다. 가끔은 부끄럽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언급할 <자전거 도둑>의 예를 들어 이야기해보자면 이렇다. ‘나’, 안나, 제이는 방을 하나 구해 같이 살고 있다. 돈은 없지만 각자의 꿈을 향해, 그런 만큼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한 가지 변화가 생겼다. 안나에게 남자친구가 생긴 것이다. 재정적으로 안정적이고 꽤 괜찮은 남자가 안나의 곁에 맴돌자, ‘나’는 질투어린 감정과 소외를 느낀다. 제이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지만 ‘나’는 자기의 감정에 취해 안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기에 이른다.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인 제이, 밴드 보컬인 안나, 무명의 웹툰 작가인 ‘나’까지. 사회에서 말하는 ‘정상 궤도’에 약간 비껴나간 그들은 서로의 ‘허물’을 바라보며 기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중 하나가 ‘허물’을 벗어내려 한다. 작은 공동체의 위화감이랄까, 개인들의 미묘한 심리전이랄까. 누구든지 느껴봤을 것이고 충분히 공감이 되지만 굳이 누군가에게 이야기해주고 싶지 않던 마음을 소설에서 확인하니까 묘한 감정이 느껴졌다. 그리고 또 이 이야기의 결말도 재미나다.
다른 작품들도 흥미로운 구석이 많았다. ‘감자’를 잊어버린 한 여자의 이야기인 <감자의 실종>이나, 수족관에서 아이를 잃어 방황하는 <밤의 수족관> 이라는 작품, 유령이 습격한 이후 한 카페로 다시 찾아간다는 <유령이 출몰할 때>와, 말을 잃어버린 당신과 그 옆을 지키는 나의 이야기인 <꽃피는 밤이 오면>까지. 이제 어떤 좋은 소설을 보여줄지 기대하면서 책장을 덮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