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뮈 소설 '페스트'의 배경은 지중해 남쪽, 알제리 오랑 시다. 어느날 갑자기 이유없이 창궐한 페스트는 도시의 현실이 된다. 오랑은 외부와 격리된다. 살아서 나갈 수 없는 폐쇄병동이 된다.
사람들이 죽어간다. 죄없는 간난 아기도 페스트로 고통받으며 죽어간다. 부모는 고통속에 피눈물을 흘린다. 사람들은 문을 걸어잠그고 사람을 만나지 않음으로써 페스트로부터 자신을, 가족을 격리시키려하지만 소용이 없다. 한 명으로 시작된 죽음은 금방 수십이 되고 수백, 천 단위로 늘어난다. 병원은 사라지고 거리는 시체로 넘쳐난다. 무덤은 없고 시신을 버리는 구덩이만 존재한다. 아무런 논리도 이유도 없이 무수한 사람들이 고통속에 죽어간다. 지옥의 풍경.
페스트가 창궐한 이 오랑 시의 지옥도를 통해 까뮈가 보여주고자 한 것은 부조리에 대응하는 인간의 자세다. 근원을 알 수 없는 고통은 인간의 운명이다. 까뮈 문학의 근원이 되는 '부조리'다. 그래서 페스트는 인간의 조건인 이 부조리, 그 운명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정면으로 응시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들을 움직이는 힘은 페스트가 퇴치될거란 믿음이 아니다. 밝은 미래에 대한 희망이 아니다. 끝나지 않을 부조리 앞에서 희망은 무용할 뿐 아니라 독이라는게 까뮈 생각이다. 대신 끊임없이 언덕 위로 돌을 밀어 올리는 시지프스의 몸짓을 강조한다. 그저 놓여진 고통을 정면으로 응시하고자하는 의지, 그리고 이 부조리한 고통을 당당하게 살아내겠다는 저항의지이다. 희망없이 부조리에 맞서라는 것. 그게 까뮈가 강조하는 인간의 자세다.
이야기에는 프랑스에서 온 신문기자 한 사람이 등장한다. 이름은 랑베르. 그는 처음엔 이 오랑시의 운명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생각한다. 여행을 하다 상관없는 고통에 운 나쁘게 엮여버렸다고 생각한다. 끊임없이 도시 밖으로 나갈 방법을 찾아 분주히 움직인다. 하지만 그 방법을 찾아내서 탈출의 날이 다가오자 돌연 그 탈출을 포기하고 만다. "혼자만 행복하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는 이유에서다. 연대의식. 그 속에서 고통을 살아내는 일, 그것은 부조리에 대응하는 인간의 두번째 자세다.
메르스 감염사태의 초입에 있는 지금 이 이야기가 떠올랐다. 지나친 비약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지역에서 휴교령이 연이어 내려지고, sns를 통해서 두려움이 전파되는 상황을 보다보니 고통과 두려움이 겹쳐지는 것을 어쩔 수 없다. 그저 같은 병실, 같은 복도, 같은 병원에 있었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이 감염됐고 사망자까지 나왔다. 정부의 초기 대응을 질타하는 목소리도 이어진다. 공포가 휩쓸고 있다고 봐도 좋겠다. 나 역시 이유없이 이 고통의 한 가운데 들어서게 될까봐, 그리고 희생될까봐 두려워하는 사람 가운데 하나다.
이 사태가 확산되지 않기를, 효과적으로 차단되어서 피해가 최소화되기를 까뮈와는 달리 '희망'한다.
동시에 지금 우리에게 닥친 이 두려움, 고통 너머에 응시해야할 진실이 있는게 아닌지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