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친구를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져 카페에 혼자 앉아 있을 때, 이 책 『바람이 지우고 남은 것들』을 읽었다. 시끄러운 카페에서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노래를 들으면서 책을 읽었는데도 불구하고, 얼마나 몰입이 잘 되던지 몽골 한복판에 서 있는 내 가슴을 바람이 뚫고 지나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마음이 여러번 서늘했다는 뜻이고, 울컥울컥 무언가가 마음 속에서 치솟았다는 이야기이다. 매 차례의 앞에 놓인 시 한편과 중간중간 등장하는 몽골의 탁트인 초원을 담은 사진 덕분이기도 했다. 아무튼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머릿속으로 두 가지 생각을 했다. 첫째, '소리내어 울고싶다' , 둘째, '이 책은 올해 내가 읽은 책중 최고의 책이 될 것이다'.
'몽골에서 보낸 어제'라는 부제가 딸린 이 책은 작가에게 있어 몽골과 그곳에서 느낀 바람, 그리고 몽골과 바람이 전해준 많은 이야기를 담은 그릇이었다. 몽골이라 하면 다소 생소하다. 어느 지역에 있는 어느 나라인지 모르는 것은 아니나, 서양 문화와 역사에만 길들여진 내게 몽골의 가치가 크게 느껴졌을 리 없다. 그저 칭기스칸과 태무진의 주 활동무대였다는 것 정도가 실은 몽골에 대한 대부분의 지식이다(나한테는).
아무래도 몽골은 작가 김형수를 구성하고 있는 원소가 아닐까 생각되었다. 그정도 까지는 아니더라도 작가 김형수의 예술의 혼을 이루는 구성요소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다. 작가는 몽골에 관한 것을 이 책에 여러 종류의 글을 통해 늘어 놓는다. 시뿐만 아니라 순례기, 창작노트, 좌담 등에 이르기까지. 책의 차례만 살펴봐도 흥미가 생긴다. 이런 식으로 구성된 책은 처음 접했다. 그만큼 아주 다부지고 알차다는 느낌을 받았다. 차례의 제목만 읽고서가 아닌, 내용을 다 읽어보고나서도.
시와 사진은 때에 따라 어찌나 적절하던지, 볼 때마다 탄성을 연발했다.


p. 12
'영원한 것은 없다. 똑같은 이유로 영원히 소멸되는 것 또한 없다. 그래서 세계는 나타나는 것과 사라지는 것,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소멸과 생성 양쪽의 무한을 향해 열려 있다. 그 열림은 가장 야성적인 생명이 존재하는 곳을 비춰서 한 번 스쳐가는 데 80년이 걸리는 존재의 그림자들에게 그것이 머물고 가는 짧은 세월을 구원한다.'
- 위의 문장을 자꾸만 되풀이해 읽게 된다.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는 생성과 소멸 양쪽의 무한을 향해 열려 있지만 광활하고 위대한 자연에 비해서는 80여 년을 잠깐 스쳐가는 존재에 지나지 않겠지. 나는 저 말이 말로는 설명하기 어렵지만, 이미 내 머릿속에 이미지화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안다.
p. 61
'내 생각에 몽골로 연결되는 입구와 출구는 모두 바람이다.… 심지어 세계 어디에서 만나든 거의 예외 없이 몽골 사람의 등에는 바람이 묻어 있고 그들의 문화적 비밀 또한 바람에 새겨져 있다. 경계도 장벽도 없는 무한한 공간을 향상도 없이 오고 가는 바람의 갈피에 몽골이 존재하는 셈이다.
- 나는 후생이 있음을 확신하지 못하면서도, 매번 다음 생에는 큰 종류의 '새'로 태어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언젠가부터는 그 생각을 넘어 '바람'이라는 것도 하나의 존재로 여겨질 수 있다면 '바람'으로 태어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시원하고 탁트이고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고나서는 한 가지 바람(소망)?이 더해졌다. 바람이 되어 가장 먼저 몽골에 머무르고 싶다고 말이다. 아무래도 대도시에 살면 이 건물 저 건물에 부딪혀 몸이 너무나 아플 것 같다.

p. 71
언뜻 보면 세계는 힘이 센 자가 약한 자를 지배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큰 생명이 작은 생명을 지배한다. 모든 생명의 먹이에 불과한 가장 연약해 보이는 물이 물의 자취를 따라 초원이 형성되고 그 초원의 이동을 따라 양 떼가 목숨을 구걸해 다니며 그 양 떼의 이동을 따라 유목민이 잉여 재산을 창출한다.
p. 93
어떤 선배에게 아직도 지상에는 동물과 사람의 차량이 나란히 걸어 다닐 수 있는 곳이 있으며 한 번 스쳐간 사람을 생애에 두 번 볼 수 없기 때문에 만남을 매우 소중히 여기는 유목민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 내가 이 땅위의 한 점에 불과하다는 것은 당연히 알고 있으면서도 자꾸만 망각하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모두 인간이 가장 위대하고 큰 존재인 줄 알지만 그것 역시 오만이다. 나는 내 오만을 떠벌리고 싶은 생각은 없으나, 내가 하는 고민이 가장 엄청나고 심각하고 슬픈것이라 여기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고민하는 바이다. 물론 이는 앞으로도 변하지 않는 내 오만의 한 종류일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자꾸 울컥울컥거리고 눈물이 나려 했던 이유는, 아마 내가 아주 작은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갔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난 끝도 없이 펼쳐진 넓은 땅에 아무도 없이 오로지 나 홀로 서 있는 광경을 상상하고 떠올렸다. 그 광경은 쉬이 잊혀지지 않았는데, 그 휑한 기분과 무서움과 두려움이 좀처럼 가시지 않아 울고 싶었다. 작은 것들끼리 서로 우위에 서려 아웅다웅하는 모습에 지친 반면, 단 한 번의 만남을 소중히 여기는 유목민들에게 진심으로 존경하는 마음을 갖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아주아주 작은 하나의 점이 되어, 거대한 생명인 자연 안에 홀로 남겨져 버린 기분을 간접 체험하고 나서야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
+ 아참, 책을 읽으며 재밌는 사실 하나를 알게 되었다. 몽골에서는 대변을 '큰말', 소변을 '작은말'이라고 하며, 무언가 마려우면 '말보고 싶다'고 한다는 것! 우리말의 '마렵다'는 말이 바로 몽골의 '말'에서 온 것이었다!!! 최기호 교수님의 『최기호 교수와 어원을 찾아 떠나는 세계문화여행』중에서 일부를 발췌하여 작가는 책에서 소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