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리뷰의 일부구절을 옮겨 온다.
"그의 주장을 손쉽게 물리치는 법은 학생운동의 황금기, 이른바 민주화 세대라는 그의 세대적 특수성을 거론하며, 세계가 변했으니 저항의 방식도 바뀐다는 점을 강조하고,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생산양식의 선차성을 고집스레 주장하는 철지난 ‘구좌파’의 한탄으로 이 책을 읽거나, 예술의 형식주의와 예술 고유의 문법, 영역을 무시하는 마르크스주의자의 오만으로 그 요지를 독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어느 방식도 충분하지 않다. 외려 우리는 그의 주장을 생산적으로 독해하기 위해 그가 20세기의 시간에 대한 희미한 기억을 통해 시간이 없는 21세기에 ‘역사’가 부재함을 드러내고, 현 세기에 기억을 대신하는 장치로서의 ‘아카이브’- ‘타임라인’ 상에선 결코 보이지 않는 21세기의 부정성을 드러낸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현재의 의미는 언제나 현재에 결코 완벽히 동화될 수 없는 과거를 통해서, 현재로 하여금 결코 현재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할 수 없게 하는 부정성을 통해서 나타난다.
(...)
그에게 역사와 기억은 언제나 특정한 사회체계의 시간적 연속성과 관련된다. 그리고 이는 20세기의 시간에 특권을 부여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허나 굿즈로 전락한, 호사가들의 밈이 된 레닌의 초상을 보노라면, ‘적대’가 ‘장식’이 되어버렸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동시대는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있는 시대이다. 단, 이행의 기억만 빼고. 우리가 어떤 동일한 시간대에 놓여 있는지에 관한 기억만 빼고. 투쟁의 기억만 빼고. 또한 동시대는 모두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시대이다. 단 이행의 가능성을 찾아야 함을 강변하며 투쟁하는 주체만 빼고. 허나 그와 동시에, '동시대'에선 심리학적 개인의 투명하고 전일적인, 신체적인 기억은 권장되고 범람한다. 심리학적 개인이 감각지각적 경험세계에서 감지할 수 있는 오브제들의 총체가 '기억하기'의 가장 객관적인 방식으로 간주되는 '동시대'에서, 숱한 구술과 문화적, 일상적 사료들을 통해 역사가 무분별한 다원성과 단발적인 재현가능성 속에 편재하게 되었을 때, 역설적으로 억압된 것은 객관적인 역사이다. 기억은 이제 역사와 매개된 것이 아니라 역사에 앞서 존재하는- 그 자체로 물화된 단일하고 경험적인 실체가 되었다. 서동진은 이를 ‘선험적으로 주어진 자연(Nature)으로서의 경험’이라 표현한다. “기억은 주체의 자연인 듯 가정되며 기억의 사회적 성격을 역설한다고 하더라도, 기억의 집합적 구성을 강변한다고 하더라도 기억은 마치 자연인 것처럼 간주된다.”p.19 이는 아카이브적 기억을 실체화하여 윤리적으로 금지할 것을 촉구하는 것이 아니라, 아카이브-레트로를 알레고리로 하여 비시간의 시간성의 지속이 현상하는 모습을 묘사하는 일에 가깝다.
(...)
본 작업 <동시대 이후>에서 그가 헤겔-마르크스주의적 방법론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는 점을 이해한다면 논의를 따라가기 수월하다. 전체로서의 인과를 사고하는 특유의 지적 전통 위에서 서동진은 생산양식, 즉 경제와 전적으로 무관해 보이는 이런저런 독립된 대상들의 미적 경향들에서 자본주의의 규정성이 작동하는 방식을 탐구한다. 그의 서술 방식은 그런 점에서 총체적이며, 구체적 보편을 지향한다. 그의 시선 속에서 미시사, 문화사, 일상사, 레트로-빈티지 패키지, 노스텔지어, 아카이브, 무라카미 하루키, 취향, 피해자성, 미학주의, 수평성, 차이, 다양성, 참여, 특수성, 관계미학, 장소특정성, 문화연구, ANT, 동시대, 포트폴리오, 일베, 정동, 재난, 파국, 폐허 등의 수많은 개념들과 심상들은 일순간 자본주의와 특정한 관계 안에 놓여있는 것으로서 드러나며, 탈냉전 이후 가시화 된 ‘이행의 불가능성’으로부터 파생된 효과이자 현재의 시간성을 공고히 하는 각각의 요소로서 조명된다. 여기서 각 요인들은 필연적인 것으로 나타나지만 동시에 부정해야 할 것으로 제시되는데, 이때 이들이 맺는 관계가 기계적 인과가 아닌, 논리적 조응 관계로서 주목된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그의 시선 속에서 각 대상들은 서로 독립된 만큼이나, 서로 무관하지 않으며 상호적으로 연관을 갖는다. 그런 점에서 그의 작업은 이제는 좀처럼 찾기 어려운 변증법적 (미술)비평의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물론 서동진의 용법에선 마르크스주의의 용례로 변용되지만, 헤겔적 의미에서 '대상을 전체와의 관계 속에서 사고한다'는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혹은 자본주의를 체계이론으로서 독해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지 등을 헤아려 보는 것도 독자들이 이 책을 생산적으로 독해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