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전체보기

알라딘

서재
장바구니
Urbanistorian님의 서재
  • 지도와 사진으로 보는 제1차 세계대전
  • A. J. P. 테일러
  • 22,500원 (10%1,250)
  • 2020-10-16
  • : 648

지휘관들의 번뜩이는 전술 혹은 그들의 영웅적인 면모, 숨 막히는 전황과 뒤이어 찾아오는 통쾌함 또는 안타까움 ….

굳이 영웅사관에 빠진 사람이거나 ‘밀리터리 덕후’가 아니더라도, 전쟁사를 읽어 나가는 독자라면 기대할 법한 스토리텔링이다. 전쟁사에 대한 공부가 일천한 필자에게 있어서, 이와 같은 짜릿함을 느끼며 읽어내려갔던 책으로 기억에 손꼽히는 책은 그 옛날,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그중에서도 제2권 「한니발 전쟁」이었다. 물론 그녀의 저작이 낳은 수많은 논쟁거리를 여기서 재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전쟁사라는 이유로, 그녀의 책을 읽어 나갔을 때 느꼈던 회고를 기대하며 본서를 집어 든 것은 꽤 큰 오판이었다. A. J. P. 테일러의 이 저작은 필자가 생각한 것과는 꽤 다른 성격 혹은 매력을 가진 책이다.


테일러가 서술하는 제1차 세계대전의 경과 속에서, 정치가들과 군사 지휘관들은 번뜩이는 전술 혹은 영웅적인 면모를 보여주기보다는 오히려 착각이나 오판을 거듭했다고 말하는 것이 더 가까울 듯하다. 사실, 전쟁의 발발부터가 누군가의 치밀한 의도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 측면에서 A. J. P. 테일러의 잘 알려진 또 다른 명저(『준비되지 않은 전쟁, 제2차 세계대전의 기원』)의 ‘준비되지 않은 전쟁’이라는 수식어는 제1차 세계대전에도 충분히 붙일만하다.


“독일과 영국은 우호적인 관계”였고, 사라예보의 총성이 울리기 수개월 전에 치러졌던 프랑스의 총선에서는 “평화를 지지하는 급진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다시 과반을 차지”했으며, 독일인들은 “순전히 경제력만으로도 곧 유럽 제일의 강대국이 되리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독일이 왜 전쟁으로 일을 그르치겠는가?” 독일은 오스트리아로 하여금 세르비아를 강하게 압박할 것을 종용하면서, 이것을 과거처럼 “위협으로 위신도 세우고 평화적인 성공도 이루”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이 세르비아에 전쟁을 선포하던 시점까지도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많은 나라들이 이는 “외교적 술책”이었을 뿐 “진짜 전쟁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후 모두들 걷잡을 수 없는 전쟁 속으로 떠밀리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여기서 테일러가 통찰하는 바는 보불전쟁 이후 수십 년간 유럽 본토에서 전면전이 없던 시기에, 철도의 시대를 맞아 수립된 작전계획들이었다. 각국에서 외교적 술책 정도로 여겨되던 동원령이나 선전포고가 각국의 밀실에서 수립되었던 작전계획 속에서는 철도시간표와 촘촘하게 엮여 있었고, 마치 도미노의 첫 블록을 밀어뜨린 것처럼 전쟁은 걷잡을 수 없이 치닫게 되었다.


개전 이후에 펼쳐지는 제1차 세계대전의 전역들에서도 전술·정치적 오판, 예상치 못한 전화위복(혹은 전복위화)과 새옹지마, 나비효과의 향연이 펼쳐진다. 책장을 펼치기 전에 기대했던 것처럼 가슴이 웅장해지기는커녕 테일러의 스토리텔링은 참 냉소적일 따름인데, 이따금 실소를 안겨준다. 어느 것을 사례로 고를 것인지도 참 고민스럽지만, 1916년의 전역을 엿보기로 한다.


1916년 초, 독일의 육군참모총장 폰 팔켄하인은 전황의 전기를 마련하기 위해 베르됭 요새의 공격을 결심한다. 베르됭 요새는 프랑스의 전선에서는 “난처하고 쓸데없이 튀어나온 부분의 맨 앞”에 위치했으므로 전술적으로 차라리 포기하는 것이 더 나을 법했다. 따라서 프랑스의 장군 조프르는 베르됭에서의 철수를 결심했지만, 프랑스의 수상 브리앙이 정치적인 곤란함을 우려하여 반대하자 조프르는 다시 베르됭을 사수하기로 입장을 선회한다. 테일러에 따르자면 “조프르가 이제까지 없었던 분별있는 결정을 내리려던 찰나”였는데, 정치수반의 개입으로 다시금 그는 “잘못된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하지만 독일의 승부수 또한 성공적이지 못했다. 팔켄하인은 “늘어나는 독일군 사상자를 보며 낙담”했고, 이윽고 베르됭 전선을 포기한다. 결과론적으로는 “베르됭은 프랑스의 승리인 것으로 보였”고, 이 전역의 사령관인 페탱은 그 후광으로 훗날 프랑스의 국가수반이 되었다.

한편, 동시기에 러시아도 독일에 대공세를 펼치고 있었다. 하지만 남부 사령관 브루실로프가 주도했던 이 작전(일명 ‘브루실로프 공세’)은 “러시아인들이 늘 그렇듯 허둥지둥 실수투성이”였고, “러시아 병사들은 아무 목적도 없이 산화”했다. 러시아 군대는 이 공세에서 100만 명의 사상자를 냈다. 그럼에도 이 작전은 결과론적으로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장군 개인의 이름이 붙은, 유일하게 성공적인 작전”일 정도로 “눈에 띄는 성취”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은 이 공세 이후 “마침내 싸울 의지를 상실”했다. 한편, 브루실로프는 본국의 지원을 충실히 받지 못했던 것이 큰 불만이었다. 그는 이후 왕조로부터 몸을 돌렸고, “트로츠키 휘하에서 더 행복하게 복무”하게 된다. 테일러는 브루실로프 공세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가와 러시아의 로마노프가를 모두 파멸시켰다고 평가한다.

뒤이은 솜므 전투에서는 또다시 무자비한 살육이 이루어졌다. 이 전역에 참전한 영국 보병대에 대해서 테일러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엄격한 군대였고, 가장 호된 규율과 가장 심한 처벌이 있는 군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전의 실패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고 “어떻게 해서 그 실패를 대규모로 반복할 수 있는지를 배웠을 뿐”이라고 평가했다.


테일러는 이처럼 군사 지휘관들과 정치가들에 대해 일견 냉소적인 시선을 비치면서도, “무명의 병사들이 제1차 세계대전의 영웅들”이었다면서, 그들에 대한 관심을 잊지 않고 서술해나간다. 예컨대, 1914년 크리스마스 날에 있었던 하룻밤의 비공식적인 휴전은 널리 알려진 일화이다. 이날만큼은 최전선에서도 총성이 멎은 채 영국과 독일의 병사들도 서로 만나 담배를 피우며 농담을 나누고 축구도 했다고 전해진다. 테일러는 담담하게 서술한다. “어쩌면 각 나라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은 작가들이나 정치인들보다는 이러한 전망(양국에 대한 증오)과 거리가 먼 것인지도 모르겠다”며.


한편, 서두에 말했듯이 본서에서 숨 막히는 전황과 뒤이어 찾아오는 통쾌함 또는 안타까움은 느끼기 힘들다. 테일러는 전쟁의 세부적인 전황을 서술함에 있어서는 그의 탁월한 스토리텔링 능력을 발휘하지는 않았다. 전쟁 묘사에서 오는 박진감을 기대하는 독자들에게는 아쉬울 법하다. 필자는 사실 제1차 세계대전에 잘 알지 못했던 문외한으로서, 유일하게 익히 들어본 전투가 개전 초기의 마른 강 전투였다. 그랬기에 독일군이 마른 강을 건넜다는 서술 이후, 이 전투의 전황이 언제쯤 생생하게 묘사될 것인지를 기대하다가 문득 마른 강 전투에 대한 서술이 끝났음을 알고 당혹감에 페이지를 다시 뒤적인 바 있다. 개별 전투에 대한 구체적인 서술을 원하는 독자들은 간단한 온라인 검색으로도 본서보다 충분히 많은 정보를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본서는 고전적인 명성만큼이나 제1차 세계대전을 알기 위한 좋은 길잡이임에 틀림없다. 테일러의 스토리텔링이나, 특히 본서의 제목이 시사하는 풍부한 지도와 사진이 분명한 강점이다. “유럽의 종말과 새로운 세계의 탄생”을 알린 이 전쟁을 조감하고픈 독자 제현들의 많은 일독을 권하는 바이다.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