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 박태원의 소설 구보씨의 1일의 구보가 현대의 철학자로 돌아왔다.
보통 '철학한다'고 하면 궤변이거나, 괜히 용어를 어렵게 풀어놓거나, 일반인은 이해하지 못하거나 하는 식의 난해한 행위로 흔히들 생각하고 용어 자체에서부터 낯설고 친근하지 못해 삶과 동떨어진것 같이 보이기도 한다. 이 책에서 Y는 이러한 일반인을 대변한다. 하지만 구보씨의 논리를 하나하나 반박하면서 전혀 밀리지 않고 나름 말을 꽤 잘한다. 우리의 시각으로 철학자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대화를 통해 반박을 하면서 알 수 있기 때문에 주입식으로 가르치는 철학이 아니라서 쉽게 머리에 내용이 들어온다.
벗는다는 의미의 누드에 대한 생각, 소통에 대한 깊이있는 시각, 뱀파이어가 된다는 것은 세상이 남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뱀파이어라는 관점, 스포츠의 경쟁, 동물, 놀이 등 여러가지 주제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철학자와 일반인의 대화를 통해 재미있게 읽어낼 수 있었다.
' 그들의 벗은 몸은 인위의 질서에 대한 저항의 표시다. 그런데 이 인위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그것은 쉽게 찢어지지도 벗겨지지도 않으며 도리어 벗은 몸에 파고든다. 오늘의 실태를 보라. 몸짱 열풍을 거쳐 신체 부위 하나하나를 지배하는 촘촘한 시선, 꿀벅지니 빨래판 복근이니 하는 따위의 웃지 못할 규정들이 판을 친다. 은희경의 표현대로, 인위의 아름다움이 우리를 멸시하고 주눅들게 하며, 알몸까지 수며든 징글맞은 소비의 질서에 매달리고 아부하게 한다. 오늘날 전시된 벗은 몸은 또 하나의 값비싼 옷이다. '
- p. 31
' "난 잔인하고 기괴한 장면들 싫어해. 그런 걸 왜 우리가 영화에서도 봐야 하니?"
"외면한다고 그런 면이 우리 삶에서 사라지는 것도 아니잖아.
오히려 그런 걸 극적으로 제시해서 우릴 자극하고 정화하는게 필요한지도 몰라. 거기서 새로운 아름다움이 탄생하는 것이고 말이야." '
- p. 103
책을 보니 철학자로서 구보씨의 시각은 정말로 특이하다. 축구경기를 보다가 사색에 빠지고 먹는 것에 대해 성찰하고 진지하게 누드모델이 되고싶다고 하질 않나 뱀파이어에 대해 탐구하지 않나.. 일반 사람들이 보면 좋게 말해서 특이한 사람, 나쁘게 말해서 돌아이 정도로 말할 수준이다. 웃긴 건 이러한 주제를 정말 진지하게 파고들어 그 속에서 여러가지 시각을 이끌어낸다는 것이다. 구보씨의 생각을 통해 우리는 평소에 신경도 안쓰던 부분에 대해 깊게 들여다 볼 수 있다.
이러한 책은 한 번 읽고나면 끝인 게 아니라 앞으로 비슷한 주제에 대해 탐구할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그 주제를 펼쳐 구보씨의 생각을 도움받을 수 있고, 또는 시간 날 때마다 조금씩 자주 읽어야 할 것 같다. 남의 생각은 한 번 읽어서 내 것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구보 씨의 생각을 받아들이냐, 일반인인 Y의 생각을 받아들이냐 한 주제에 두 가지 시각을 볼 수 있으니 그 또한 좋다.
책을 읽고나면, 주위의 사소한 것들이 눈에 들어오고 거기서부터 잡생각이 시작된다. 그것이 바로 철학의 출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