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웅 만들기-신화와 역사의 갈림길 박지향 외著 휴머니스트刊
[행복한 책읽기] 영웅은 근대국가가 만든 '신화'
영웅 만들기-신화와 역사의 갈림길
박지향 외 지음
휴머니스트, 376쪽, 1만5000원
얼마 전 영화 '알렉산더'를 봤다. 이 영화는 알렉산더가 어떻게 '신의 아들'로 불리는 영웅이 됐는지를 보여줬다. 영화에 따르면, 알렉산더를 영웅으로 만든 것은 어머니였다. 아들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남편을 죽일 만큼 자식 사랑이 넘쳤던 어머니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알렉산더는 페르시아 정복에 만족하지 않고 더 동쪽으로 나아가 인도 접경에 이르기까지 끝없는 정복전쟁을 벌였다는 것이다.
영웅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신화는 깨지고 영웅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임을 깨닫는다. 대체로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처럼 영웅의 개인적 삶은 불행하다. 헤겔 말대로 역사는 영웅의 개인적 불행을 희생물로 해서 진보한다. 영화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알렉산더가 동서문명을 융합해서 헬레니즘 시대라는 새역사를 창조하는 업적을 낳은 것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부친을 살해했다는 죄의식 때문이다. 역사에 대한 심리학적 해석은 매력적이지만, 거대한 역사의 문제를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로 환원해서 설명하기 때문에 위험하다.
역사학은 심리학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 위대했던 알렉산더 대왕은 죽어 없고, 이제 남아 있는 것은 그의 이름뿐. 그래서 역사학에서 중요한 것은 인물로서의 영웅이 아니라 그를 영웅으로 기억하게 만들었던 '담론들'이다. 서울대 서양사학과 박지향 교수의 주도아래 수행된 연구 프로젝트의 성과물로 출판된 '영웅 만들기: 신화와 역사의 갈림길'은 3 가지 문제의식으로 영웅이란 무엇인가라는 낡은 주제에 새롭게 접근했다.
첫 번째, 이 책은 영웅의 진실이 아니라 그가 어떻게 해서 영웅이라는 칭호를 얻었고 그렇게 기억됐는지를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무릇 영웅이란 죽고 나서 한층 더 길고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가며, 그런 사후 인생이 펼쳐지는 무대는 바로 후세인들의 변화무쌍한 기억이다." 영웅은 죽어서 없고, 단지 그에 대한 다양한 기억들만이 존재해서 역사가 되기 위한 권력투쟁을 벌인다.
두 번째, 이 책은 역사란 기억의 투쟁이라는 관점에서 영웅의 이미지가 시대에 따라 어떻게 변형되고 유포됐는지를 추적했다. 일찍이 '영웅의 역사'를 썼던 토머스 칼라일은 "세계사는 위인의 전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영웅이 역사를 만든다"는 생각은 영웅사관을 낳았다. 하지만 이 책은 영웅이란 그 자신이 이룩한 업적 때문이 아니라 후세인들이 만든 그에 대한 기억에 의해 영웅으로 숭배된다는 사실을 밝혔다. 다시 말해 영웅이 역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역사가 영웅을 만든다"는 사실을 적시한다.
오늘날 영웅사관은 퇴색했지만, 영웅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왜 그럴까? 이 책의 세 번째 문제의식은 근대에 이르러 '사회적 기억장치'가 국가에 의해 전유됨으로써 '국민적 영웅'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성찰하는 것이었다. 이 책이 다룬 영웅들인 나폴레옹, 잔 다르크, 엘리자베스, 무솔리니, 비스마르크는 모두 국민국가가 '국사'를 통해 만든 영웅들이다. 필자 가운데 한 사람인 고(故) 강옥초 교수가 인용한 조셉 캠벨(J. Campbell)의 말처럼 "토템의 깃발을 날리는 국가개념은 유아기의 상황을 지우기는커녕 유아적 자아를 강화, 확대시키고 있다. 한 국가가 열병식장에서 벌이는 얼치기 제의는 신이 아닌, 포악한 용(龍)인, 압제자를 섬긴다."
다행히 국민국가 시대가 저물어 가고 있는 우리시대에서 국가의 압제자들은 더 이상 우리의 영웅이 아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우리는 떠나보냈다. 하지만 우리는 그 허전한 마음을 어찌하지 못하고 이번에는 국가가 아니라 대중매체가 만들어낸 '스타'를 영웅처럼 숭배한다. 아버지 부재시대에서 아버지의 빈 자리를 채워줄 대상을 찾아 헤매는 우리는, 내 삶과 우리시대를 이끌어 줄 카리스마적 존재를 갈구하면서 드라마 '영웅시대'를 본다.
이 책은 말한다. 영웅이 우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욕망과 희망이 영웅을 만든다. 영웅의 터전이 바로 우리 마음 속에 있다는 역사의 진리를 깨달을 때, 우리 모두는 영웅이 될 수 있다. 김기봉 (경기대 사학과 교수)
●더 읽을 만한 책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조셉 캠벨 지음, 이윤기 옮김, 민음사)
◆영웅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크리스티앙 아말비 지음, 성백용 옮김, 아카넷)
◆영웅숭배론(토머스 칼라일 지음, 박상익 옮김, 한길사)
●책갈피
프랑스인의 피를 대가로 출세한 이민족 용병대장으로 추락했던 나폴레옹은 19세기말 민족주의 시대부터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독일에 대한 복수를 위해 민족정기를 일으켜 세우는 구국영웅으로 다시 등장했다…20세기 중엽 한때 현대판 대중독재의 선구자로 나타나기도 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의 영원한 국민적 자산이자 위대한 프랑스 그 자체로 자리잡았다"
2005.01.21 17:34 입력 / 2005.01.22 10:26 수정
http://news.joins.com/et/200501/21/200501211734326971a000a200a21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