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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stella.K > 영웅만들기/ 박지향 외 지음
'영웅신화'는 국민을 하나로 묶는다
휴머니스트 김기철기자 kichul@chosun.com
입력 : 2005.01.21 17:19 57'
시대가 어려울수록 사람들은 영웅의 출현을 기다린다. 한국 근대사에서 구한말 신문마다 을지문덕·이순신 전기가 앞다퉈 실리고, 2차 대전 당시 독일에 패배한 프랑스인들이 정복자 나폴레옹을 역사에서 불러낸 것만 봐도 그렇다. 영웅들에 대한 기억은 이렇듯 국민들을 하나로 묶고,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활용되는 유용한 도구였다.

박지향 서울대교수 등 중견·소장 서양사학자 여섯 명은 영웅신화가 지배권력에 의해 만들어지고, 변형되고, 전승되는 메커니즘을 추적한다. 나폴레옹과 잔 다르크, 엘리자베스 여왕과 무솔리니, 비스마르크가 대상이다.

나폴레옹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기억은 숭배와 규탄 사이를 오락가락했다. 전쟁 영웅으로 추앙받던 나폴레옹은 권좌에서 쫓겨난 후에는 전쟁광으로 배척된다. 1830년 7월 왕정 이후 ‘인민의 나폴레옹’으로 화려하게 복귀했으나 그의 조카 루이 나폴레옹이 친위 쿠데타로 제2 제정을 수립하자 독재의 원형을 제공한 장본인으로 추락한다.

1870년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프랑스에서 나폴레옹은 이민족의 침략에 맞선 민족투사로 다시 떠올랐고, 1·2차 세계대전과 함께 다시 프랑스 혁명의 계승자이자 유럽 해방자로 돌아왔다. 흥미로운 사실은 현실 정치가 나폴레옹 시대의 억압적 유산에서 자유로워졌을 때, 그에 대한 향수가 고조됐다는 점이다.


▲ 나폴레옹은 재임 당시 이미지 조작을 통해 황제 숭배를 부추기는 정치적 수완을 발휘했다. 하지만 권좌에서 쫓겨난 후 전쟁광, 식인귀로 추락한다. 1806년 앵그르 작.마녀로 몰려 화형당한 15세기의 잔 다르크를 다시 불러낸 것은 나폴레옹이었다. 보수적인 왕당파와 급진적인 공화파의 공세에 맞서 그는 국가 통합의 상징인물로 잔 다르크를 재창조했다. ‘프랑스의 수호자’로 소생한 잔 다르크는 프로이센과의 전쟁과 1·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애국주의의 표상으로 떠올랐다. 제국주의 시대에 한국을 비롯한 그리스, 폴란드 등 식민지와 약소국에서 민족 해방 투쟁의 성처녀로 받들어진 잔 다르크는 최근 남성적 권위와 사회 관습에 도전한 페미니스트로 변신하고 있다.

스페인 무적함대를 물리쳐 영국의 황금시대를 연 엘리자베스 여왕에 대한 기억은 ‘처녀왕’에서 위대한 CEO까지 오간다. 엘리자베스는 “나 자신이 연약한 신체를 가진 여성임을 알고 있지만 나는 국왕의 심장, 그것도 잉글랜드 국왕의 심장을 가졌다”고 선언, 안팎의 도전을 물리친다.

17세기 그는 기독교 신앙과 자유를 핵심으로 하는 잉글랜드 국민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인물로 부각됐으나, 성(性) 역할 구분이 엄격해진 18세기와 19세기 엘리자베스 신화는 몰락했다. 20세기 후반 엘리자베스는 마거릿 대처 총리와 같은 현대 전문직 여성의 역할 모델로 떠올랐고, 얼마 전 뉴욕타임스는 그를 ‘밀레니엄 리더’ 1위로 꼽으면서 위대한 CEO로 평가했다.

무솔리니에 대한 기억은 파시즘의 원흉에서 대중의 동의를 이끌어낸 지도자였다는 평가까지 복잡하게 얽히고, 히틀러의 길을 닦은 전임자로서 비판받던 독일 제국의 창건자 비스마르크는 최근 독일 통일의 주춧돌을 놓은 위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과거는 역사가들에게 한가로운 살롱이 아니라 기억의 전승을 둘러싼 치열한 전장임을 실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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