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각인된 내셔널 히스토리는 사실상 민족국가를 위한 변명이었다. 그것은 민족국가를 역사발전의 주체이자 대상으로 설정함으로써 가장 자연스러운 정치조직이라 믿게 만들고 또 정당화했다. 개개인이 일상적 삶의 영역에서 겪은 고통과 절망, 기쁨과 희망은 민족의 고난과 영광이라는 민족 서사에 가려 설 땅이 없었다.(비판과 연대를 위한 동아시아 역사포럼, 한국 공동대표 이영훈, 임지현)
올림픽이나 월드컵도 아닌데 4년 주기로 반복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일본 우익계가 만든 역사교과서로 인한 파문이다. 그런데 이에 대한 우리 측의 반응을 보면 좀 이상하다. 정부가 나서서 항의하고 시민들이 규탄대회를 여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근본적인 비판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모두 옳고 당신들은 틀렸다는 식이다. 오히려 일본의 우파언론인 산케이신문은 한국의 국사교과서를 본받으라고 한다. 일본의 새 역사교과서를 만든 주체나 한국의 비판주체는 민족적 정체성의 확립과 국민 만들기라는 동일한 역사관을 공유하고 있는 적대적 공범자들인 것이다. 이들 양자는 자신들의 민족적 정체성을 강조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서로를 배제하고 타자화하여 겉으로는 첨예하게 충돌하지만 결국 민족주의라는 같은 토양에 뿌리내리고 있는 결과를 초래한다.
한편 교과서 파동으로 일본의 각급 학교가 우익 교과서의 채택을 꺼린 만큼 좌파 교과서도 외면해 어부지리로 중립적 교과서들의 채택률이 높아지는 결과가 초래됐다. 좌파 교과서는 정신대 문제를 비롯하여 일본의 식민지배와 전쟁에서의 가해행위를 비교적 자세히 기술하고 있어 우파로부터 자학사관이라는 비판을 받아 왔다. 이에 대해 도쿄대 강상중 교수는 우와 좌의 극단을 배제하고 중(中)을 취한다는 것은 국가와 국민에게 좋지 않았던 역사의 기억을 물타기해서 망각시키는 긴 호흡의 역사수정주의라고 지적한다. 한양대 임지현 교수는 한국의 민족주의와 일본의 민족주의가 적대적 포즈를 취하는 듯하지만 결국은 공범자라며 내셔널 히스토리의 틀을 고수하는 한 이런 싸움은 계속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아예 그 틀을 깨자는 것이 국사 해체라고 설명한다.
우리나라에서 민족이란 말이 쓰이기 시작한 것은 러일전쟁 이후로, 조선왕조가 위기에 처하자 집단적 위기감이 고조되면서 일본으로부터 민족이라는 말을 수입해 쓰기 시작했다. 이처럼 일본 제국주의의 대항물로서 탄생한 한국의 민족주의를 끊임없이 재생산하고 있는 제도적 장치가 바로 국사라는 것이다. 국민국가 형성기에 민족주의는 대중을 동원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이념이었으며, 그 민족주의는 나와 남의 테두리를 규정하고 구별 짓는 이데올로기였다. 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자신들의 예정된 숙명에 대한 믿음과 영광과 구원의 신화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입증하기 위해 다른 민족의 신화를 짓밟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민족주의는 태생적으로 파괴를 함유하며, 비이성적이고, 편협하고 증오심을 유발한다.
한국의 국사는 식민주의사학에 의해 구축됐고 그나마 식민지 체제하에서 한국의 역사는 역사체계 속에서 사라졌다. 1911년 1차 조선교육령에서 역사과목이 없어졌고, 1922년 2차 조선교육령에서는 일본역사를 가르쳤으며 1927년 일본사가 국사로 바뀌었다. 1938년 3차 조선교육령에 따라 민족적인 것의 말살, 내선일체의 강조, 대동아 공영권의 역사적 사명이 강조되는 국사편찬이 이루어졌다. 이는 독자적인 국민국가와 민족의 형성에 실패한 집단이 세계사에서 어떻게 지워지는지 보여준다. 제국주의와 식민지라는 역사적 경험의 차이는 엄청난 것인데 그것을 동등하게 평가해 주변부의 저항 민족주의는 제국주의의 거울반사에 불과하며 궁극적으로 양자는 적대적 공범관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설정하는 것은 부당하다. 그것은 마치 국권회복을 목표로 무력을 선택한 의병과 국운의 융성을 위해 무력으로 진압한 일본군을, 무력을 동원하고 민중의 희생을 동반했다는 점에서 적대적 공범관계로 보는 것과 같다.
식민지 시기 민족주의 사학이 견지했던 문제의식이 오늘날의 상황에서는 남과 북 모두에서 그 건강성을 상실하고 체제 이데올로기로 전락했다. 예를 들어 민족과 자주의 관점에서 신라의 삼국통일을 외세 의존적 축소통일이라고 폄하하는 신채호식 역사해석은 유효기간이 지났다는 것이다. 즉 당시 신라의 입장에서 볼 때 고구려나 백제는 피를 나눈 같은 민족이 아니라 당나라나 왜국과 마찬가지로 맹방이 되기도 하고 적국이 되기도 하는 대외전략의 대상일 뿐임을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성시 교수는 <만들어진 고대>에서 고대사 서술에서 우리나라의…… 와 같은 구절은 있을 수 없으며 근대의 국민 의식을 전제로 일본민족과 한민족이 제각각 고대 이래 자기 완결적으로 민족사를 걸어왔다는 식의 논의가 횡행했다고 비판했다.
그러면 과연 민족․국가 개념을 버리고 역사를 서술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해 대전대 도면회 교수는 민족․국가 개념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민족․국가에 도덕적 정당성을 선험적으로 부여하지 말고 역사서술을 하자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국민국가와 민족․민중 중심의 역사는 과거 인간의 행위를 반국민(민족)적 행위와 애국(애족)적 행위로 양분하고 그 사이의 중간적 행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국가와 민족에게 해롭게 했다는 이유로 역사로부터 배제되거나 반대로 국가와 민족을 위해 기여했다 해서 이전의 모든 행위가 역사의 이름으로 사면되는 도덕적 판단을 멈출 때 역사는 비로소 개인에게 눈을 돌릴 수 있다. 도교수의 주장은 국사 해체 이후 어떻게 역사를 서술할 것인가에 단초를 제공한다.
일본의 새 역사교과서가 주장하는 아시아해방전쟁 혹은 대동아공영권 등 일본 우익의 역사논리를 해체하기 위해 우리는 국사교육의 강화가 아닌 세계사교육을 재정립해야 한다는 역설이 있다. 다시 말해 역사투쟁에서 다양한 전략과 전술을 구사하기 위해 민족을 코드로 한 역사청산으로부터 탈민족적 연대로 문제의 틀을 전환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민족을 단위로 해서 우리와 그들 사이에 전선을 형성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우리 안의 그들을 배제하고 그들 안의 우리와 연대하는 방안을 모색할 것을 권하고 있다.
남을 비판하기 전에 우리를 돌아보면 한국의 국사교과서 서술에도 문제가 많다. 아무리 국사교과서라고 하지만, 그리고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민족사와 국가사, 지역사가 대체로 일치하는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민족이라는 말이 지나치게 많이 사용되고 있다. 특히 고교 교과서에서 홍익인간을 우리 민족이 간직해온 민족정신의 원류이며 민주주의의 이념과 부합한다고 한 것은 과도한 주장이며 이것이 퇴행성 국가주의로 이해될 소지가 있다. 이제는 세계 여러 나라, 여러 민족과 평등하게 교류 협력하는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민족주의, 강대국 국가주의의 틈바구니에서 주체성․정체성을 살리려는 민족주의가 절실하다.
국사 해체론은 한마디로 담론의 과잉이며, 대안 없는 문제 제기이다. 국사 해체라는 말 속에는 근대국가 건설 과정에서 민족주의에 대한 문제 제기가 담겨 있다고 본다. 특히 동아시아 3국의 전통이 긴밀히 연대해온 이상 일국사적 시각은 분명 문제가 있다. 그러나 중국이 중화(中華)학을 앞세우고 일본이 재무장하고 있는 현실에서 우리 혼자 발가벗고(국사 해체) 비판하는 것이 과연 동아시아 평화에 어떻게 기여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오히려 논의를 반전시켜 한국사학계가 개별연구를 통해 한국사의 다채로움을 보여주려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사관이 강할수록 역사학은 실천성이 강하다. 사관 자체가 그 시대가 요구하는 주장, 즉 호소력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호소력과 실천성이 강한 사관일수록 과거의 진실을 과장하고 왜곡하고 단순화시키는 폐단이 있다. 예를 들어 20세기를 풍미한 민족주의사관은 민족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미화시키며, 계급주의사관은 계급 갈등을 사실 이상으로 과장하는 오류를 범한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여기서 역사학은 중대한 딜레마에 직면한다.(한영우 <역사학의 역사> 에서)
한교수의 시각을 빌리면 국사 해체란 기독교사관, 인문주의사관, 계몽주의사관, 민족주의사관, 유물사관, 문화주의사관, 유교사관 등 서로 다른 가치 기준을 넘어서는 한편, 실증에 매몰되지 않는 새로운 역사 연구라 해도 무리가 아닐 것 같다. 한교수는 동아시아 보편의 역사인 동시에 한민족의 특수사라는 이중적 성격을 염두에 두고 그 테두리 안에서 한국인이 어떻게 인간과 자연의 생명의 가치를 찾으려고 노력해 왔는지 검토하는 것이 한국사 연구의 주요 과제라고 했다. 국사 해체라는 도발적 질문 뒤에 던져진 무거운 과제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