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떠한 책을 대할 때, 나는 우선 빈 종이 한 장과 연필을 손에 든다.
그 책이 내게 주는 메시지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다.
<비와 바람의 기억>은 행운이 뒤따른 우연 같은 책이라 할 수 있다.
책을 고를 때는 보통 미리보기를 통해 그야말로 '미리' 읽어 본다.
작가는 마치 바람 같은 존재로 자신을 소개했다.
글에서 구체적으로 그렇게 표현한 곳은 발견하지 못했지만
'나를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나도 모르겠다. 가슴이 가는 대로 글을 쓰고,
손이 가는 대로 책을 읽고, 발이 닿는 낯선 곳에 그저 머무른다'고 되어 있으니
나로서는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정체성은 없고, 작가도 아닌, 그저 글을 풀어내는 '단어의 노예'라고, 그렇게 15년을 살았단다.
기자와 편집자라는 이름으로 15년 넘게 살아 온 나와는 어떤 다른 삶을 살았을까.
똑같이 '단어'와 함께 살아온 시간일 텐데 그의 글이 궁금해져 열었다.
서두 부분을 읽었을 때, 작가는 그야말로 '바람 같은 존재'라 여겨졌다.
스치는 듯 존재하고 존재하는 듯 스치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렇게 쭉 이어졌어도 좋았을 것을,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작가를 더 이상 궁금해하지 않게 되었다.
'그저 존재하는 사람'으로 만난 것 같다 느낀 것은
대부분이 시적으로 표현되는 그의 단어가 나열되다가
문득 문득 일상 어딘가에서 종종 만나는 이웃의 현실 언어를 듣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나 역시 일상의 언어로 말하려다, 조금은 바람 같은 표현으로 솔직한 느낌을 남긴다.
책을 여는 동시에 집어 들었던 빈 종이에
한 구절 적고 나니, 전체를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아 빈 공간이 많다.
P.32
바람개비는 바람이 만드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속도가 만드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