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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EMMA님의 서재
  • 악의 꽃 (리커버)
  • 샤를 보들레르
  • 13,500원 (10%750)
  • 2021-06-25
  • : 735

샤를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 1821~1867, 이하 ‘보들레르’)!
그는 19세기의 위대한 미술비평가 중 하나이자 ‘현대시의 시조’로 꼽히고 있다. 하지만 악마의 옹호를 자처한 반항적인 시인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런 그가 남긴 유일한 시집이 바로 이 책, <악의 꽃(Les Fleurs Du Mal)>이다. 그의 이미지만으로는 악마주의적이거나 다소 외설적인 시(詩)들이 가득 찰 것 같지만, 실제 <악의 꽃>을 펼치면, 반항적인, 젊은 락스타의 노래 같은 느낌을 주는 시(詩)가 더 많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예를 들면, <알바트로스(L’ALBATROS)>라는 시(詩)가 있다.

알바트로스


흔히 뱃사람들이 재미 삼아

거대한 바닷새 알바트로스를 잡는다.

이 한가한 항해의 길동무는

깊은 바다 위를 미끄러져 가는 배를 따라간다.


갑판 위에 일단 잡아놓기만 하면,

이 창공의 왕자도 서툴고 수줍어

가엽게도 그 크고 흰 날개를

노처럼 옆구리에 질질 끄는구나


날개 달린 이 나그네, 얼마나 서툴고 기가 죽었는가!

좀 전만 해도 그렇게 멋있었던 것이, 어이 저리 우습고 흉한 꼴인가!

어떤 사람은 파이프로 부리를 건드려 약 올리고,

어떤 사람은 절름절름 전에 하늘을 날던 병신을 흉내 낸다!


[시인]도 이 구름의 왕자를 닮아,

폭풍 속을 넘나들고 사수를 비웃건만,

땅 위, 야유 속에 내몰리니,

그 거창한 날개도 걷는 데 방해가 될 뿐. [p. 47]


우리가 신천옹(信天翁)이라고 부르는, 날개를 펼치면 가장 큰 새인 알바트로스를 제목으로 하는 이 시(詩)를 보면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자연과 공존(共存)하려는 동양이라면 이렇게 자유롭게 푸른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를 그저 보고 즐겼을 텐데, 자연을 정복(征服)의 대상으로 여기는 서양이기에 선원들은 그 새를 잡아 갑판에 내려놓는다. 시(詩)에는 묘사되어 있지 않지만, 아마도 날개를 꺾거나 해서 알바트로스가 다시는 하늘을 날 수 없게 만들지 않았을까? 그렇기에 ‘어떤 사람은 파이프로 부리를 건드려 약 올리고, 어떤 사람은 절름절름 전에 하늘을 날던 병신을 흉내’ 낼 수 있는 것이리라.
어쩌면 보들레르는 이 무기력해진 알바트로스에게 자신을 투영시켰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시인도 이 구름의 왕자를 닮아, 폭풍 속을 넘나들고 사수를 비웃건만, 땅 위, 야유 속에 내몰리니’라고 한탄한 것이 아닐까? 혹은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번뜩이는 재능을 가진 자신이 대중의, 문단의 평가에 의해 날개가 꺾일 미래를 어렴풋이 예측했을지도 모른다.

보들레르는 젊은 시절 사창가를 드나들다가 파리 법과대학에 입학하기 전 성병에 걸렸다고 한다. 어쩌면 이런 방종한 품행 때문에 그의 작품에도 색안경을 끼고 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악의 꽃>에서 삭제된 시(詩) 때문이다.
널리 알려진 대로 보들레르는 시집 <악의 꽃> 출간으로 공중도덕을 해친다는 이유로 기소되어 벌금과 함께 시(詩) 여섯 편을 삭제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그 삭제된 시(詩) 중 하나인 “너무 쾌활한 여인에게(A CELLE QUI EST TROP GAIE)”를 보면, 굳이 삭제해야 할 만큼 음란하고 저속한 시(詩)로 보이지 않는다.

너무 쾌활한 여인에게


그대 머리, 그대 몸짓, 그리고 그대 모습은

아름다운 풍경처럼 아름답다;

청명한 하늘에 신선한 바람처럼

그대 얼굴엔 웃음이 노닌다.


그대 곁을 스쳐가는 침울한 행인도

그대의 팔과 어깨로부터

빛처럼 솟아나는

그 건강에 황홀해진다.


그대 옷차림에 뿌려놓은

요란스런 색깔은

시인의 마음에

꽃들의 발레 같은 환영을 던진다.


그 야단스런 옷들은

얼룩덜룩한 그대 마음의 표상인가;

나를 황홀하게 하는 쾌활한 여인이여,

나는 그대를 미워한다, 그대 사랑하는 만큼!


때로 아름다운 정원에서

무기력을 떨치지 못할 때면,

나는 태양이, 빈정거리듯,

내 가슴을 찢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봄과 신록이

내 마음에 그토록 창피를 주었기에,

나는 한 송이 꽃에

[자연]의 교만함을 벌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어느 날 밤

쾌락의 시간이 울릴 때,

보석 같은 그대 몸 곁으로

겁보처럼 살그머니 기어가,


쾌활한 그대 살을 벌주고파

내맡긴 그대 젖퉁이를 멍들게 하고파,

그대의 놀란 옆구리에

움푹한 커다란 상처를 내어주고파,


그리고 아 현기증 나는 쾌감이여!

더욱 눈부시고 더욱 아름다운

그 새 입술을 통해, 누이여,

그대에게 내 독을 부어 넣고 싶어라! [pp. 351~352]


아무리 읽어봐도 왜 삭제되는, 일종의 기록말살의 판결을 받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물론 여성의 동성애를 노래하는 “레스포스(LESBOS)”나 “천벌받은 여인들(FEMMES DAMNEES)”은 시대 상황을 감안하면, 풍기문란죄의 적용을 납득할 수 있다.

자, 그렇다면 보들레르가 <악의 꽃>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시(詩)를 즐겨 읽는 편이 아니라서 잘 모르겠다. 다만 그가 <악마의 연도(煉禱)(LES LITANIES DE SATAN)>에서 언급한 악마는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악마와 달리 하나님에 의해 천국에서 쫓겨난 천사, 소위 ‘루시퍼(Lucifer)’의 이미지가 강하다. 어떻게 보면 카르타고의 한니발 바르카(Hannibal Barca, B.C. 247~B.C. 183)처럼 핍박 받는 영웅의 이미지도 살짝 곁들인.
어쩌면 악마를 그렇게 묘사했기에 악마를 옹호했다는 얘기를 들었을지도 모른다.

학창시절 국어 시간에 배웠던 것처럼 분석하기에는 난해하지만, 가볍게 한 번쯤 읽어보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보들레르에 대한 선입견은 버릴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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