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귀 가죽]은
<골짜기의 백합(Le lys dans la vallee>, <으제니 그랑제(Eugenie Grandet), <고리오 영감(Le Pere Goriot)> 등으로 유명한 오노레 드 발자크(Honore de Balzac, 1799~1850)는 사실주의 문학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라는 이 책, <나귀 가죽(La Peau de chagrin)>(1831)은 사실주의 문학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인다. 소유자의 소원이 무엇이든지 들어주지만, 그 때마다 소유자의 목숨도 조금씩 사라진다는 나귀 가죽을 소재로 하는 작품을 사실주의 소설이라고 주장할 수 없는 노릇이니까.
게다가 원제목을 고려하면, ‘나귀 가죽’이 아닌 다른 이름, 예컨대 ‘괴로움의 가죽’이 더 적절한 번역일지도 모른다. 불어사전을 펼쳐보면, ‘peau’은 ‘가죽, 피부’라는 뜻을, ‘chagrin’은 ‘괴로움, 슬픔, 신경질, 우울’이라는 뜻을 각각 가지고 있다고 한다. 원제목이 프랑스인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을지 궁금할 정도다.
그래서 번역자의 해설을 펼쳐보니
이 책의 제목에 들어 있는 ‘chagrin’은 가죽의 한 종류를 가리키는 말로써
~ 중략 ~
(소설 속에서 가죽은 대개 la peau de chagrin이라고 불리지만 그냥 le chagrin혹은 le peau라고도 불린다), 엄밀히 말하면 동어 반복인 la peau de chagrin이라는 표현은 작가 발자크의 의도적인 선택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의도는 두말할 나위 없이 가죽을 가리키는 chagrin이라는 단어에 그것과 철자가 같지만 그것보다 훨씬 더 보편적으로 쓰이는 ‘슬픔, 번민’이라는 추상적인 의미를 가진 또 다른 단어를 겹치려 한 데 있다. [pp. 444~445]
라고 되어 있다. 마치 다이허우잉[戴厚英, 1938~1996]의 <사람아 아, 사람아! [人啊, 人!]>을 떠올리게 만든다. 어쨌든, 번역자가 원제목을 직역하지는 않았지만, ‘나귀 가죽’이라는 제목은 이 책에 정말 어울린다. 왜냐하면, 이 소설이 가난과 절망으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젊은 ‘라파엘’이 자살하려다 우연히 들어간 골동품 상점에서 늙은 주인으로부터 ‘나귀 가죽’을 얻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등가교환 혹은 행운 총량의 법칙
어디선가 사람은 각자 타고난 복(福) 혹은 운(運)의 총량이 정해져 있어서 이를 초과해서 누릴 경우 죽는다는 얘기를 들은 바 있다. 극단적인 사례를 들자면, 주어온 옷을 입고 초근목피(草根木皮)로 하루 건너 끼니를 때우면서 60살까지 살 운을 타고난 아이가 만석지기 양반 가문의 장손(長孫)으로 태어나 좋은 옷에 좋은 음식을 먹고 사는 바람에 그 운을 다 써서 돌잔치에서 급사(急死)하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될 수 있다. 이 소설에서 묘사된 ‘나귀 가죽’은 이런 타고난 복(福) 혹은 운(運)을 나귀 가죽을 매개로 유형화했다고 느껴진다.
조금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한다면, 일본의 애니메이션인 <강철의 연금술사>(2003)의 유명한 ‘등가교환의 법칙’을 떠올려도 된다. 주인공 가운데 하나인 알폰스 엘릭(Alphonse Elric)은
“사람은 그 무언가의 희생 없이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그와 동등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것이 연금술에서 말하는 등가교환의 법칙이다.”
라고 말한다. ‘나귀 가죽’처럼 욕망의 실현을 대가로 목숨을 가져가는 것 또한 등가교환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당신은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만약 당신에게 누군가 이 소설에 나오는 ‘나귀 가죽’을 소유할 기회를 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물론 당신이 ‘나귀 가죽’에 새겨진
만일 그대가 나를 소유하면 그대는 모든 것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대신 그대의 목숨은 나에게 달려 있게 될 것이다. 신이
그렇게 원하셨느니라. 원하라, 그러면 그대의 소원은
이루어질 것이다. 하지만 그대의 소망은
그대의 목숨으로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대의 목숨이 여기 들어 있다. 매번
그대가 원할 때마다 나도 줄어들고
그대가 살날도 줄어들 것이다.
나를 가지길 원하는가?
가져라. 신이 그대의
소원을 들어주실
것이다.
아멘! [p.70]
라는 산스크리트어를 읽고, 그 선택이 가져올 결과를 알고 있는다는 것을 전제로 말이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귀 가죽’의 소유자가 될 기회를 받아들일 것이다. 나는 다를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이도 있을 것이고, 당장의 욕망에 눈이 뒤집혀서 그런 이도 있을 것이다. 사실 1/456의 확률로 456억 원을 받게 되는 ‘오징어 게임’에 참여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보다 더 명확하게 원하는 것을 획득할 기회가 주어지는, ‘나귀 가죽’을 거절하기는 힘들 것이다.
사실 욕망과 수명의 밸런스를 잘 조절할 수만 있다면, ‘나귀 가죽’을 획득하는 것은 손쉽게 성공적인 삶으로 갈 수 있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를 위해 절제하는 삶을 사는 것은 힘든 일이기에 문제다. 거의 성인(聖人)급으로 절제해야만 욕망과 수명의 균형을 이루면서 ‘삶’이라는 담장 위를 걸어갈 수 있을 테니까.
한번쯤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지금까지 어떤 삶을 살아왔으며,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가고 싶은지 생각해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러면 자신의 ‘나귀 가죽’이 어떤 모양으로 변해있을지 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