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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EMMA님의 서재
  • 비스킷
  • 김선미
  • 13,320원 (10%740)
  • 2023-09-13
  • : 33,156

존재감의 상실, 비스킷이 되어가다 


이 소설의 주인공 성제성(이하 ‘제성’)은 남들보다 예민한 청각으로 인해 ‘청각 과민증’, ‘소리 공포증’, ‘소리 강박증’이라는 청각 관련 질환을 갖게 되었다. 동시에 이 예민한 청각 덕분에 자신을 지키는 힘을 잃어 눈에 보이지 않게 된 사람들을 찾아낼 수 있는 능력도 가지게 되었다.

‘눈에 보이지 않게 된 사람’이라고? 수련을 통해 닌자[忍者]가 된 사람일까? 아니면 말 그대로 투명인간이 된 것일까? 아쉽게도 그들은 닌자가 되기 위해 끝없이 수련을 한 것도, 특별한 약을 먹거나 광선을 쐰 것도 아니다. 단지 그들의 존재감이 옅어져서 사람들이 그들을 인식하지 못한 것일 뿐이다.


세상에는 자신을 지키는 힘을 잃어 눈에 잘 보이지 않게 된 사람들이 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존재감이 사라지며 모두에게서 소외된 사람.

나는 그들을 ‘비스킷’이라고 부른다. [p. 7]


이들 비스킷을 제성은 어떻게 찾아냈을까?


나는 비스킷을 소리로 인지한다. 미약한 숨소리, 힘없는 발소리, 가볍게 스치는 옷감의 소리를 듣고 그들이 주변에 있다는 걸 안다. 일단 그 소리를 인식하면 곧이어 모습이 보인다.

비스킷은 대체로 형체가 희미하다. 희미한 정도는 비스킷이 자신을 인식하는 태도에 따라 달라진다. 나는 비스킷의 상태를 세 단계로 구분한다.

1단계는 반으로 쪼개진 상태. 보이지 않는 건 아니지만, 딱히 존재감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주변 사람들이 “어? 너 여기 있었어? 몰랐네.”라고 말하는 단계이다. 몸 선이 흐리고 전체적으로 선명하지 않다. 시력이 좋은 사람은 1단계 비스킷을 만나면 어쩐지 어두운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기도 한다.

2단계는 조각난 상태. 열 명 중 다섯 명이 바로 옆에 있어도 알아보지 못한다. 그만큼 존재감이 불안정하고 자신을 지키는 힘이 약하다. 불투명한 유리 너머를 보는 것처럼 흐릿해서 보았어도 무엇을 봤는지 알 수 없을 때가 많다. 유령이나 초자연 현상으로 인식되는 경우도 2단계에 해당한다. 종종 목소리를 통해 존재감이 드러나서 갑자기 들리는 목소리에 주변인들이 깜짝 놀랄 때도 있다.

3단계는 부스러기 상태. 존재감이 없어 세상에서 사라지기 직전인 상태다. 투명인간과 비슷할 정도로 잘 보이지 않아 나도 소리로 찾아내기 힘들다. 이때까지 비스킷 3단계인 사람을 딱 한 번 만난 적이 있다. 비스킷 3단계는 오랫동안 자신을 쓸모 없는 존재로 여겨왔기에 주위에서 덩달아 관심을 꺼버리기도 한다. 그러면 모습을 드러낼 용기가 사라진 비스킷이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더욱 숨기는 악순환에 빠진다.

지금까지 관찰할 바로는 비스킷의 단계는 수시로 변한다. 자신을 인정하는 마음은 하루에도 몇 번씩 무너졌다가 재건되기 때문인 것 같다. [pp.7~9]


이런 비스킷을 찾아내다니 뭔가 대단한 능력처럼 보인다. 어쩌면,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대가로 남들보다 뛰어난 능력을 지니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영화 <엑스맨>속의 돌연변이들처럼 말이다. 하지만, 영화 <엑스맨>속의 돌연변이들과는 달리 제성에게는 자비에 교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정신 치료 센터에서 치료를 받고 일상으로 복귀하는 일을 반복해야 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제성은 어린 시절 길을 헤매다가 개에게 위협당하는 비스킷인 김효진(이하 ‘효진’)을 구해주었다. 문제는 비스킷 3단계에 도달한 효진이는 투명할 만큼 존재감이 흐렸기에, 개 주인을 비롯한 이를 본 사람들이 제성이 그냥 짓기만 하는 개를 뛰어가서 일방적으로 걷어찼다고 여긴 것이다. 이로 인해 제성은 ‘비스킷을 괴롭히는 사람에게 복수하겠다’는 다짐을 했다.

결국 제성은 자신의 존재감을, 비스킷이 된 이를 구하고 그들을 위해 복수하는 것으로 채워나간 셈이다. 분명히 비스킷이 된 이들을 구하는 것은 선의(善意)다 하지만 그들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복수하는 것은 다르다. 어떤 형식으로 복수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복수는 범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복수가 주는 쾌감과 허무함에 중독되면 존재감을 증폭시킬 수는 있을지 몰라도 스스로를 파괴하게 된다. 물론 복수는 하지 않더라도 비스킷을 구하는 것은 필요하다.


왜냐하면, 마르틴 니묄러(Martin Niemoller, 18921~1984) 목사의 “처음 그들이 왔을 때”라는 글처럼. 너도, 나도 비스킷이 될 수 있으니까.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그들이 사민단원을 가두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민당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그들이 노동조합원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나에게 닥쳤을 때는, 나를 위해 말해 줄 이들은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에 의해 비스킷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채식주의를 선언했다가 튄다는 이유로 학폭의 대상이 된 서도주(이하 ‘도주’)나 대입을 앞두고 부모님의 절대적인 관심을 받는 언니와 매 순간 신경 써야 하는 우악스러운 동생과는 달리 부모의 관심을 받기 위해서는 구걸하듯이 노력해야 하는 상황에 배신감을 느낀 조제 혹은 이지안(이하 ‘지안’)처럼 스스로 존재감을 지우는 경우도 있다. 도주의 경우 학폭 가해자에게 복수를 한다고 하더라도, 지안처럼 자신에게 덜 신경 쓰는 부모가 원인인 경우에는 도대체 누구에게 복수를 해야 할까? 그렇기에 제성의 방식은 어린 시절 치기 어린 미숙함이 빚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제성에게 영화 <엑스맨>속의 자비에 교수처럼 믿을만한 어른이 있었다면 처음부터 다른 방식을 선택했을 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불필요한 악연들은 좀 더 줄일 수 있지 않았을까?


이 소설에서처럼 아이들만이 비스킷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사회생활을 하면서 어른들이 더 많이 겪게 되는 일일지도 모른다. 예전에 해고하는 대신, 마치 투명 인간이라도 된 듯한 취급을 하는 방식으로 퇴사를 유도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자신의 존재가 거부당하는 느낌, 혹은 사회적으로 고립되었다는 느낌에 짓눌려 결국 사표를 제출하지 않았을까?


눈으로 보았어도 믿을 수 없는 존재. 보이지 않아도 좌시해선 안 되는 존재. 그 존재들이 모두 인간이고, 우리의 이웃이라는 걸 잊은 듯 논쟁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다만 모두가 공감하는 한 가지 사실은 누구도 비스킷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비스킷은 자신을 소외시키는 주변에 의해 처음 만들어진다. 세상에서 소외되면 많은 사람들은 자존감을 잃고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용기마저 잃고 만다. 그렇게 스스로 고립을 택하고 자신을 지켜 낼 힘을 잃으면서 단계를 넘나들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매일 스스로를 지켜 내기 위해 힘껏 노력하지만, 꾹꾹 눌러 담았던 쓸쓸한 마음이 어쩔 수 없이 왈칵 쏟아지는 날이 있다. 그런 날에는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모습이 희미하게 깜박거린다. 그 때 필요한 건 어디로 나아갈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아득함을 함께 바라보고 손잡아 줄 수 있는 누군가다.

누구나 비스킷이 될 수 있다. 또한 누구나 비스킷을 도울 수 있다. 그 전제를 잊지 않으면 모습이 사라져도 서로를 믿고 존중하며 건강하게 서서히 회복할 수 있다. 그걸로 반은 성공한 거다. [pp. 217~218]


(주)마크로밀엠브레인이 올해 4월에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20대의 59.2%가 일상에서 외로움을 느낀다1)고 한다. 개인이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단절된 사회가 가져온 결과인 셈이다.

이 소설에서 말하는 ‘비스킷’도 이러한 사회 해체 과정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정도의 차이가 있고, 수단의 차이가 있어도 우리 사회 역시 ‘비스킷’을 만드는 사회이기에 서점에 가면, 윤홍균의 <자존감 수업>, 충페이충[叢非從]의 <자존감 회복 수업>, 김태형의 <가짜 자존감 권하는 사회>처럼 ‘자존감’을 다루는 책들을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아니, 이런 종류의 책들이 출판된다는 것 자체가 우리 주위에 또 다른 ‘비스킷’이 존재한다는 것을 반증하는 듯해서 씁쓸했다.


 

1) 정현진, “[청년고립24시]10명 중 6명 ‘외롭다’… 관계단절·박탈감 호소”, <아시아경제> 2024.05.05 (https://v.daum.net/v/202405050630210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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