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은 석구에게 들었다. 석구는 식탁 건너편에 나를 앉혀놓고 자신의 핸드폰을 내밀었다. 거기 석구가 활동하는 정당의 당원 게시판에 장문의 글이 떠 있었다. 고발글이었고 고발 대상은 석구였다. 성폭력 가해자이자 스토커 현석구 당원을 고발합니다. 고발자는 석구와 같은 위원회에서 활동하는 여성이었다. 석구를 통해 이런저런 인상을 전해 들은 사람이었고 실제로 몇 번 스치듯 만난 적도 있었다. 고발글에 의하면 석구는 지난 1년간 그 여성을 스토킹했다. 늦은 밤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불쑥 튀어나와 사랑을 고백했으며 거절하는 여성의 몸을 강제로 끌어안았다. 이런 행위가 여러 차례 반복되었고 참다 못한 여성이 경찰에 신고했지만 별 소용은 없다. 같은 신념을 품고 활동하는 당원끼리의 우정으로 1년간 석구의 행위를 참아줬지만 이제 더는 그럴 수 없다는 판단이 들어 폭로와 고발이라는 방편을 선택했다. 여성은 형사처벌 대신 석구의 접근금지와 당원 제명을 요구했다. [pp. 63~64]
오십 대의 ‘나’는 이십 년을 부부로 살아왔던 남편 ‘석구’가 지난 1년간, 함께 정당 활동을 하던 여성을 스토킹했을 뿐 아니라 성추행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누군가를 스토킹했다는 것도 범죄인데, 더 최악인 것은 석구가 자신의 행동이 진심이었기에 부끄럽지 않다고 말한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는 그런 행동을 하고도 아내를 사랑하지 않아서 미안하지 않는다고 뻔뻔하게 대꾸한다.
자신의 욕망을, 아니 동물적인 욕정을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도 우습고, 이십 년간 부부로 살아왔던 상대방에 대한 존중이 없다는 것도 황당하다.
석구가 떠나는 날, 나는 현관에서 신발을 신느라 허리를 숙인 석구의 뒷모습을 향해 소심하게 물었다.
너는 나한테 미안하지도 않니?
석구는 굽혔던 허리를 천천히 펴고 내 쪽을 물끄러미 보았다.
널 사랑하지 않아서 미안해, 라는 말은 성립하지 않아. [p. 65]
부부가 운영하던 학원은 부원장이던 석구의 성추행 사실이 알려지면서 끝내 문을 닫아야 했고, 석구가 떠나가는 것을 말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석구와 각별했던 딸 ‘해준’과도 멀어졌다. 가장 가깝고 믿을 수 있어야 할 사람들이 등을 돌리면서 그녀는 점차 폐인이 되어갔다. 피폐해진 삶을 추스르고 한숨을 돌리기 위해 방문한 정신과에서 그녀는 일기 쓰기를 비롯한 다양한 치료법을 들었다.
약물치료는 급한 불을 꺼주겠지만, 약이 환자분의 불안과 공포를 깨끗이 몰아내지는 않아요. 첫 진료일에 의사는 말했다. 상담치료나 행동치료를 병행하는 것도 고려해 볼 수 있고, 지금처럼 걷기나 운동에 몰두하는 것도 좋아요. 또 일기를 쓰는 방법도 있습니다.
~ 중략 ~
일기를 쓴다는 것은 약간의 거리를 두고 자신의 삶을 보는 방법입니다. 자신과의 거리가 0일 때 우리는 그것을 문제적이라고 합니다. 의사의 말을 빌리자면 나는 자신과의 거리가 0을 지나 음수에 수렴하는 중이었다.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혀서 외부의 모든 자극을 차단하고 내면의 동굴로 걸어 들어간 패배자였다. [p. 15]
이십 대부터 삼십 대에 걸쳐 쓴 수십 권의 일기를 마흔이 되던 해 파쇄했던 기억 때문일까? 의사의 말에 반신반의(半信半疑)하며 인터넷에 ‘일기 쓰기’를 검색하다가 나는 연희 방글 스튜디오에서 운영하는 ‘일기쓰기교실’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 교실을 홍보하는
“당신의 삶을 써보세요. 쓰면 만나고 만나면 비로소 헤어질 수 있습니다.” [p. 16]
라는 말에 끌렸다. 막상 ‘일기쓰기교실’에 등록해서 일기를 쓰려고 하니, 한 줄도 쓸 수 없었다. 어쩌면 아직 나는 ‘나’를 직면할 용기가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떻게든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시옷’이라는 이름의 화자(話者)를 대신 내세웠다. 1인칭을 3인칭으로 바꾸는 것만으로도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던 ‘나’의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 있었다.
짧은 머리에 티셔츠와 바지 차림만 고집하며 ‘남자애’인 척하던 시옷은 열 살이 되던 해 그녀의 가장(假裝)이 들통나면서 난감한 처지에 빠진다. 불행은 혼자 오지 않는다고, 여기에 아빠가 부도를 내고 사라져 갑자기 가난을 체험하게 되었다. 일기를 쓰며 나는 고단하고 슬프고 외로웠던 1980년의 ‘나’를 떠올린다.
물론 일기에는 ‘나’의 이야기만 담긴 것이 아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므로 일기를 쓰면서 까맣게 잊고 지냈던 이들의 이야기도 떠올랐다. 늘 ‘공주’처럼 빼 입고 다녀 시옷을 동경과 질투로 뒤척이게 했던 옆집 친구 ‘민애니’, 슬픔과 두려움을 함께 나누는 법을 알려준 소중한 친구 ‘정윤수’와 그의 누나 ‘윤심 언니’ 등. 어느새 일기는 시옷 혼자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한때 시옷에게 짙은 흔적을 남기고 스쳐간 그들과 함께 쓰는 이야기가 되었다.
당신의 삶을 써보세요. 쓰면 만나고 만나면 비로소 헤어질 수 있습니다.
홈페이지에서 본 강의 소개 문구였다.
무엇과 헤어질 수 있다는 말인가요?
도치가 물었다.
내가 기록한 나와. 내가 기록 속에 가두어놓은 나와. 여전히 과거의 기억 속에서 헤매는 나와.
림자는 신들린 듯 대답을 쏟아내고 잠시 입을 다물었다. 왠지 양팔에 소름이 돋았다.
헤어지고 싶은 기억이 있다면 기록하세요. 어떤 수치심도 글로 옮기면 견딜 만해집니다. [pp. 22~23]
어쩌면 일기 쓰기는 잊고 싶은 과거의 기억을 기록함으로써 봉인(封印)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자신이 눈앞에 닥친 상황을 헤쳐가기 위해 했던 수많은 선택들을 복기(復棋)하며, 그러한 과정을 거쳐 내가 한 걸음 나아갔음을 깨닫는 행위가 아닐까? 그래서 강사인 림자가 그들의 일기를 활자화한, 과거를 향한 복수(復讐)이자 여럿의 목소리가 겹겹이 이어졌다는 의미의 복수(複數)라는 중의적인 의미를 가진 <복수의 자서전>이라는 책자를 수강생에게 나눠줌으로써 일기쓰기 강좌를 마무리한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그때의 엄마보다 더 나이가 들어보니 알겠다. 처음부터 완성된 사람은 없다고. 할머니도 엄마도 아빠도 갈팡질팡 우왕좌왕하다가 그 순간 자신이 할 수 있는 선택을 했을 뿐이라고. 겉보기와 달리 속은 무척 시끄러웠을 거라고. 여러 번 무너지고 또 무너졌을 거라고. 그래도 매 순간 끊임없이 선택하면서 그렇게 한발 한발 앞으로 걸어갔을 거라고. 사는 게 원래 그렇다고. 이제야 겨우 알겠다. [p. 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