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세계로의 초대
김영미 2000/08/31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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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많은 세상에 던진다'. 올 가을에 열릴 어느 시민단체의 문화공연 제목이다. 너무도 많은 말들이 떠다니고 있어 혼란스러운 세상을 빗댄 말인 것이리라. 세상에 너무도 많은 말들이 떠다니고 있어 이 말이 저 말 같고, 어느 것이 옳은 말인지 그른 말인지 도무지 분간이 되질 않는다. 그러나 진정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는 말은 갈수록 적어진다. 매일 홍수처럼 쏟아지는 정보에 정신이 나갈 지경이다. 그 속에 우리의 존재가 묻혀버리고 작아지는 느낌을 지워버릴 수 없다.
말은 많이 쏟아지는데 귀 기울여 듣는 이는 별로 없다. 귀 기울여 들을 말도 그다지 많은 것 같지 않다. 듣는 이가 없어도 서로들 아우성친다. 대답을 기대하지 않으면서 그저 말한다. 지껄인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에게 쌓여있는 말들을 털어버리기를, 쏟아버리기를 기다릴 뿐이다(177쪽).
그것이 과연 말일까? <침묵의 세계>의 저자인 막스 피카르트는 그것을 잡음어라고 한다. 사이비 말인 것이다. 언어는 성스러운 침묵에 기초하는데 그 침묵을 잃어버렸기에 공허한 사이비 말이 활개를 치는 것이다.
이 책 <침묵의 세계>는 침묵 속에서 나온 인간이 침묵의 세계를 어떻게 사유하고 경험해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시간, 사물, 형상, 사랑, 조형예술, 역사, 말 등 이 모든 것들이 침묵에서 배태되고 무르익지 않을 때 우리의 존재는 오간 데 없고 공허한 지껄임만 떠돌게 되는 것이다. 이 책의 장르를 굳이 말하라고 한다면 산문집에 가깝다. 철학적 사유가 짙게 깃든 침묵에 관한 명상집이라 할 수 있다. 시적인 감성을 갖고 읽어야 하는 명상집이다.
침묵은 목적지에 빨리 도달하기 위해 달리는 고속도로가 아니다. 이리 구불 저리 구불, 울퉁불퉁 포장된 국도를 달리며 길가에 피어 있는 이름 모를 풀, 꽃들을 바라보며 여행하는 것과 같다. 뜨겁게 내리 쬐는 태양이 지고 어스름히 저녁이 내릴 때, 그 어떤 근원적인 순간에 젖어드는 것과 같은 것이다. 침묵은 인간의 근본구조에 속하는 것(15쪽)이기 때문이다.
책은 서서히 발견된다고 한다. 속도의 시대, 무한질주의 시대에 그 동안 먼지 더미에 묻혀있던 이 책이 새롭게 발견돼 서서히 많은 사람들이 찾게되다니 참으로 다행이다. 저자는 침묵이 사라진 시대를 한탄했지만 인간은 침묵의 세계에서 나왔기에 그 근본구조를 잊지 않고 있는가보다.
이 책은 단숨에 읽어내려 내 지식의 창고를 넓히는 책이 아니다. 사회적으로 주목받는 문제를 다루기에 술안주 삼을 요량으로 어쩔수 없이 읽어줘야 하는 그런 책은 더욱 아니다. 나희덕 시인의 말처럼 썩지 않는 빵을 먹듯이 조금씩 뜯어 먹어야 하는 책인 것이다.
세상 만물이 다 때가 있듯이 책도 때가 있다. 책도 나에게 맞을 때가 있는 것이다. 말은 많이 하는것 같은데 마음 한 구퉁이가 늘 허전할 때, 존재를 잃어버리고 겹겹이 허울 속에 쌓여 숨쉬는 것조차 힘들어하는 나를 발견하게 될 때, 불꽃처럼 살아왔지만 다 태워버려 내가 없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그 때가 바로 <침묵의 세계>에 초대될 때인 것이다.
태양 아래 모든 것들을 뜨겁게 달구던 여름이 가고 겨드랑이에 슬그머니 기어드는 바람이 달게 느껴지는 계절에 '침묵의 세계'에 푹 젖어들어, 이 말 많은 세상에서 '나'의 존재를 발견하는 기쁨을 만끽하게 된다면 이 보다 더 좋을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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