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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1080j님의 서재
  • 모자
  • 토마스 베른하르트
  • 9,000원 (10%500)
  • 2020-05-08
  • : 1,195

베른하르트의 글을 읽는 것이 괴롭다면, 멀쩡히 잘 살고 있는 것이다. 처음 <모자>를 읽은 날 분노의 손글씨로 일기장에 적힌 이 문장은 '제발트의 글을 읽는 게 지루하게 느껴지면, 멀쩡히 잘 살고 있는 것이다.'라고 썼던 문장과 한 세트처럼 잘 어울리는 것 같다. 더 재밌는 건 제발트의 지루함도 베른하르트의 괴로움도 어떤 면에서 자꾸 독자를 중독되게 한다는 것이다. 베른하르트의 <모자> 속 문장들은 제멋대로 비약하고, 시제와 시점을 맘대로 여행하면서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화자의 머릿속을 직접 체험하게끔 만든다. 역할을 타자화하지 않고, 경험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베른하르트의 글은 말하자면 'VR' 같은 것이다. 


이번에 책을 다시 읽으면서 <인스브루크 상인 아들의 범죄>와 <오르틀러에서>가 기억에 남았는데, 좋아하는 작가의 예술가 소설을 읽는 것이 언제나 흥미로운 일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예비 취준생^^이라는 작금의 신분탓에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삶이 각박하고 우울할 때 행복한 글을 찾는 인간이 있는 한편 최고의 좌절을 찾아 탐닉하는 인간이 꼭 있지 않은가? 본인이 그런 인간이라면 베른하르트의 글을 꼭 읽어야한다.

"형무소 안이 즐거우리라고 생각한다면 틀린 생각이오! 세상은 유일한 법률이라오. 온 세상이 유일한 감옥이오. 그리고 오늘 저녁, 당신에게 확언컨대, 저 극장에서는, 당신이 믿건 말건, 희극이 상연되고 있소. 분명 희극이오."- P49
이 모자를 내가 가지면 도둑질이 되고, 땅바닥에 그대로 두는 것은 비겁한 짓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 모자를 내 머리에 쓰면 안 된다! 나는 이 모자를 잃어버린 사람을 찾아내야 한다고 나 자신에게 말했다.- P32
그러나 나는 절망적인 삶을 산다는 게 우스꽝스러운 일이라는 것도 안다. 절망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깨닫는 것만도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절망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 자체가 우스꽝스럽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보면 사람들이 사용하는 모든 단어가 갑자기 우스꽝스러워진다...... 하지만 핵심에서 벗어나지 않겠다. 우스꽝스럽든 아니든 내 삶은 절망적이다. 야우레크 채석장에는 절망한 존재들만 있듯이, 절망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듯이.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삶과 마찬가지로 나의 삶도 야우레크 채석장의 상황에 맞게 무감각해지고 아무 욕구도 없어졌다...... 나는 절망하지만 절망해서는 안 된다고 자신에게 말한다. 원칙적으로, 근본적으로, 나는 늘 절망하고 있지만 절망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다가오는 저녁을 위해 늘 어떤 기분 전환이나 관심을 돌릴 만한 일을 준비한다- P60
우리의 타고난 슬픈 성격보다도 더 깊이 우리를 슬프게 만드는 쓰라림이 매일 새벽마다 무능하고 고뇌에 찬 우리의 머리를 짓눌러, 우리는 절망적이고 우울한 단 한 가지 추정만 할 수 있었다. 우리 내면의 모든 것, 우리에 관한 모든 것,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이, 우리가 무엇을 응시하고 숙고하든, 우리가 걸어가든 서 있든, 잠을 자며 무엇을 꿈꾸든, 그 무엇이든 간에 우리는, 게오르크와 마찬가지로 나도, 이미 가망 없음을 암시한다는 것이었다. 게오르크는 자주 며칠 동안 가장 불가능한 환상, 그의 표현에 의하면 더 높은 환상에 잠겨, 동시에 늘 절망에 빠져서 이리저리 걸어 다니는데 그 모습을 언제나 지켜봐야 하는 나까지 우울하게 만들었다.-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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