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은 지는 꽤 되었다. 리뷰를 쓰는 취지는 아니고, 방대한 소설을 한 권 읽었으니 흔적이라도 남겨야겠다는 요량일 뿐이다.
조너선 프랜즌을 처음 본 것은 <타임스>에서였다. 스티븐 킹 이후에
<타임스> 표지모델이 된 소설가는 이 저자가 처음이란다. 상업적으로도
상당히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방증이 아닐까 생각된다.
소설은 패티 버글런드라는 여주인공을 둘러싼 남편 월터와 그의 아들딸들, 그리고 그들의 단짝친구인 캐츠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미국 중산층 가족구성원들을 인물로 등장시키고 있는 셈이다. 3인칭 시점으로 일관하고 있지만, 상당 분량을 패티 버글런드의 수기(자서전)로 배치하고 있다. 그녀의 자서전도 3인칭이긴 하지만.(조너선 프랜즌의 창작 원칙이 한 일간신문에 소개되어 있는데
그는 특별한 형식적 고려가 아니라면 3인칭으로 소설을 쓸 것을 권장하고 있다. 작가가 생각하는 소설관을 생각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소설의 모티프는 미국 중산층의 중년 여자의 삶에 대한 권태와 이로 인한 삶의 중요한 위기 국면에 관한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이 권태와 위기는 어디에서 온 것이며, 현재 미국 중산층은 도대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진지한 취지에서 문학적 탐색을 시도한다. 그녀를 지금 이렇게 만든 건 무엇일까. 도대체 우리는 제대로 살고 있는 걸까. 그런 물음이 작가가 이 소설을 쓰게 한 동력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다.
우리말 번역으로는 730쪽에 달하는 중량감이 있는 작품인 점도 이채롭다.
미국 쪽에서도 이러한 본격문학이 잘 나오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러한 (지금은) 보기 드문 작가의 진지함 때문에 미국의 독자들이 열광하고 있는 건 아닐까. 미국도 본격소설들의 위상보다는 장르문학 쪽이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고 있을 것이다. <자유>의 이례적인 성취가 다른 소설들과 구별시켜 놓는다. 현대 미국소설 하면 형식적 실험을 전면에 내세운다거나(소위 포스트모던한 소설들) 상업적으로 어필할 만한 극적 전개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작가는 그런 것들보다는 톨스토이가 했던 성취를 재현하고 싶어 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야기 속에서 톨스토이의 소설<전쟁과 평화>가 인용되고 있기도 하다.)
미국 중산층 사람들의 정치적 지형도나 9.11 이후의 세계에 대한 복잡미묘한 태도 등이 직접적으로 이야기 속에서 대두되고 있는 점도, 작가가 이 소설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해보고 싶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오바마 이후 미국인들이 무엇을 반성하고 있는지, 부시가 그들에게어떤 지도자였는지도 작가는 은연중 에 말하고 싶었던 것도 같다.
현실에 대한 낭만적인 전망 또는 비관적인 전망도 쉽게 하지 않는 작가의 진지한 태도는 인상적이다. 당연하게도 소설의 존재 이유가 과거나 현재나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이 소설을 읽으면서 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