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너도 하늘말나리야]는 이금이 작가님의 책을 탐닉할 때 가장 먼저 읽었던 책이었다. 이번 <밤티출판사>의 개정판을 받고 <푸른책들 출판사>의 [너도 하늘말나리야]와 비교하며 읽는 재미가 있었다. 처음엔 스마트폰, SNS, 비니 등 요즘 아이들의 관심사와 관련된 부분만 수정이 되었으려니 생각했는데, 거의 모든 부분에 수정이 가해졌다고 할 만큼 전체적으로 바뀌었다. 초판인 1999년으로 보면 20년이 넘었고, 개정판인 2007년으로만 생각해도 15년이 된 이야기를 요즘 아이들 감성에 맞게 전반적으로 손 본 것이다. 인물 간의 대사, 최근 트렌드를 반영해 올해 출간되었다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만큼 작가님이 주인공 나이대의 아이들을 면밀히 관찰하고 지속적으로 교감했다는 얘기다. 내 아이들에게도 세대 차이를 느낀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나는, 이것이 바로 작가의 자세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너도 하늘말나리야]는 세 아이(미르, 소희, 바우)가 아픔을 겪어내는 각자의 방식에 대해 들려준다. 부모님의 이혼으로 엄마와 함께 시골 진료소로 내려온 미르는 자신이 아픈 만큼 엄마를 찌르고 싶어한다. 표정으로, 행동으로, 온몸으로 불만을 표출하고 때때로 터뜨렸다. 병으로 돌아가신 엄마를 그리워하며 입을 닫은 아이 바우는 미르와 정반대로 자기 안으로 꽁꽁 숨어버렸다. 바우가 세상에 표출하는 유일한 방식은 그림이었고, 엄마의 죽음과 아빠의 행동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속으로 삼키다가 마음이 열리는 속도에 맞춰 서서히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보통의 어른인 나의 눈에 가장 딱한 아이인 소희는 자신과의 소통을 통해 타인과 상황을 이해하고 성장해간다. 소희의 일기는 너무 성숙했다. 이미 완성형에 가까운 인성이 드러난 일기를 보며 난 장하다는 생각 보다는 안스러움이 앞섰다.
‘성장통을 극복하는 세 아이의 각기 다른 방식’을 보여주는 희망의 이야기라는 면에서 작가님이 어떻게 결론을 맺을까 궁금했고, 이금이 작가님은 역시나 희망이 깃든 해피엔딩으로 답해주었다.
바우는 하늘말나리를 두고 소희를 닮은 꽃이라고 했다.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꽃, 하늘말나리.
“다른 나리꽃들은 땅을 보면서 피는데 하늘말나리는 하늘을 보면서 피어” (p202)
어른의 시선에서 소희는 어른스럽고 대견한 아이였다. 바우의 눈에도 그렇게 비춰졌을 것이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고, 오히려 할머니와 친구들을 지켜봐 주는 아이. 땅을 보며 비관하지 않고 맑은 하늘을 보며 희망을 찾는 아이.
하지만 나는 소희를 보며 안타까웠다. 아픔을 내질러도 되는데. 괜찮을까? 곪지 않을까? 한편으로 미르와 바우의 방식이 그 나이대에 어울리는 자연스러운 방법이라고도 여겨졌다. 터뜨리고 할퀴며 상처를 덧내는 아이도 그 과정을 통해 더 단단한 딱지가 붙을 것이다. 숨어만 있는 아이도, 기다려주는 이가 있다면 언젠가는 어깨 펴고 동굴을 걸어 나올 것이다. 그 시기를 지나는 아이들에겐 그게 더 자연스러운 방식일 수 있다. 삐뚤어져 보이는 방법 또한 스스로를 사랑하게 되는 과정이다. 그런 마음이 들다보니 나는 바우의 정의가 불편했다.
[소희 = 하늘말나리 =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꽃]
가장 어른스러운 소희의 방식만을 수긍하는 듯한 마무리가 불편하게 느껴질 즈음, 이금이 작가님은 말했다.
“너희들도 하늘말나리야!”라고.
이 마지막 장면에서 나는 이금이 작가님의 의도를 내 맘대로 짐작하고는 아, 안심이 되었다. 미르도, 바우도, 그리고 자신의 방식으로 성장해 나가는 모든 아이들이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꽃, 하늘말나리다. 그것이 설령 어른들을 힘들게 하고 지치게 하는 방식이라고 하더라도. 이금이 작가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