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는 뉴스를 잘 보지 않는다. 대체적으로 8시 언저리에 설거지를 하면서 뉴스를 틀어놓는 습관을 들이자고 하지만 드라마나 예능을 틀어놓기 일쑤다. 그래서 종종 시대에 뒤떨어진 리액션(엉? 그런 일이 있었어?)을 하거나 토픽을 이해하지 못해 (그게 뭐야? 나 잘 몰라..) 분위기를 깨기도 한다.
그래서 더 잘 보인 것 같다. N번방 사건이 얼마나 빨리 끓어올랐다가 빨리 식어버렸는지.
3월부터 5~6월까지 반짝. 박사방 조주빈과 그 일당들이 잡히는 시기였다. 이슈들을 주워담아 기사같지도 않은 기사를 쏟아내는 언론들에 휩쓸려 N번방 사건이 알려졌고, 언론들이 흥미를 잃자 이 사건도 ‘쏙’ 들어간 듯 보였다. 관심있는 이슈에 대해 지속적으로 찾아보고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지 않는 한 N번방 사건은 마무리가 된 것 같았다. 고백하건대, 나도 그랬다.
불편하다는 이유로 외면하고 싶을 때는
하루에도 몇 시간씩 N번방을 지켜본 불과 단을 떠올리겠습니다.
묻히고 있는 N번방에 새로운 불꽃을 지펴줄 책.
있는 힘껏 구매하고 나누겠습니다
수신지(만화가) - 추천사 중에서
<우리가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를 다 읽고, 맨 앞장에 있는 추천사를 다시 보는데 수신지 만화가의 저 문장이 가슴에 콕 박혔다. N번방 사건은 여전히 진행 중인데, 묻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매사 소극적인 나에게도 ‘잘 해결되어 가고 있는’ 사건으로 여겨졌다. 나는 도대체 얼마나 무지하고 무관심했는가. 그리고 한때 전국적으로 들끓었던 불꽃이 왜 사그라드는 듯 보였을까?
시작은,
두 명의 개인이 사회를 얼마나 바꿀 수 있는가.
<우리가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는 두 개의 큰 축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축인 ‘2부 불과 단의 이야기’는 불과 단이라는 개인이 페미니스트가 되어가는 과정으로 읽혔다. 아니, 엄밀히 말해 페미니스트가 될 수밖에 없는 과정이라는 게 정확한 표현이겠다. 평범한 20대 여성이 겪어온 수많은 불편함들이 일기처럼 쓰인 글들에 고스란히 녹아있었다.
두 번째 축은 불과 단이 주도한 N번방 추적기였다. ‘1부 2019년 7월 그날의 기록’은 2020년 3월 N번방 사건이 전국적으로 이슈화되기 전 불꽃 추적단이 N번방에 잠입 취재하며 보고 듣고 실천한 것을 적어두었다. 이 과정에서 내 눈길을 잡았던 것은, 이들이 신고하고 대책을 세우려 노력했을 때 해외 Sns라는 이유로 잡을 수 없다고 단정했던 경찰의 반응과 ‘개인적으로 즐기는 것도 죄가 되냐’는 이들의 반응이었다.
이날 법사위 참석자 대부분은 ‘N번방 사건’과 ‘딥페이크’를 제대로 구분하지도 못했다. 어느 법사위 소속 국회의원은 “나 혼자 즐기는 것까지 처벌할 것이냐?” “생각하는 것까지 처벌할 수는 없지 않느냐?” “청원한다고 다 법 만듭니까?” 같은 발언을 했다.
P69
그들은 그 문제말고 사회가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문제가 무엇인지 재차 물었다. 방금 전까지 내내 설명했는데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네? 이게 당장 해결해야 할 정말 중요한 사회문제인데요?” 나는 재차 사건의 심각성에 대해 설명했다. 규모가 큰 공모전의 면접관이라면 어느 정도 인정받는 사람일 테니, 이 사건의 실태를 알리면 문제 해결에도 조금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이는 내 바람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이 사건을 사회의 문제라기보다는 개인의 문제로 보았던 것이다.
P127
개인적으로 즐기는 게 죄가 되냐고? 이 사건은 ‘개인적’인 사건이 아니지 않나. 사회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중대한 문제가 아니라고? 이것은 우리 사회에 오랫동안 고착된 여성에 대한 인식들이 만들어낸 국가적인 사건이다. 수천 명의 남성들이 강압적인 성착취를 통해 만들어진 영상물을 죄책감 없이 ‘즐기는’ 것이 개인적인 범죄로 볼 수 있는가. 이 사건은 결단코 ‘사회’가 책임져야 하는 문제다!
불과 단 두명의 개인이 사회를 얼마나 바꿔갈 수 있는지, 이 책을 읽어내려가며 그들의 의지와 옳은 판단, 주저없는 실천에 저절로 박수가 나왔다. 하지만 거기에 그쳐서는 안된다.
이것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다
개인만 애써야 하는 문제가 아니다
이제는 관점을 이렇게 바꿔야 할 때다.
한 사회가, 우리가 개인을 어떻게 구할 수 있는가?
몇 달간 켈리의 범행을 낱낱이 보아온 우리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고작 1년형이라니. 그야말로 솜방망이 처벌이 아닌가.
......대한민국에서 디지털 성범죄 처벌이 얼마나 미약한지 그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N번방은 이런 어처구니없는 판결을 먹고 자란 것이다.
P43
2020년 4월, 손정우의 인도 심사가 결정되자 그의 아버지는 청와대 국민청원 사이트에 ‘미국 송환은 가혹하다’는 내용의 청원을 올렸다. 7월 6일 한국 법원은 사법 주권을 지키고 국내 성착취물 소비자들을 원활하게 수사하려는 목적으로 ‘미국 송환을 불허’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한국 법원의 결정’으로 세계 최대의 아동 성착취물 사이트 운영자였던 손 씨는 2020년 7월 6일, 자유의 몸이 됐다.
P62
설문 최종 결과, 판결에 대한 불신과 시대 변화에 도태되는 사법부 및 양형기준에 대한 염려가 있었다. 판사들과 현 양형위원회가 디지털 성범죄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사법부의 다수가 중년 남성들로 구성된 것에 문제를 제기하는 의견도 있었으며 다양한 계층의 의견을 수합할 견제기구가 필요하다는 응답 또한 기억에 남는다. 불꽃과 리셋, 또 대한민국에 사는 수많은 여성들이 디지털 성범죄 양형 기준이 합당하게 세워질 수 있도록 열심히 발언하는 중이다.
P284
‘3부 함께 타오르다’에서는 이 사건이 이슈화된 이후 일들을 열거한다. 범죄자들은 잡혔고, 그들의 신상과 행태들로 떠들썩했던 몇 달이 지났다. 그 이후 무엇이 변했을까? 피해자들은 아직도 벌벌 떨고 있다. 피해자 지원도 충분하지 않을뿐더러 여전히 피해자 탓으로 돌리는 인식 때문에 그들은 힘들어하고 있다. 2020년 5월, 20대 국회에서 N번방 방지법이 통과했지만 (P273), 충분히 바뀌지 않았다. 법망이 촘촘하지 않기 때문에 언제든지 디지털 성착취가 일어날 수 있는 여지는 계속 존재한다. 성범죄를 미연에 방지하는 스토킹방지법이나 그루밍처벌법, 함정수사 법제화도 정비되어야 할 뿐 아니라 지금도 솜방망이 처벌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는 ‘아동 청소년 이용 성착취물 범죄’에 대한 양형기준도 합당하게 세워야 한다. ‘영구 영상 삭제’만이 진정 피해자들이 원하는 대책임을 안다면 효과적인 영상 삭제 시스템도 갖춰야 할 것이다.
이 책을 읽고 깨달은 것은 그 불꽃이 여전히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다시 훨훨 타올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뉴스도 잘 보지 않는 내가 뭐라도 할 수는 있을까? 고맙게도 불과 단은 이렇게 말해준다.
피해자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그의 삶을 피해 사실 하나로 재단하지 않고 개인의 삶 자체를 존중하는 태도다. 우리는 성범죄 피해자가 증언대에 나설 수 있도록 함께 할 것이다. 우리가 걷는 길에 여러분도 동행해주면 좋겠다. 온라인 공간에서 일어난 가해 형식이 낯설고 피해자와 가해자의 연령이 점점 어려지고 있는 만큼 디지털 성범죄의 양상을 공부할 필요가 있다.
P249
하지만 우리는 살아있다. 이 땅에서 살아남아, 외치고 있다.
각자의 자리에서 함께 연대하며 움직이는 이들이 있기에 내일을 그릴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써내려간 지난 1년간의 기록이
함께 공감하고 분노하는 여성들의 발자취로 이어지길 바란다.
P294
-해당도서는 출판사로부터 무료제공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