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급 스포일러, 개인적인 해석 주의
좀 된 이야기지만, 오르타나는 오크떼에게 궤멸되어 버렸고, 주인공에게 있어서 그나마 희망이었던 스승은 오크들에 의해 갈기갈기 흩어져 버렸습니다. 사람 목숨 참 허무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주인공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이세계에서 이세계로 넘나들며 그래도 처음 소환된 땅에 애착을 느껴 오르타나로 돌아오던 주인공 일행은 빈말로도 즐거운 여행이 아니었죠. 메리는... 주인공에게 있어서 시궁창과도 같았던 이세계 인생에서 그래도 빛과 같았던 메리는 인간이 아닌 무언가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때 오크에게 당했을 때 메리의 몸을 누군가가 차지해버렸습니다. 그래도 살아났으니 다행이라 여겼습니다. 주인공과 같이 했던 기억도 대부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근본적인 문제점을 덮어둔 채 이들은 여행을 계속했습니다. 그 끝을 맞이한 건 드워프 광산 마을을 지났을 때. 드워프 광산 마을을 궤멸 시킨(아마도) 포르간인지 뭔지 외팔이 애꾸눈이 부대를 이끌고 주인공 일행을 쫓아온 것입니다(아마도). 애꾸눈은 예전부터 주인공 일행과 인연이 있었죠. 나쁜 쪽으로요. 그 인연에서 도망친 주인공 일행을 없애기 위해 쫓아온 그에게 주인공 일행은 도륙되어 버렸죠. 본 작품은 꿈도 희망도 없습니다. 있던 게 가출한 게 아닌 원래부터 없었죠. 18권 말미에서 그 없던 꿈도 애꾸눈에게 흩어져 버렸습니다.
이번 19권에서는 세계 멸망을 그립니다. 메리는, 매리 몸 안에 있던 어떤 존재가 깨어나면서 주인공과 이별하게 되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세카이슈(세계종)가 범람하여 세상을 삼키기 시작합니다. 쿠자크와 세토라는 애꾸눈과 싸우다 유명을 달리했습니다. 겉멋에 살던 란타는 얼굴에 큰 흉터를 남기게 되었지만 살아남았습니다. 유메는 멀쩡합니다. 시호루는 어딘가로 가버렸습니다. 주인공은 한층 더 음침한 넘이 되어 버렸습니다. 주인공은 왜 메리를 끝까지 지키지 못했을까. 꿈도 희망도 없는 세계에서 둘만큼은 꿈이 피어났었고, 희망을 간직하게 되었었는데, 메리는 더 이상 메리가 아니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때 오크에게 당하고 되살아 났을 때부터 아니긴 했지만. 세상은 멸망을 노래하기 시작합니다. 세카이슈는 유명한 인물이든 아니든 평등하게 죽음을 내리기 시작합니다. 간신히 살아남아 오르타나로 향하는 주인공은 메리를 놓아 버린 것에 후회의 마음뿐이고, 좋은 일 하나 없는 지금의 시간에 자포자기 심정이 되어 갑니다. 란타는 여전히 겉멋에 떠들고 유메는 4차원 대사만 늘어놓습니다. 그나마 이 둘이 있어서 분위기는 밝습니다. 하지만 미래는 그리 밝지 않습니다. 어딜 가든 세카이슈 투성이고, 한 발 잘못 디디면 말미잘에 붙잡힌 물고기 꼴이 되어 버릴 것입니다.
맺으며: 세카이슈란 무엇인가, 세계를 정화 시키는 장치인가? 꿈도 희망도 없는 세상 따위 다 리셋 시켜주마 하고 나타난 건가? 그야 평등하게 모든 생물을 집어삼키고 있으니까. 그런 느낌의 19권입니다. 주인공 일행의 이야기는 많진 않고, 오르타나에서 그동안 만났던 사람들이 세카이슈에 대항하며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발버둥 치는 이야기를 참 시리어스하게 풀어 놓고 있습니다. 살기 위해 힘을 합치지만 되는 게 없는 현실을 보여주죠. 세카이슈는 홍수와 같은, 끈적한 타르 같은, 의지가 있는지 없는지 분간도 힘든 무언가입니다. 그 무언가가 선사하는 미지의 공포? 그런 이야기입니다. 아무튼 사실 필자는 주인공이 메리를 찾아가서 어떻게든 현 상황을 개선하지 않을까 기대를 했었습니다만, 가령 메리를 되찾아 온다든지? 이런 전개는 너무 클리셰적인가. 꿈도 희망도 없는 작품에서 너무 많은 것을 바라서는 안 되겠죠. 메리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니게 되었으니까요. 그래서 작가는 새로운 히로인을 투입하면서 또 다른 희망을 찾습니다. 이러면 아주 골 때리게 되는데, 쿠자크와 세토라의 일도 있고. 이들의 인연이 계속되는 20권이 상당히 기대되는 19권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