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습 스포일러, 개인적인 해석 주의
근미래 일본, 근해(海) 어느 섬에 생겨난 던전을 일본인들은 현대 던전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로부터 몇 년, 많은 사람들이 탐색자가 되어 도전했고 주인공도 어느덧 상급 탐색자가 되어 있었죠. 그리고 오늘이 제삿날입니다. 욕심을 부린 건지 궁지에 몰렸고 어찌어찌 동료들을 탈출 시킨 건 좋으나 정작 본인은 배에 바람구멍이 나버렸습니다. 그리고 이세계행. 눈 떠보니 노예입니다. 노예도 그냥 노예가 아니라 총알받이, 고기 방패에 쓰일 미끼 노예였죠. 주인공으로서는 억울한 게 빚을 지거나 범죄를 저질러 노예로 전락한 게 아닌 길 가다 납치되었다는 것. 누구에게? 모험가들에게. 이세계 모험가들은 쓰레기입니다. 작가가 어찌나 리얼하게 표현 해놨는지 그동안의 모험가 이미지를 단숨에 박살 내버리죠. 사회 낙오자, 부적응자들이나 하는 직업이라는 이미지가 강합니다. 여느 작품에서도 이런 이미지를 보여주지만 상식인 이미지가 대부분이었는데 본 작품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거침이 없습니다. 이세계를 떠받치고 있는 어느 탑 공략에 카나리아라고 불리는 미끼 노예들을 풀어 몹들을 끌어들이고 먹이로 던져 주의를 분산시켜 공략하는 더러운 놈들이죠. 노예들이 받는 대우도 좋을 리 없고요. 주인공도 카나리아가 되어 고기 방패 직전에 놓였고 여기가 그의 인생 분기점이 됩니다.
여기서 궁금한 점, 주인공은 강한 가? 실력으로 강하다기보다는 운빨에 강합니다. 본 작품에서는 주인공보다 강한 존재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1권 메인 히로인인 '드라코'죠. 드라코는 이명 같은 것으로 주인공이 나중에 붙여주게 됩니다. 이세계에서는 절대 힘의 상징인 용(龍)이 있고 드라코는 용으로서 그 정점에 있습니다. 오래오래 살며, 그로 인해 삶이 무료하여 심심함에 미쳐있죠. 마침 주인공이 카나리아가 되어 고기 방패에 몰려 있는 현장에 옵저버로 참가합니다. 당연히 주인공을 구해줄리 없고요. 오히려 흥을 돋우기 위해 주인공이 마음에 들어 하는 노예랑 1:1 맞짱 떠서 이기는 놈을 살려 주겠다고 합니다. 드라코는 인간의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생물의 정점에 있어서 그런지 오만방자하고 사고방식도 마왕에 가깝습니다. 거슬리면 그게 누가 되었든 태워 죽입니다. 사실 주인공도 제대로 된 성격이 아닙니다. 지구 현대 던전에서 던전에 침식되어 뇌가 망가져 있죠. 어릴 때부터 고아로 성장하며 괴롭힘을 당해 왔고, 유일한 벗이었던 유기견은 중딩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등 그의 인생은 파란만장했죠. 인간의 감정에 어딘가 결점이 생겨 있습니다. 이런 성격과 저런 성격(드라코)이 만났습니다. 그러나 드라코는 너무나 강했죠. 여기서 주인공 운빨이 시험당합니다.
뭐 주인공이 이기겠지. 사실 그렇습니다. 이기지만 이후에 재미난 상황이 벌어지죠. 재미난 상황이래봐야 오만방자한 히로인이 주인공에게 홀딱 반하는 거겠지. 다들 미래를 내다보는 초능력이 있으시군요. 어찌 보면 클리셰이긴 한데, 사실 본 작품의 본질은 인간성에 있습니다. 다들 어딘가 망가져 있죠. 주인공 또한 자기 욕망대로 살아갑니다. 그 욕망이 이끄는 대로 드라코의 심기를 건드리고, 절대적인 힘에 굴복할 거 같으면서도 욕망으로 사태를 헤쳐 나가죠. 그의 욕망은 햇빛이 잘 드는 호숫가에 집을 짓는 것입니다. 뚱딴지같지만, 그에겐 이런 날이 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망가져 있거든요. 본 작품은 여러 인간들을 출연 시키며 인간성이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묻습니다. 망가진 주인공이 평범한 삶을 살 수 있을까. 주인공이 현실 지구에 있을 때, 고아원에서 받은 부조리들, 그의 유일한 벗이자 여행길 동반자가 될 예정이었던 유기견을 죽인 중딩들, 주인공은 어릴 때부터 인간들에게서 무엇을 보고 배웠을까. 망가진 사람에겐 망가진 마음으로 대하는 주인공. 그리고 그에게 있어서 드라코는 어떤 존재일까. 그녀가 모든 것을 준다 하는데도 거절하는 주인공.
맺으며: 한없이 타락하고, 타락해가는 세상에서 망가진 뇌와 마음으로 그래도 벗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을 찾아 떠나는 이야기. 주인공에게 있어서 벗이란. 무엇을 희생하더라도 지켜야 하는 것. 어릴 적 유일한 벗을 잃은 주인공은 그 처절함을 배워야 했고, 두 번 다시 잃지 않으려 사선을 넘나드는 찰나를 경험하고 모든 것을 준다는 히로인(드라코)을 뒤로하고 여행을 떠나는 장면은 꽤 긴 여운을 남겨 주었습니다. 다만 이세계 1호 벗이라 불리는 인물이 좀 그래서 감동을 말아 먹는 게 흠. 방대한 인물도와 세계관은 많은 복선을 낳았고 그로 인해 회수하려면 고생 꽤나 하겠네? 했더니 작가는 잠수 타는 걸로 해결했군요. 주인공은 모르는데 주인공을 아는 미래인? 장면은 자기들만의 리그를 그려대서 이야기를 따라가지를 못 했습니다. 주인공은 이세계에 와서 현실 파악이 엄청 느리고, 이야기를 좀 질질 끄는 면이 있었군요. 하지만 냉혈녀 드라코가 사랑을 알아가며 성격이 바뀌어 가는 장면들은 귀여웠습니다. 문제는 일러스트가 따라 기지 못한다는 거고. 정발 기준 1권 발매되고 1년이나 지나서 2권은 요원하기만 한데, 사실 1권으로도 충분한 여운과 엔딩을 느낄 수 있어서 2권은 필요 없어 보이긴 했습니다. 아무튼 모험가들이 보여 주었던, 인간이 어디까지 추악해질 수 있나를 잘 보여주었지 않나 싶습니다. 드라코는 너무 클리셰적인 내용이라 감동은 별로 없었지만 인간의 마음을 알아가며 주인공을 받아들이려 노력하고, 주인공 또한 악감정을 지우고 그녀를 받아들이려 하는 장면은 상당히 인상적이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