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급 스포일러, 개인적인 해석 주의
올해 13세가 되는 '미샤(이하 여주)'는 숲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엄마와 단둘이 생활 중이죠. 아빠는 한 달에 한 번 방문해서 며칠 머물다 떠납니다. 아빠의 제정 지원으로 궁핍한 삶은 살지 않습니다. 엄마는 뛰어난 약학으로 고도의 의술을 펼칠 줄 아는 숲의 백성이라 불리는 일족 출신입니다. 엄마는 매일 같이 약을 만들어 남편에게 몽땅 줘버리는 일을 반복 중이죠. 그래서 처음엔 남편에게 버려질까 봐 맹목적이 되어 가는 느낌도 없잖아 있습니다만. 엄마가 원해서 숲으로 들어와 살고, 약학으로 약을 만들어 내다 팔아도 배는 굶지 않기에 굳이 남편에게 기댈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머나먼 땅에서 남편 따라 아는 이 하나 없는 곳에 왔으니 의존증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을 것입니다. 약간 분리 불안 증세도 보이죠. 딸(여주)에게는 자신이 가진 약학 대부분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많이 다쳤다는 비보가 날아듭니다. 그리고 이 모녀와 아빠의 관계, 아빠의 집안 사정이 밝혀지죠. 엄마가 어떻게 남편을 만나게 되었는지, 그들이 어떤 사랑을 키웠는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습니다. 본 작품의 메인 주연은 여주(미샤)니까요. 이제부터는 여주의 시각으로 진행이 됩니다. 아빠는 전쟁에 나섰다가 크게 다쳤습니다. 오늘내일하는 중이었죠. 엄마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간신히 목숨은 건지게 되었으나 여주에게 시련은 지금부터입니다. 아빠는 공작가의 가주로서 본처가 있었습니다. 이복남매도 있고요.
귀족이 첩을 들이는 건 자연스러운 거라서 엄마도 이 사실을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본처의 성깔이었죠. 그 성깔을 이어받은 이복 남매도 본처에 뒤지지 않는 성깔을 보여줍니다. 여주는 완전 콩쥐가 되었죠. 자신의 아빠를 살리러 왔고, 살려 주었는데 고맙다는 말보다 어서 빨리 숲으로 꺼지라고 합니다. 아빠가 잘못되면 처형해버리겠답니다. 본처는 세상이 자기중심으로 돌아가야 하고 그게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시샘의 대상인 여주의 엄마를 받아들일 리 없었고, 결국 다리를 분질러 버리는 만행을 저지르고 숲으로 쫓아내 버렸습니다. 사실 처음엔 엄마와 단둘이 숲에서 사는 여주의 이야기라는 파스텔 동화 같은 이야기인가 했습니다. 표지도 딱 그렇잖아요. 주변 마을을 돌며 약으로 사람을 치료하고, 매일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약사의 혼잣말의 여주 마오마오처럼 약에 미처 사는 그런 이야기인 줄 알았습니다. 근데 콩쥐팥쥐 이야기로 넘어가버리는 바람에 적응을 못 했습니다. 남편을 살려준 건 안중에도 없고 어서 빨리 여주와 엄마를 숲으로 쫓아낼 궁리만 하는 본처. 남편 살리느라 자신의 피까지 뽑았던 엄마. 이러고 있으니 처음 남편 만났던 일들이 떠오릅니다. 첫눈에 반했고, 길을 떠나며 데리러 오겠다는 약속을 지킨 남편. 그런 남편을 믿고 머나먼 이국까지 따라온 엄마. 그리고 현재 남편을 돌보느라 제대로 먹지도 못했고, 뽑은 피 때문에 빈혈까지 찾아온 여주의 엄마를 역겨워 하며 계단에서 밀어버리는 여주의 이복 언니.
본 작품은 잔혹동화입니다. 상당한 충격을 안겨 주죠. 여주는 졸지에 엄마를 잃었습니다. 이게 머선 일이고? 읽다가 두 눈을 의심했다니까요. 그러나 놀라기에는 아직 이릅니다. 본처의 충격적인 행보가 시작되죠. 아무리 평민(여주 엄마)이라지만 자기 딸이 사람을 죽였는데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되레 딸이 상처받아 풀이 죽었다고, 딸이 피해자라고 우깁니다. 눈꼴 시련 여자(여주의 엄마)가 없어졌다고 좋아합니다. 나아가 한술 더 떠서 여주를 이웃 나라 왕에게 첩으로 팔아버릴 계획까지 짭니다. 이거 인간 맞나? 근데 이 상황이 황당한 건 여주의 아빠죠. 사경을 헤매다 눈을 떠보니 사랑하던 여자(여주의 엄마)가 불귀의 객이 되었네. 그 범인이 자기 딸이네? 여주에게 코가 땅에 닿도록 빌어도 모자랄 판에 피해자 코스프레 중이고, 본처는 죄책감도 없이 여주를 팔아버리자네? 이게 대체 머선 일이냐고. 하늘이 무섭지도 않나?. 작가는 숲의 백성에 대해 서술하기 시작합니다. 숲의 백성을 괴롭힌 자에게는 썩어 문드러지는 저주가 내린다는걸. 이제 본처와 그 딸에게 저주가 내리는 걸까? 사실 제일 문제는 여주의 아빠죠. 여주의 엄마를 대려 왔을 때 한 성깔 내비치는 본처를 내치지 않은 우유부단함이 일을 이렇게까지 키웠으니까요. 사랑하는 여자 다리를 분질렀을 때도 그냥 넘어가고, 여주가 팔려 가는 걸 끝끝내 막지 못하는 발암 역할도 해주십니다. 그래서 작가는 여주의 아빠도 원죄가 있으니 본처의 목을 치지 않는 건가?
맺으며: 여주의 엄마 사망 사건은 사실 스포일러이긴 합니다만, 이후 여주의 행보에서 더 이상 엄마는 없고, 엄마와 떨어지고 싶어 하지 않아 했던 여주가 여행길에 오른 연유에 대해 언급하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하지만 e북 기준 580페이지나 되는 방대한 분량 중에 엄마의 사망은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을 만큼 다른 이야기들도 많습니다. 이웃 나라까지 가는 여행길에서 여러 사건과 사람들을 만나며 성장해가는 이야기를 보이죠. 동족이자 엄마의 소꿉친구도 만나기도 하고, 처음 본 바다가 신기하고, 친구들도 사귀는 등 소소한 일상생활도 나쁘지 않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사건이 일어나고 해결하는 등 어째 코난급 재난이 시작되는 그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아쉬운 점은 어서 빨리 기운차리고 밝은 모습을 보여주는 게 낫다고는 하지만, 그 사건으로부터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여행하며 산해진미를 즐기고 가고 싶은 곳에 다 가보는 들뜬 마음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엄마에 대해선 방금 생각났다는 식으로 짤막하게 언급될 뿐. 아빠는 완전히 잊혔고. 엄마와 살던 숲의 집을 더 걱정하는 장면은 어이가 없었군요. 작가의 필력은 중상급 정도? 약초에 대해 그렇게 빠삭하게 아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건성으로 집필하지 않았다는 느낌을 들게 해주죠. 다만 여주에 대해선 조금 여유를 주고 행동하게 하면 어떨까 싶었습니다. 13살이면 아직 어린 애인데, 하는 행동은 어른이고. 그러다 보니 개그 같은 어깨에 힘 빼는 이야기가 부족한? 조금 더 아이 같은 면모를 보여주었으면 힐링물로도 손색이 없었을 텐데... 초반 잔혹 동화를 보여준 건 어쩌면 여주로 하여금 어서 빨리 어른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싶긴 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