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급 스포일러, 개인적인 해석 주의
주식으로 억만장자가 된 15세 소녀, 12살에 학교 가길 포기하고 히키코모리가 된 소녀, 취미는 게임, 하던 온라인 게임이 업데이트하여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접속했더니 뭔 설문 조사에 응하라네. 응했더니 이세계로 전이. 누군 트럭에 치여 고통스럽게 가는데 이 소녀는 날로 먹습니다. 뭐 그렇다고 그녀가 원해서 간 건 아니고, 이때까지 이세계 전생물이 그랬던 것처럼 이세계 전생이든 전이든 주인공이 원한다고 갈 수 있는 동네는 아니니까요. 물론 선택받았다고 좋아할 일도 아니죠. 그래도 이왕 왔으니 최선을 다해 살아 보겠습니다. 여주인공 '유나(이하 여주)'는 업데이트 특전으로 곰 세트 장비를 받았습니다. 사춘기로 한창 예민할 나이에 이렇게 창피한 장비를 입고 살아가야 하다니 좌절할 만도 하지만 뭐 어떡하겠습니까. 맨몸은 일반인과 다름없는 쭉정이인걸요. 요컨대 곰 세트라는 장비빨로 살아가야 합니다. 실험 삼아 장비 해제하고 팔굽혀 펴기를 해봤는데 일반 소녀만큼의 근력밖에 나오지 않았죠.
전이후 숲에서 울프에게 포위되어 위기에 빠진 '피나'라는 소녀를 구해주고 그 소녀의 인도를 받아 마을로 가면서 이세계 생활이 시작됩니다. 여담이지만 이 피나라는 소녀가 여주 유나와는 대척점에 있는 관계라 할 수 있는데요. 여주는 현실에서 학교에도 안 가고(중학교에 진학 안 한 최하 초졸 혹은 초등 중퇴자), 친구도 없고, 방구석에 처박혀 게임과 주식만 하는 머리는 좋지만 인생 패배자 같은 인간이었다면, 피나는 아픈 엄마의 치료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숲에 약초를 구하러 가고, 엄마를 위한 치료비와 생활을 위한 생활비를 벌기 위해 매일 모험가 길드에서 마물 해체 등을 하며 소녀 가장 노릇을 하고 있었죠. 그녀 나이 10살, 7살짜리 여동생도 보살펴야 하며, 아버지는 어릴 때 돌아가셨다고. 참고로 피나의 마물 해체 능력은 마장동 정육점 사장들 보다(아마도, 비유적임, 태클은 안 받음) 능숙한 일면을 보여줍니다. 이후 피나는 여주와 행동을 같이하고 그녀가 떨어트리는 콩고물을 주우면서 생활을 이어갑니다.
이후 생활은 여느 이세계물과 비슷하게 흘러갑니다. 마물을 쓰러트리며 레벨 업과 능력을 얻고, 길드에서 양아치들의 시비에 휘말리죠. 모험가 등록을 하고, 장비빨로 무쌍을 찍으며 고속 성장하는, 이세계 주민으로서는 이런 불합리도 없을 거라는 치트를 받아 갑니다. 즉 이 작품은 그냥 가볍게 읽는 용도로만 이용해야지 뭔가 의미를 찾고 부여하는 작품은 아닌 것이죠. 물리 법칙 작용이 안 되는 마법 주머니라든가, 드래곤 볼의 캡슐처럼 집이 튀어나오고 기타 등등 포션빨의 여주 능력처럼 생각하는 것들이 실현되는 뭐 그런 걸 아무렇지 않게 보여줍니다. 그래도 애써 의미를 찾자면, 불쌍하다고 함부로 손을 내밀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일단 1권에서 서브 히로인인 소녀 가장 노릇을 하고 있는 피나의 경우, 도와준답시고 돈을 적선하는 것보다 마을 안내와 마물 해체라는 일거리를 주며 정당하게 돈을 벌게 한다는, 어떻게 보면 서로 윈윈 할 수 있는 설정은 있다는 것입니다. 뭐 여주 입장에서는 리얼한 해체쇼를 직접 안 해도 된다는 타산이 깔려 있긴 합니다만.
맺으며: 현대에서 도시 생활, 그것도 방구석에만 지낸 개미 한 마리도 못 죽여 봤을 여자애가 이세계로 전이하자마자 울프(늑대형 마물)을 아무렇지 않게 도륙하고, 능력을 파악하고 마법을 배운답시고 울프들을 학살해가는 비현실적인 장면들은 여지없이 이세계물의 한계를 보여주는 거 같았군요. 살아 있는 생물을 죽인다는 거부감은 아예 없습니다. 인간형인 고블린을 학살할 때도 그렇고요(사람은 인간형을 해칠 때 거부감이 가장 크다고 하죠). 위기에 빠져 생존 본능에 따른 살육이라는 개연성이라도 있으면 좋았겠지만, 이 작품 자체가 개그성이 강하고 가볍게 읽는 용도에 지나지 않다 보니 심각한 장면은 사실 이야기 진행에 방해되기도 하겠습니다만. 그러다 보니 피해자는 여주나 마을 사람들이 아니라 자연법칙으로 살아가는 울프류들이라는 아이러니를 보여주게 되죠. 그냥 숲에 모여 있었다는 이유로, 물가에서 물먹고 있었을 뿐인데, 여주에게 뒷치기 당해서 뼈와 살과 가죽이 분리되어 팔려가는 불합리란. 여주는 마을 근처에 있는 생물이란 생물은 모조리 씨를 말려버리죠. 이러니 다른 모험가들의 원성을 살 만도 하지만, 처음 시비 붙었던 모험가를 물리적으로 진짜로 곤죽으로 만들어 버린 여주에게 대항할 모험가는 없었습니다. 여주는 타협으로 사회를 원만하게 살아가는 것보다 내게 조금만 불합리가 있어도 못 참는 불같은 성격이죠. 그런 주제에 피나를 도와주는 상냥함도 있다는 영문 모를, 밤에 길 가다가 칼 맞에 맞으면 피나 같은 사람이 도와주는 그런 사람이 바로 여주라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