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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급 스포일러, 개인적인 해석 주의
사실 레진에서 발매될 때부터 보려고 했던 작품입니다만, 하도 사람들이 발암 환상기라고 해서, 발암을 싫어하는 필자는 멀리했던 작품이군요. 아닌 게 아니라 진짜 환상적인 발암의 연속을 보여줍니다. 근데 희한하게 눈살이 찌푸려진다거나 거부감이 드는 발암이 아닌 대놓고 발암짓을 해대니까 오히려 시원한 느낌? 주인공이 슬럼가에서 누명을 쓰고 왕궁으로 소환되는 과정, 그 과정에서 이유 없이 볼따구니를 연속으로 맞아야 하는 부조리, 납치된 왕녀 찾아 줬는데, 왜 납치범으로 오해해서 두들겨 팰까? 주인공이 슬럼가에서 사는 천민이라서? 신용이 없기 때문에? 주인공 나이 고작 7살, 밥도 못 빌어먹어서 체격은 더 작을 터. 이런 애가 삼엄한 경비를 뚫고 왕녀를 납치했을 거라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 그냥 돈 몇 푼 지어주고 보내면 될 걸 굳이 왕궁으로 소환하는 바람에 납치범과 한패가 아니냐고 모진 고문 당하고. 하루아침에 부조리를 몇 개나 겪게 한 히로인은 사과도 없어. 어찌어찌 누명이 풀리지도 않은 애매한 상황에서 이번엔 왕이 딸을 구해준 보답을 해준다네? 야이~ 이병에게 갑자기 별 4개랑 독대하라면 할 수 있나? 여전히 다짜고짜 볼따구니 때린 히로인이나, 왕궁으로 소환한 히로인이나 미안해하는 구석은 전혀 없고, 주인공이 구해준 히로인은 멀뚱멀뚱? 여기는 지옥?
이 작품은 정령 환상기 보다 발암 환상기로 한차례 유행한 적이 있어서 아는 분들이 제법 있을 거라 생각하는군요. 주인공은 트럭과 버스 사고에 휘말려 이세계에 전생하게 되었죠. 동방에서 왔다는 부모에게 태어나 아빠는 일찍이 돌아가시고 엄마는 엄마를 노리는 무뢰배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그런 역사를 가진 아이가 죽을 위기에서 주인공의 인격이 각성한 방식의 이세계물입니다. 주인공(각성하기 전의)은 엄마를 죽인 무뢰배들에게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살아가고 있었으나 주인공으로 각성하게 되는 동시에 마침 왕녀 유괴 사건에 휘말려 세상으로 나오게 되었죠. 까지는 좋은데 행운 스탯치가 마이너스 수만은 되는지 온갖 고초를 겪게 됩니다. 납치된 왕녀를 찾아온 4인방 히로인 중 하나에게 볼따구니 두들겨 맞고, 어느 히로인은 왕궁으로 소환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게 하고, 왕은 딸을 구해준 보답이랍시고 마법 학원에 집어넣어 버리죠. 왕족만 다닌다는 학원에 평민 이하 천민을 집어넣는다는 의미. 이 멍멍이 같은 시추에이션은 무엇? 당연히 귀족 학생들은 달가울 리 없는 경지를 넘어 주인공을 아주 짓밟아 버리죠. 볼따구니 때린 히로인은 강 건너 불구경, 왕궁으로 소환한 히로인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구해준 왕녀는 언니(볼따구니 때린女)가 말 섞지 말라고 했다고 4년이나 방관.
그나마 4인방 중 상식인은 있었습니다. 학원 강사이기도 한 약관 12세 히로인. 얘도 뭔가 한 거 같은데 기억이 안 나네. 아무튼 학원에 입학한 주인공을 케어해주고 말동무해주며 주인공이 정신 붙잡는데 일조하게 되죠. 그리고 홀딱 반하는 건 덤. 주인공 때 빼고 광내니까 미남이네요. 역시 남자는 얼굴. 자상한 마음씨는 덤. 5년 동안 이 강사 히로인 덕분에 정신 붙잡으며 학원을 다닙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도 주인공을 얕잡아보고 괄시하고 욕하는 아이들. 사실 주인공이 왕의 명령으로 내려온 낙하산이긴 한데, 왕명으로 온 애를 이렇게 밟아도 되나? 싶지만 왕이나 히로인들이나 뒷일 감당은 주인공에게 다 떠넘겨 버리고 나 몰라라. 5년 동안 주인공을 왕궁으로 소환한 女는 끝끝내 코빼기를 보이지 않네. 나와서 사과하라고. 나, 마왕 될 자신 있답니다? 같은 상황이 벌어지는 일상 속에서도 저런 놈들이니까 그러려니 하는 주인공이 대인배. 엄마 죽인 놈을 찾아 복수를 해야 하는데, 언제 할 거지? 학원 다니며 힘 좀 키운 거 같던데. 하지만 이 생활도 곧 끝이군요. 애들에게 뭘 시키는 거냐는 생각을 들게 하는 군대식 천리행군(약간 각색)에서 드디어 아이들이 일을 터트려 버립니다. 아무리 온화한 주인공이라도 질색팔색할 일을요. 스포일러라 자세히는 말 못 하지만 이 나라에 미련은 없습니다.
맺으며: 호불호가 갈리겠지만, 이렇게 시원시원한 발암은 오히려 흥미를 마구 유발하는군요. 왜 더 일찍 접하지 않았을까 할 정도. 발암을 절묘하게 표현하는 작가의 능력이 좋습니다. 억지가 아닌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솜씨가 좋더군요. 엄마의 부조리한 죽음, 슬럼가에서 이용만 당하는 삶, 우연찮게 왕녀를 구출하였으나 선입견에 사로잡힌 히로인들에 의한 구타, 왕궁에서의 모진 고문, 지옥 같은 학원에서의 생활, 그럼에도 보답받지 못하는 인생. 4년이나 방관한 왕녀가 마지막에 너 님(주인공) 좋아해요라는 시추에이션은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까. 사실 슬럼가 소년이 비를 피할 수 있는 집(기숙사)과 굶어 죽을 일 없는 급식만으로도 보답받았다고 할 수는 있겠습니다만. 정신적으로 너무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되죠. 그런 걸 다 흘려버리는 대인배 기질을 가졌긴 한데, 돌려 말하면 되받아처주지 않으니까 카타르시스가 없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술술 읽힐 정도의 필력. 사실 이 작품은 귀족과 왕족이라는 악이 명확하게 그려져 있고 주인공은 그 악의를 받아도 어찌할 수 없는 나약한 소시민의 입장이라는 현실적인 측면도 없잖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렇게 당해도 언젠가 대갚음해 줄 거라는 밑 작업일 수도 있겠다는 느낌도 있었군요. 시작부터 먼치킨은 아니지만 점점 성장한다는 설정도 있고. 주인공을 알아주는 히로인들도 생기기 시작하면서 암울한 미래만 기다리는 건 아닌 느낌도 있습니다. 리뷰에선 미처 언급 못한 소꿉친구에 대한 복선이 언제 풀릴지 궁금하고, 그 외 복선에 몇 개 있어 보이던데 무리 없이 진행하는 솜씨가 괜찮은 1권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