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철학과 근본기분
서양철학은 이성으로 세상과 인간을 인식하고 탐구하는 것이 주요 과제였으나 하이데거는 여지껏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불안(anxiety)을 철학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과연 기분(stimmug)이 철학적 대상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여태껏 불안은 전통적으로 철학적 대상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불안이야 말로 삶을 올바르게 살 수 있게 만드는 삶의 지표로 간주한다.
이러한 근본기분이 엄습하는 것을 애써 무시한다면 비본래적인 삶 즉 올바르지 못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근본기분 중에 하나인 죽음에 대한 불안을 통해서 나의 삶이 유한한 인생임을 깨닫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즉 죽음에 대한 공포와 불안이 삶을 되돌아보게 해주고 현재 내가 그 유한한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지속적으로 생각하도록 자극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피해야 할 심리적 고통이 아닌 불안이 주는 존재의 이로움이라고 한다.
존재망각의 현실
자연과학의 발달로 인한 기술문명은 인간을 계량화하고 존재자들만의 특유의 가치를 상실하며 인간관계조차도 삭막해져간다. 이로인해 인간, 동물, 식물의 본래적 가치를 상실하게 되는데 고귀한 개별적 존재는 망각되고 인간마저도 니힐리즘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공허감은 문화상품으로 그 공백을 매우려 하지만 채워지지 못한다. 한 시대는 그 시대의 존재이해를 가지고 있어서 고대와 중세와 근대마다 특유의 존재이해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잘못된 현대의 존재이해를 변화 시켜야 하는데 그것은 인위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근본기분에 의해 사로잡힘으로서 이루어진다.
불안의 양면성과 기술문명의 문제
나는 이런 하이데거의 근본기분에 절반만 동의 할 수밖에 없다. 분명 근본기분은 지속적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 지를 알려주기는 한다. 하지만 죽음에 대한 불안은 삶에 조급함을 떠올리게 하고 본래적인 삶을 살려고 해도 시간에 쫓기는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하이데거에게는 이런 근본기분을 직면하지 못하고 도피하면 퇴락하는 삶을 살게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매사 불안함이 삶의 밑바닥에 흐르고 있다면 오히려 삶을 제대로 살아갈 수가 없다.
또한 과학기술문명이 모든 것을 계량화하기에 고유하고 고귀한 개체성을 상실해 간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러한 과학기술의 진보를 통해 얻어지는 문명의 발전으로 인간이 누리는 수 많은 풍요로움을 가볍게 볼 수는 없다. 여기서 하이데거의 과학기술문명에 대한 보수성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과학기술문명에 대한 하이데거의 비판은 가볍게 넘어갈 수 있는 것은 또 아니다. 모든 존재가 계량화로 환원된다는 것은 인간마저도 그 안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스스로 멈출 수 없는 기술문명의 진보는 광기에 사로잡혀 앞으로만 달려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 스스로 어찌할 수 없기에 더욱 위험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