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선언
-새로운 패러다임?
책은 여러 명의 저자가 공동집필한 책이다. 그런 까닭에 책 속에는 개인을 지칭하는 ‘나는’이라는 표현이 아닌 ‘우리’라는 표현이 종종 등장한다. 이들은 2017년부터 더 케어 컬렉티브라는 조직으로 함께 했다고 한다.(p192) 이번 책은 이들이 함께 돌봄이라는 주제 안에서 전인류가 마주하게 되는 다양한 측면의 문제의식들을 연구하고 논의하는 과정에서, 그 결과물로 이번 책이 완성되었다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책에 대한 전반적인 느낌을 적으려고했는데 그보다 먼저 언급하고 싶은 것이 있어 잠시 숨을 고른다. 책에 대한 느낌과 생각을 적어가는 글은 오로지 개인의 주관적인 사견에 의한 것임을 먼저 밝혀야 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고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적어도 이번 책에 대해서는 이 부분을 다시한번 적고 가야 마음이 편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모든 개인의 자유로운 사유에는 다소의 주관적 편견이 포함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타인을 향한 배타적 편견이 아닌 나를 향한 개선의 여지가 필요한 편견이어야 할 것이다.
책은 어렵다. 돌봄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는 책치고는 무척 어렵다. 그도 그럴것이 이 책은 오로지 돌봄과 돌봄 시스템에 대한 이야기만 언급하지 않는다. 책은 돌봄에 관련된 다양한 측면에(사회 경제 및 정치와 소외된 계급포함) 대해 분석적으로 접근한다. 그것이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 느꼈던 메리트였는지도 모른다.
책의 전체 내용 중 가장 앞부분에 실린 부분은 이들이 함께 생각을 모아 제창한 ‘서문’이었다. 서문은 전체 책 분량의 대략 1/5가량의 분량을 차지한다. 개인적으로 서문에 대한 느낌은 다소 격양된 분위기와 자극적이며 저돌적이다? 라는 몇 개의 단어적 표현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실제로 책 속에는 부유한 자와 소외된 자(이는 마치 사회주의 계급투쟁에서 유산자와 무산자와 즉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비교를 각인시키는 듯한 표현인 듯했다) 불공정, 불평등, 착취와 폄훼와 같은 표현들이 자주 반복되고 있다.
특히나 착취와 폄훼라는 표현의 잦은 반복이 내게 더 많은 생각을 안겨다 주었던 부분이기도 하다. 서문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혁명’이 생각났던 까닭은 그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더욱이 책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을 시작으로 우파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근저에 깔려 있음을 생각하게 되는 요소들을 곳곳에 배치한다. (좌파적 입장에서의 돌봄 정치에 더 긍정적인 모습을 보인다). 때문에 딴은 읽는 이의 명징하고 객관적인 사유의 과정이 개입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드는 게 사실이다. 물론 개인적인 판단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차치하고서 신자유주의에 대해 더 잘 알고 싶어 기록을 찾아보고, 도서관에 가서 책을 대출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쉽지는 않아보인다. 이 글은 아마도 여러번 수정을 하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농후하지 않을까 싶은 이유가 바로 이 안에 있다.
어쨌든 책의 서문은 그렇게 날선 분위기가 주를 이룬다. 그러나 뒷부분에 등장하는 내용은 조금은 유해졌다는 느낌을 받는다. 저자 아니 이들 단체의 이야기를 빌리자면 돌봄의 개념을 개인 혹인 가족 친족과 같은 한계성을 가진 범위로 한정 짓는 것이 바로 신자유주의 개념에서 나온 불합리한 개념이고, 이는 퇴출되어야 마땅한 잘못된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사회적 혹은 개인적 돌봄이 의미하는 범주를 확장 시켜야 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인간과 인간 즉 돌봄을 제공하는 이와, 제공받는 이들의 관계는 반드시 수평적이어야 할 것이며, 이러한 관계와 과정을 평가절하하지 않아야 할 것, 돌봄의 관계를 금전적인 노동의 금전적 대가로만 판단하는 시장경제 및 신자유주의 개념에서 탈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들은 새로운 돌봄의 페러다임을 위해 지역공동체와 국가와 국가 사이에도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한다. 물론 이 부분에서는 성적 소수자에 대한 입장도 포함되어 있다.
지역공동체와 국가의 돌봄과 관련해서는 서문과 본문에서 강조되고 있는 내용으로 ‘난잡한 돌봄’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퀴어와 관련된 의미에서 출발한 이 난잡한 돌봄의 의미는 한 곳에 국한된 돌봄이 아닌 공동체 안에서 안전을 확보하면서 케어 가능한 돌봄의 의미로 재해석된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여전히 그들이 주장하는 난잡함의 돌봄 개념은 표현 자체만으로 무리수로 다가오기도 하는 부분이다.
---“난잡함이란 더 많은 돌봄을 실천하고 또 현재 기준에서는 실험적이고 확장적인 방법으로 실천하는 것을 의미한다.”
“‘난잡하다’는 것은 또 ‘차별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고, 우리는 돌봄에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p82
각설하고 책은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해줄 많은 이들의 이론들과 사상 및 각국의 실례를 증거로 싣고 있어 독자들에게 객관적 혹은 일정부분 주관적인 가치판단을 유도한다. 노동의 대가 수단만으로 삼지 않으며 경제적 우위만을 따지지 않은 방법으로 접근해야, 이들이 주장하는 ‘신 유토피아적’ 돌봄 시스템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지 않을까.
돌봄의 범주를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회, 인간과 정치에 한하지 않고 더 나아가 동물과 대자연을 품은 지구환경에 이르기까지 확장시켜야 한다는 주장은 나름 설득력 있어보인다. 이들이 꿈꾸고 주창하는 ‘돌봄의 확장개념’은 말그대로 무한대로 넓으며 그 한계가 없어보인다.
책의 내용과 성격을 잘 대변해줄 것 같은 몇 개의 문장을 함께 싣는다.
“돌봄의 위기는 지난 40년 동안 특히 심각해졌는데, 이는 많은 나라가 수익 창출을 삶의 핵심 원리로 보편화하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원칙을 받아들이면서다.…(이하생략)” -p13
“보편적 돌봄이란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 모든 돌봄이 우리의 가정에서뿐 아니라 친족에서부터 공동체, 국가, 지구 전체를 포함한 모든 영역에서 우선시되는 것을 의미한다.” -p41
“돌보는 경제에 대한 우리의 비전은 또 시장 확장에 대한 신자유주의 의제를 바로잡는 과정에서 경제를 오로지 시장현상 하나로 축소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과도 반대된다”-p135
“…… (앞부분 생략)‘보이지 않는 손’이 아닌 ‘보이지 않는 심장’을 생각해야 한다. 즉 우리는 돌봄과 연민의 힘이 시장화된 개인의 이기심보다 항상 앞서야 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의 보편적 돌봄 모델은 이러한 경제적 모순의 해소를 향한 가장 중요한 단계다.”-p143
이제 정말 마지막이다. 전체적으로 번역물이기 때문에 매끄럽지 못한 번역투의 긴 문장들이 눈에 자주 띈다. 잘못된 문장도 있었다. 그런 부분을 제외하고는 새삼 돌봄과 사회 정치에 대한 깊이 있는 사유를 끌어낼 수 있는 책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어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