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 SBI 필기시험에서 가해자들에게 합당한 처벌을 내리지 않는 대한민국의 법을 지적하는 책을 제안하는 글을 썼다. 이렇듯 법의 유효성에 대한 의구심이 늘 있었다. 수많은 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범죄가 끊이지 않는 현상은 법이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 아닌가, 과연 피해자를 위한 법은 존재하는 것인가 하는 의심. 그러나 우리는 법을 멀리 할 수 없다. 나의 가장 큰 권리를 담고 있는 언어이고, 그 권리를 요구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그때 가장 필요한 게 결국 법이기 때문에.
이 책은 국회에서 10년 남짓 입법노동자(국회의원 보좌관)로 살며 법을 하나하나 만들 때마다 법의 당사자와 공무원, 주민, 기업인, 노동자, 시민단체 활동가들과 지지고 볶으며 보낸 시간에 대한 기록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렇듯이, 나에게 국회는 부정적인 이미지(=국민 세금으로 특혜를 누리면서도 마냥 싸워 대는 집단)로 박혀있다. 그러나 저자는 시민이 국회를 버리면 권력과 가장 가까운 자들부터 국회를 활용하게 된다고 말한다. 욕만 하고 관여하지 않으면 국회가 '가진 사람'의 것이 되고, 불행하게도 '가장 절실한' 사람에게 가닿지 못한다고. 결국 우리 일상을 흔들고 변화시킬 수 있는 게 법이라는 말에 설득되어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총 14개의 법을 만드는 과정과 함께 법이 통과된 이후의 세계가 차례로 펼쳐진다. 법 하나 통과되면 천지개벽할 것 같았지만 결국 눈 하나 꿈쩍 않는 세상에 대한 설움과, 제대로 된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지만 되돌아보니 그래도 1센티미터씩은 나아가고 있는 세상에 대한 저자의 낙관도 함께 담겨있다.
특히 기억에 남는 건 「스토킹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이다. "삶을 통해 존재를 증명할 권리"라는 제목의 이 글은 2022년 9월 14일 밤 일어난 서울 지하철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으로 시작한다. 가해자 전주환이 자신을 스토킹 혐의로 고소한 서울교통공사 입사 동기 A씨를 역 내 화장실에서 살인한 사건이다. 피해자로부터 최초로 스토킹 사건을 신고 받은 경찰은 1차 구속영장을 신청했다가 기각되자, 피해자가 2차로 신고한 뒤에는 영장 신청을 하지 않았다. 형사 사법 실무에 따르면 경찰은 스토킹이 신고될 때 반드시 구속영장을 신청해야 했고, 설령 기각되더라도 사정 변경(피해자에 대한 위해 우려)을 통해 영장을 재신청했어야 했다. 게다가 법원은 가해자가 지난 3년 간 피해자에게 350여 차례나 연락하고 불법 촬영물 유포 협박을 지속했음에도 불구하고 '거주지가 일정하고 도주 우려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영장을 기각했다. 경찰과 법원은 스토킹을 '가벼운 범죄'로 본 것이다.
「스토킹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은 최초 발의 이후 22년 만인 2021년 10월에야 어렵게 통과됐다. 법 통과 전까진 피해자가 신고해도 피해자가 맞거나 협박과 강요를 당해야만 처벌이 가능했다. 가혹하게도 피해자가 숨지기 직전까지 가야 국가 공권력이 작동될 수 있었다. 사건 직후 서울교통공사가 내놓은 재발 방지 대책은 더 기가 차다. '여직원 당직 폐지'. 게다가 여성가족부 장관은 피해자가 자신을 보호하는 조치를 하지 않아 생긴 일인 양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했다. 철저히 가해자의 시선으로 사회를 바라보는 이들을 보며 분노가 차올랐다. 피해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 법인데 법이 그들을 외면하면, 그럼 피해자들이 기댈 수 있는 곳은 이 국가 내에 과연 존재하는가?
저자는 피해자의 입장에서 끊임없이 싸웠다. 신당역 사건 직후 국회 차원에서 긴급하게 사건 현장에 가고, 경찰청·법무부·여성가족부 등의 관계 기관을 불러서 왜 사건 예방을 못했는지 현안 질의를 하고, 「스토킹방지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을 만들었다. 스토킹처벌법은 반의사불벌죄 조항을 삭제하는 안 중심으로 개정됐고, 5,400여 건 처분된 스토킹 행위가 국가 공식 실태 자료로 분석되어 예방 자료로 쓰이게 되었다. 저자가 전하는 핵심 메시지는 이것이다. "죽음을 통해서만 여성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의 존재가 증명되는 일은 더이상 일어나지 말아야 하며, 그 역할을 국회가 해야 한다는 것".
법의 시작과 끝에서 고군분투하는 과정을 보니 저자와 같은 사람들이 더 힘을 낼 수 있도록 나도 목소리를 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이들이 평범한 일상을 살 수 있는 그 날이 올 때까지 좀 더 경각심을 가지고 법을 들여다봐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또다시 법에 대한 회의감으로 법을 멀리 하고 싶을 때마다 이 책을 꺼내볼 생각이다.
📖 (김영란 전 대법관 추천사 中) 저자는 공감만 하고 해결하지 못하는 정치가 더 나쁘다고 지적하면서 '대안 없는 공감'이 가장 경계해야 할 태도라 하는가 하면, '지당하신 말씀'이 아닌 '보고 듣고 만지는 민주주의'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이런 일을 해 나가려면 능력을 과시할 게 아니라 이해를 확장해야 한다고 말한다. 누구든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저자의 지적은 단지 국회에서뿐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에 다 적용되어야 할 것들이다. 나아가 이 지적에 대한 현재완료형 답이 무엇인지도 다 함께 고민해야 할 것이다.
📖 (이슬아 작가 추천사 中) 읽는 동안 냉온욕 하는 것마냥 가슴이 차가워지고 뜨거워지기를 반복했다. 냉기가 돌 정도로 빠르고 정확한 실무자의 실행 능력과 별수 없이 따뜻하고 물렁한 시민의 마음이 번갈아 읽혔다. 그런 사람이 만든 법들은 이 이름만으로도 내 마음을 흔든다. 인생의 아주 취약한 부분을 다루기 때문일 것이다. 가진 자를 더 가지게 하는 이야기 말고, 그늘진 구석과 벼랑 끝에 선 자의 이야기를 위한 책이다.
📖 (p.19) 법은 자원을 배분하는 사회의 약속이자 누구도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돕는 그물망 역할을 한다.
📖 (p.53-54) 보이지 않는 자를 보이게 하고, 목소리 없는 자의 목소리가 되는 것이 대리인으로서 국회의 본령이다. 법은 하나의 도구일 뿐, 피해자는 피해 사건으로 인해 단절된 일상을 다시 살게 되는 때에야 비로소 치유될 수 있을 것이다. 법이 국가로부터 버림받아 평생 각인된 고통에 한 줌 위로의 도구가 될 수 있기를. 그것이 내가 이곳에서 일하는 이유다.
📖 (p.222) 말이 되지 않는 말을 꿰는 일은 시민이 시간을 써서 연습할 것이 아니라 국회가 해야 할 일이다. 귀를 쫑긋 세우고 시민의 표정을 살피며 맞게 이해하고 있는지 놓친 것은 없는지, 말 속의 외마디는 없는지를 살펴야 한다. 리터러시 훈련이 가장 필요한 곳은 국회다. 능력의 과시가 아니라 이해의 확장이 가장 필요한 곳이 바로 이곳이기 때문이다.
📖 (p.225) 국회는 법을 창작하는 곳이고 행정부는 창작된 법을 집행하는 곳이고 사법부는 해석하는 곳이다. 그래서 나는 후배들에게 농담 반쯤 섞어서 우리 직업은 요즘 유행하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라고 하곤 한다. 그런데 정작 창작하는 곳인 국회는 너무나 바쁜 나머지 새로운 생각과 시도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